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5년 만에 대상을 받은 <나만 없는 집>(2017),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수상작 <입문반>(2019) 등 일련의 단편영화로 주목받은 김현정 감독의 첫 장편 <흐르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대구에 사는 취업 준비생 진영(이설)이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아버지의 공장 일을 도우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부녀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김현정 감독을 만나 <흐르다>를 비롯한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단편이랑 이번 <흐르다>까지 대구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히려 시나리오 공부하고 습작하던 시절에는 다양한 이야기도 해보려고 했었어요. 같이 공부하던 분들이 워낙 기발하고 또 잘하셔서 저도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독특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아서 그렇게 해보려고 했는데 성과가 좋지는 않았죠. 그러던 중에 지역 기반의 제작 지원을 받게 됐고, 저도 제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계속 대구를 배경으로 하게 됐어요. <흐르다>가 그동안 단편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와 제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의 응축 같은 작품이 됐어요. 첫 장편이라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동안의 것들을 쌓아서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게 생각보다 일찍 제작 지원을 받으면서 만들 수 있게 됐어요.

대구에서 촬영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요?

대구도 대도시이기 때문에 이제 서울에 비해서 인프라 같은 부분에서 부족함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서울은 작업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섭외를 하나 해도 보수적으로 반응하시잖아요. 그런데 아직 대구는 영화 찍는 걸 신기하거나 궁금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아서 도움받을 수 있는 게 있어요. 아직 장비라든가 키스탭(각 분야 핵심 스태프)은 서울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 상황이 있긴 한데,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대구는 그런 부분에 있어선 유리한 면이 많아요.

<은하비디오>

대구 사람이 주인공이 되다보니 배우들이 사투리를 구사해야 하죠. 다른 지역 출신 분들을 쓸 때는 이 점이 꽤 난감할 것 같아요.

대부분 경상도 출신 분들이었어요. <은하비디오>의 김예은 배우는 부산 분, <입문반>의 한혜지 배우는 울산 분이었어요. <나만 없는 집>의 김민서 배우만 서울 친구였는데, 암기를 시켰죠. <흐르다>의 이설 배우도 경북 청도 분이고, 아버지 역의 박지일 선배도 부산 분이어서 사투리 면에선 괜찮았어요.

조연 배우들의 사투리가 더 리얼하게 들렸어요. 실제로 대구 분들이 많은가요?

네, 아무래도 활동하면서 친하게 된 분들도 있고. 배우가 아닌 일반인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더 리얼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저만 해도 대구에 있다가 오랜만에 서울에 와서 한참 있다 보면 사투리가 약간 흐려지더라고요. 아무래도 배우님들 활동 기반이 서울이다 보니까 본인이 잊고 있던 사투리도 다시 연습하셨을 거예요.

<흐르다>가 첫 장편의 이야기가 된 이유가 있을까요?

언젠가는 부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풀리지 않는 저의 숙제이기도 하고, 독립영화를 봤을 때 모녀 관계는 좀 있어도 생각보다 부녀 관계를 풀어낸 작품들이 많지 않아서 영화적인 호기심도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기획 개발 지원을 받고 연이어 영진위에서도 제작 지원을 받았어요. 지원이 늦어졌으면 묵혀뒀다가 다른 기획이 첫 장편이 됐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부녀 관계의 이야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아서 더 관심 있게 봐주셨던 것 아닐까 해요.

<흐르다>

“이야기를 만들 때 늘 구조를 먼저 세워놓고 시작한다”고 말씀하신 걸 봤는데 <흐르다>는 어떤 구조로 시작됐나요?

어머니가 살아있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진영 이 셋의 관계 차이가 초반에 빨리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진영과 아버지가 엮이는 걸로 설정돼 있었고요. 공장에 조금씩 깊게 관여하게 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짰어요.

직접 영화를 찍어 보면서 부녀 관계에 대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이전에는 아버지로서 제 아버지를 봤다면, 이제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군분투하지만 가족들 눈에는 그게 성치 않은 모습들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좀 더 느껴졌어요.

단편들로 많은 주목을 받아오셨죠. 장편 만들면서 새롭게 느꼈던 건 무엇이 있을까요?

이전에 갖고 있는 것들이 많이 깨졌어요.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들이 깨지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프로덕션이 길어서 생긴 문제들이었을 텐데요. 오랜 기간 현장을 이끌어야 하니까 변수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단편은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 촬영하니까 변수가 있어도 대처가 가능했는데, <흐르다>는 촬영 기간도 워낙 길고 등장하는 배우들이나 참여하는 스탭들도 많다 보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나 작품 내에서도 문제가 발생해서 이런 변수들을 대처하느라 힘든 현장이었어요.

<흐르다>는 몇 회차 찍으셨어요? 촬영할 때가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었을 때였는데.

