이소룡(Bruce Lee, 1940~1973)이 정식 주연을 맡은 영화는 정확히 네 편 반 정도라고나 할 수 있겠다. 1971년 <당산대형>을 시작으로 <정무문>(1972), <맹룡과강>(1972), 그리고 <용쟁호투>와 <사망유희>(1973). 그는 <사망유희> 촬영 중 사망했다. ‘당룡’이라 알려진 한국인 배우 김태정이 대역을 맡은 그 작품은 완성도 미완성도 아닌, 엉성한 짜깁기로 점철된 괴작이었다. 이소룡은 그 작품에 자신의 무술 철학을 온전히 담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직도 썰이 분분하나, 확언은 하지 않겠다.


‘유희’하지 못한 ‘사망’의 미완성작

‘철학’이란 표현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소룡이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었다는 사실(연극과 철학 복수 전공)은 그저 참조 사항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의 내면이나 이력을 살피는데 무시할 수 있는 요소도 아니다. 이소룡은 중국 전통 무예에서도 이단아에 속한다. 그는 복싱, 가라데, 태권도 등 다양한 격투 양식을 종합한 자신만의 무술 체계를 창립하려 애썼다. 그렇게 탄생한 게 ‘절권도’다. ‘주먹을 막는, 가로채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소룡은 <사망유희>를 통해 절권도의 철학을 온전히 담으려 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용쟁호투>에 출연하게 된다. 급작스레 ‘사망’ 했으나 제대로 ‘유희’하지 못한 <사망유희>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용쟁호투>는 이소룡의 ‘철학’을 제법 만듦새 있게 담아낸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소룡

이소룡이 주연한 영화들은 대체로 엉성한 서사와 빤한 복수극의 구조를 반복하는 패턴이다. 당시 대개의 무술 영화들이 대체로 그랬다. 모든 극적 요소들이 오로지 격투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부실한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결국 그런 영화에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 건 신체의 무한대적 운용으로 펼쳐지는 격투 장면이다. 지금은 온갖 특수효과를 통해 보다 현란하고 초인간적인 장면들을 연출하지만 당시엔 순전히 배우들의 몸으로 모든 액션을 소화해야 했다. 엑스트라가 동원되더라도 최종적인 스펙터클은 결국 배우의 무술 실력과 잘 단련된 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소룡은 실전 무술로 세공한 몸 자체로 독보적인 드라마가 된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전 세계를 휘어잡는 스펙터클이 되었다.

<용쟁호투>는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소룡이 실제로 영어 대사를 남긴 유일한 극장판 영화이기도 하다. 이소룡은 경극 배우였던 아버지 이해천과 영국계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다. 독일계가 4분의 1쯤 섞인 혼혈이므로 완전한 동양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영화와 무술을 접했고, 그게 결국 그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무술에 대한 견해와 철학은 영춘권으로 유명한 스승 ‘엽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중국 전통 무술계의 억압적인 권위 및 보수성과 자신을 차별화하려 했다. ‘절권도’도 그 결과물이다. 척 노리스, 스티브 맥퀸 등 그에게서 절권도를 사사한 할리우드 배우도 부지기수다. 그는 새로운 무술의 창안자이자 변칙적인 이론가인 동시에 실제 싸움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의 독창성을 할리우드가 놓칠 리 없었다.


무술 영화의 클리셰, 첩보물을 답습하다

<용쟁호투>는 CIA와 소림사의 협업이라는 뜬금없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소림사에서 무술을 익힌 한(석견)이란 악당이 국적 불명의 섬을 사들여 마약과 매춘 사업을 한다. 그걸 위장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무술인들을 초청하는 무술 대회를 개최한다. 그의 악행들을 파헤치려 소림사에서 수련 중이던 리에게 CIA가 접근한다. 리는 한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일당들을 타도하라는 밀명을 받은, 일종의 스파이가 된다. 섬에 도착한 리는 그곳에서 만난 도박 빚쟁이 로퍼(존 색슨)와 고국에서 인종차별에 질려 도망치다시피 참가한 흑인 윌리엄스(짐 켈리)를 알게 된다(로퍼와 윌리엄스는 월남 참전 전우 사이다). 섬으로 떠나기 전 리는 자신의 여동생이 한의 부하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 자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정의와 복수라는 무술 영화의 고전적 클리셰에 첩보물 구조가 이식되는 셈이다.

한의 지하 기지로 잡입한 리는 한의 부하들과 일대 격전을 벌이며 진상을 알아 간다. 부하 역할로 단역 출연한 성룡, 홍금보, 원표 등 후에 홍콩 액션 영화의 스타로 떠오르게 되는 배우들의 풋내기 시절을 볼 수 있는데, 전부 리의 필살기에 나가떨어진다. 갇혀있던 볼모들을 모두 탈출시키곤 흰색 도복을 입은 한의 부하들과 검은 도복을 입은 포로들이 섬 전체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한의 처소에서 맞붙는 한과 리의 일전. 유명한 거울방 격투 장면이다. 훗날 이소룡을 아이콘화한 대부분의 스냅들이 이 장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노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쌍절곤을 휘두르는 모습은 <사망유희>의 한 장면이다). 클로(집게 발 형태의 무기)를 의수로 착용한 한에게 긁혀 몸과 얼굴에 서너 줄 핏자국이 선연해진 리가 거울방에 숨어든 한을 좇는다.