2020년 가을에 25회차, 한 달 넘게 촬영했어요. 장소 섭외에서 부침이 많았죠. 메인 무대인 공장이 섭외가 정말 어려웠어요.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스탭 인원만 20명이 넘다 보니, 그때는 아예 문을 닫아 두시거나 저희가 오는 걸 꺼려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촬영 전에 온도 측정이나 마스크 착용하고 그러는 것 자체가 생소했고요. 촬영하다가 쫓겨나지 않을까 항상 불안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바깥에서 촬영할 때 어차피 포커스가 좀 날아가니까 지나가는 행인들 그냥 통제 없이 촬영할 수 있었는데,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까 아예 화면에 안 걸리도록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은하비디오’, ‘나만 없는 집’, ‘입문반’, ‘외숙모’ 등 이전 단편들의 제목은 명사형이었는데, ‘흐르다’는 동사형이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대상도 아니에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흐르다>가 생각나기도 해요. 제목은 처음부터 ‘흐르다’였나요?

네. 영화가 잔잔하기도 하고, 사건들이 있긴 해도 딱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명사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시집도 뒤져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다가 ‘흐르다’로 정했어요.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는 것 같아서 우려가 있긴 했지만, 영화를 그나마 설명할 수 있는 제목으로서는 톤앤매너적인 측면에서도 어울리지 않나 싶어서 지금까지 왔어요. 저도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 굉장히 좋아하는데, 아마 그 전례가 없었다면 저도 고민이 더 길어졌을 텐데,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영화가 잔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흐르다’라는 동사는 결국은 느리게나마 움직이고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보통 제목을 각인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러 오시잖아요. 워낙 중의적인 단어니까 각자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점이 있어서 제 입장에선 좋은 제목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싶어요.

<흐르다> 언론 시사회 현장. 배우 이설, 김현정 감독, 배우 박지일

이설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 하셨어요?

사실 이설 배우의 존재를 몰랐는데, 오디션 공고를 낸 후에 이전 소속사 대표님이 관심 있게 보고 프로필을 보내주셨어요. 공고를 내면 프로필이 많이 들어와서 제가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는데 이설 배우는 단연 돋보였어요. 진영은 고민이 많은 캐릭터인데, 이설 배우는 외적으로도 단단해 보여서 오히려 본인이 알아서 잘 선택해서 갈 것 같은 배우가 진영을 연기하면 저도 보고 싶어질 것 같았어요. 시나리오 드리고 배우분도 하고 싶다고 하셔서 다행히 서로 마음이 맞아 그렇게 작업하게 됐어요.

이설 배우는 진영 역 준비하면서 감독님을 참고했다더군요. 두 분이선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아무래도 제가 고민이 많다 보니.. (웃음) 캐릭터의 전사보다는 시나리오에 담긴 내용에 충실한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오히려 진영이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고민을 하는가 같은 거요. 제 이전 단편들을 보면서 유사성 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특징을 인지하셨고, 저를 참고는 했겠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연기해야 하니 고민하던 시기를 스스로도 많이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흐르다>

이전 단편들에선 아버지의 존재가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서사의 중심에 서는 법이 없었어요. 외숙모가 중심이 될지언정 아버지는 늘 뒷전이었죠. <흐르다>를 보면 어머니가 죽어야만 아버지의 이야기가 작동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저도 평소에 아버지하고 소통을 많이 안 하면서 성장하다보니 부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막상 상상이 잘 안되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빠져야 아버지하고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가 죽는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죠.

단편들에선 주인공 한 명이 거의 모든 신에 등장했어요. 혹은 그 외의 캐릭터만을 위한 신은 없었어요. 아버지가 중요한 역할이긴 해도 아무래도 주인공은 진영인데, <흐르다>에서는 공장 문 여는 것부터 해서 아버지만의 신이 몇몇 있더라고요. 아버지의 단독 신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필요까지는 모르겠고, 넣고 싶어요. 제가 원톱 주인공 영화를 주로 하다보니 장편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인물과 인물이 같이 엮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는데, 아버지를 얼마나 등장시키느냐의 문제가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어요. 등장하는 빈도가 반반이어야 하나, 이 정도는 해야 아버지가 더 드러나려나, 많이 고민하다가 결국 진영이 중심이 돼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안에서 아버지의 서사가 너무 뜬금없지 않게 흐름에서 적절하게 찾는 과정을 고민했어요. 아버지가 가족에게 모질게 굴고 저렇게 공장에 매달리는 건 조금은 설명해주고 싶었어요.

찍었는데 쓰지 않은 아버지 신도 있나요?

아니요. 찍은 건 전부 썼어요. 오히려 진영의 신들이 좀 빠졌고, 아버지는 딱 그만큼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더 과감했으면 어떨까 싶긴 해도, 제 기준에선 그게 최선인 것 같아요.