사방이 온통 거울이다. 리의 모습도 한의 모습도 대부분 거울에 비친 허상이다. 피차 바로 곁에 있어도 못 알아보고, 거울에 비친 여러 겹의 상대 모습 중 실체를 찾아 타격해야 한다. 뒤가 앞이고 허상이 실상보다 더 선연하며, 오른쪽이 왼쪽이 된다. 이따금 서로 맞부딪쳐 일격을 나누지만 금세 다시 실체가 사라진다. 맞고 때림마저 난분분해진 허상들의 그물 속에서 허방을 가로지른다. 나도 여럿이고, 상대도 여럿이다. 그중 진짜는 하나뿐이지만, 무슨 너울처럼 겹겹으로 출렁이는 허상들 중 과연 어떤 게 진짜일까. 문득, 리의 뇌리에 소림사 스승의 전언이 떠오른다.


거울 속의 적, 상대는 관념이다!

상대는 관념이며 환영이다. 진정한 목적은 그 뒤에 숨어있다. 관념을 파괴하면 적을 제압하리라.

이것은 스승의 목소리이자, 리의 내면에서 발돋음한, 오랜 수련을 통해 체득한 적과 자아에 대한 냉엄한 인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초반 리는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적은 보는 게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이 전언은 배우 이소룡이 연기한 인물의 화두인 동시에 무술인 이소룡이 스스로 정립한 무술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다.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 철학과 기술적 원리를 직접 체계화하고 무술 동작까지 직접 그린 『절권도』라는 책을 쓴 바 있다. 단순 무술인을 넘어 철학적 원리와 개념을 내면화한 잠언들이 가득 차 있는 책이다. 그중 이런 내용이 있다.

진실은 살아있고, 그렇기에 변화한다. 진실은 안식처를 두지 않으며 형태나 조직화된 단체, 철학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했다면 그 살아있는 존재가 네 자신이란 것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정지한 상태, 형태를 갖춘 상태, 그리고 정형화된 움직임을 익힌 상태에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살아있음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한이 거울 방 속에 자신을 숨긴 이유는 리를 교란하기 위해서다. 수많은 허상으로 분절된 자신을 리가 찾아내지 못할 거라 여긴 거다. 거울 방은 한의 내밀한 비밀 기지인 동시에, 가짜들을 내세워 자신의 본체를 숨기는 은신처이다. 리에겐 당연히 혼란스럽고 낯선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은 폐쇄적이되, 유동적이다. 사람의 움직임을 여러 갈래로 쪼개어 분열케하지만, 바로 그 분열로 인해 오히려 모든 동작들이 헛것임을 역설적으로 일깨운다. 이를테면 ‘정지한 상태’로 ‘정형화된 움직임’을 해체하고 ‘진실’의 초점에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리의 뒷모습이 더 크고 앞모습이 더 작아 보이는 건 당연한 물리이지만, 그 깨달음은 당연하지도 상투적이지도 않다. 원래 적은 내 뒤에, 그리고 모든 보이는 것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언제나 다시 싸워야 할 건 나 자신뿐!

한은 숨으면 숨을수록 더 실체가 드러난다. 리는 동작을 줄일수록 허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리는 숨죽인 채로 ‘정지’하여 되살아난다. 이른바 정지된 움직임이자, 움직이는 ‘정지 상태’라 할 만하다. 허상들이 벗겨지면서 한의 진짜 모습이 적나라해진다. 그리고 최후의 일격. 한이 거울방 입구에 꽂았던 창이 일격을 당한 한의 등을 찌르며 뱅그르르 돈다. 모든 헛것들이 지워지고 스스로의 덫에 걸린 허상의 기만자가 자신이 던진 창에 꽂히며 거울들이 깨진다. 리의 뒷모습이 더 크고 앞모습이 더 작아 보이는 건 당연한 물리이지만, 그 깨달음은 당연하지도 상투적이지도 않다. 원래 적은 내 뒤에, 그리고 모든 보이는 것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적이라 불리는 관념을 지우고 나면 언제나 다시 싸워야 할 건 자기 자신뿐이니까.

<용쟁호투>. 새삼 흥미로운 제목이다. 용도 호랑이도 결국 자신의 배면이자 거대한 관념에 불과한 것 아닌가. 쟁투하라.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용도 호랑이도 잊어라. 그래, “상대는 관념이며 환영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저주하는 적도 모두 그렇게 나로 인한 헛것들인 거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