집에서 공장을 운영하셨다고요. 그로 인한 영향이 <흐르다>에도 많이 반영됐을 텐데.

아버지 이야기를 왜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소통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일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다보니 어렸을 때 공장 운영하시는 걸 본 것들이 영화에서 드러났을 거예요. 저희 집도 <흐르다>의 설정과 유사한 점이 많거든요. 어머니가 공장 업무 보면서 맞벌이하셔서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어요. 그게 저한테 많은 감정을 차지하고 있어요. 부모님의 부재라고 해야 하나, 그 감정이나 상황을 제가 납득하고 싶은 욕망이 커서 자연스럽게 영화에도 이렇게 나왔던 것 같아요. <나만 없는 집>은 집에 혼자 있는 아이의 상황이라면, <흐르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긴 해도 공장 가서 옆에 붙어 있는 신들이 많아요. 아버지와 딸의 소원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자주 대면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끈끈한 관계가 설명되기를 바랐어요.

<외숙모>

어머니 역의 안민영 배우는 단편 <외숙모>에서도 출연한 분이에요. <외숙모>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대화에서만 계속 언급되다가 마지막 부분에 아주 짧게 등장해요. 그 효과가 강력하죠. 재미있는 건 <흐르다>에서는 반대로 초반에 등장하셔서 꽤 일찍 퇴장해요.

제 단편이 그분의 다른 단편과 같은 섹션에서 상영돼서 GV에 같이 섰어요. 끝나고서 저한테 인사하시면서 자기도 대구 사람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뵙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외숙모>를 찍어야 했어요. 그분이 생각나서 같이 작업해주실 수 있냐고 요청해서 같이 하게 됐어요. 오래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갑자기 연락드려서 스케줄 때문에 짧게 출연하셨고, <흐르다>에서도 어머니 역할에 자연스럽게 안민영 배우가 생각나서 전작에서 하지 못한 다양한 얘기들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분도 엄마가 좀 더 등장해야 되지 않냐고 말씀해주셨어요.

촬영할 때 테이크를 많이 가시는 편인가요? <흐르다>에서 유독 많이 찍은 장면은 무엇인가요?

네, 많이 줄이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됩니다. (웃음) 더 찍으면 뭔가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욕심이 촬영하다보면 자꾸 생기더라고요. 진영이와 아버지가 싸우는 장면은 두 번에 나눠서 찍었어요. 처음엔 찍다가 해가 지는 바람에 아예 쓰지 못했고, 스케줄을 다시 잡아서 한 번 더 촬영했어요. 수위나 타이밍 같은 것에 고민이 길어졌어요. 육교 신도 두 번에 걸쳐 찍었어요. 그 순간 진영의 감정이 저도 좀 헷갈려서 결국 그날 오케이가 안 나서 다시 한번 더 갔어요.

육교 신에선 어떤 확신이 들었나요?

직감적이어서 되게 미묘한 건데… 불현듯 찾아오는 울컥함이 좋겠다는 생각은 일단 있었고, 마지막 그 테이크가 가장 잘 표현돼 있었어요. 사람을 피하려고 지나쳐서 다른 데로 빠지는데 그래서 갑자기 솟아나는 서러움 내지는 그리움이 드러나고, 그게 단계적으로 끌어 올라왔으면 좋겠다 였어요. 이설 배우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를 잘하시는 분이라 크게 디렉팅 하지는 않았어요. 지금까지 저희가 찍어 놓은 것들이 있으니 그 상황에서 딱 터져 나오는 울음이고, 자유롭게 감정대로 흘러가되 마지막에 엄마라는 단어만 내뱉어 달라고만 부탁했어요. 중요한 장면에서 감정의 정도나 방향이 아주 현실적인 영화다 보니까 이런 게 조금 어긋나면 이입이 떨어져 나갈 수 있잖아요. 딱 이렇게 해달라 말씀드리면 좋을 텐데 사실 저도 보면서 찾는 타입이어서 고민들이 길어지는 것 같아요.

첫 신에 진영이 속옷을 입고 있다거나 아버지와 싸울 때 “내 몸에 손대지 마라”라고 내뱉는 것에서 새삼 딸과 아버지가 성별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했어요.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사는 불편함을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장면이라서 그렇게 시작했어요. 헷갈리셨다는 얘기도 몇 번 들었어요. 모녀는 아무래도 동성이기 때문에 몸이 편하게 부딪히고 어머니의 몸으로 낳은 관계인데, 이성인 아버지와 딸은 육체적으로 가장 멀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만 없는 집>

<나만 없는 집>의 둘째 딸, <입문반>의 스터디 모임 등 단편들의 설정이 <흐르다>에서도 보여요.

영화 시작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식상하더라고요. 아는 선에서 이야기를 할 때 아무래도 재미있는 게 나온 편이라 지금도 그렇게 하는 편이고. 영화에서 진영이를 고립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가족도 고립되어 있는데, 외부적 관계도 쉽지 않은. 특히 취업 스터디라는 게 되게 애매하잖아요. 직장에 속해 있는 집단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고, 중간 과정에서 거치는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면 와해되는 청년들의 모습도 담아내고 싶었어요. 단짝도 나올 수 있지만 그런 설정을 배제시켰고, 진영이가 처한 고립감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가족 외의 관계로서 취업 스터디를 활용했어요. 실은 <입문반>에서 지겹도록 했기 때문에 스터디 신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지만, 진영을 설명하기엔 좀 부족함이 있어서 한 번 더 썼어요.

차 타고 대화하는 장면이 많은 건 <외숙모>와의 접점이기도 해요. 차이가 있다면 <외숙모>에서는 엄마와 딸을 나눠서 찍었고, <흐르다>는 주로 정면에서 투샷으로 찍었죠. 자동차야말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시나 싶었어요.

사실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에요. 그전에는 저희가 렉카를 쓸 수 없었던 환경이라 어쩔 수 없이 따로 찍을 수밖에 없었고. 렉카를 활용하면서 비로소 투샷을 찍을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묘하게 나중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트럭 투샷하고도 배치되니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공장에서 어머니가 바쁠 때는 둘이 길게 얘기할 수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자동차가 공간이 됐어요. 아버지와의 대화도 마찬가지고요. 영화적으로 재미없는 장소이긴 한데, 자동차 할부 같은 설정을 부수적으로 넣어서라도 풍성하게 하고 싶었어요.

잘 안 맞을 것 같은 진영과 아버지의 관계가 의외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남자 직원이 들어오면서 서서히 갈등이 시작돼요. 여자들이 쌓아 올린 성과를 남자들이 모여서 망치는 것 같달까요.

성별의 구분은 아니었어요. 궁극적인 문제의 원인은 아버지가 일을 하는 데에 있어 본인이 부족한 면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의존적인 점 때문에... 남자 직원은 학벌이나 직장에서 유능한 설정으로 나오잖아요. 그런 거에 기대는 어리석음 같은 게 있어서 발단한 문제였어요. 저도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요. 진영이만 해도 힘이 없잖아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이들은 아버지를 위해 진심으로 조언해줄 수 있는 인물들인데, 아버지는 그들의 말은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고, 사회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사람의 말에 집중하는 게 미웠어요.

있어도 될 법한 장면들을 생략하고 진행하는 편이라, 공장 여자 직원이 그만두고 작별 인사하는 신이 오히려 잉여처럼 느껴졌어요.

진영이 영화 안에서 자기 편처럼 쌓아올린 유일한 관계, 본인이 엄마의 자리에 온 후에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우정 아닌 우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헤어지는 장면까지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울과 대구의 인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대구를 포함한 지역은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에요. 서울은 다른 감독님이나 작품을 만나는 영감이나 자극을 받는 두근거림? 그런데 제가 여기서 뭘 만들게 될 것 같진 않아요. 약간 비껴 나간 지방의 마이너한 매력이 저한테는 더 흥미로워요.

첫 장편 <흐르다> 이후에 벌써 단편 두 편을 찍으셨죠. 장편을 만들어 본 후의 영향이 있다면.

힘을 좀 빼게 됐어요. 예전에는 테이크를 많이 간다든가 한 장면 한 장면 온 마음을 다해서 만들었는데, 장편에서는 또 그것이 합쳐졌을 때 주는 전혀 예측하진 못한 힘들이 있잖아요. 그걸 믿고, 소위 힘 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이제 단편을 찍을 때는 약간 아쉬운 면이 있어도 합쳐졌을 때의 그 시너지를 생각하면서 힘을 빼기도 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힘을 줘야 되는 부분에서는 더 많이 쏟으려고 했었고. 실제로 최근에 만든 단편에서는 연기 연습을 아예 안 했어요. 의도한 건 아니고 시간이 너무 없어서. 그런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이 두 작품을 보시면 제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다른 지방에서 찍은 두 단편은 어떤 작품인가요?

하나는 강원도 태백, 작년 11월에 찍은 건 강원도 원주에서 촬영했어요. 원주에 아카데미 극장이라고 예전에 필름을 상영했던 공간인데 요새 폐관에 관한 이슈가 좀 많아요. 그곳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하게 됐어요. 태백에서 만든 건 탄광 배경으로 찍었어요. 여성 광부에 관한 얘기를 듣고서, 전면적으로 나오는 건 아닌데 그걸 배경으로 만들게 된 영화예요.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들 이야기예요. 강원도에서 교육 요청이 들어와서 오래 머물다 보니 느껴지는 지역 안에서 나오는 재미있는 소재가 많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작업하게 됐어요.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