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들 때 늘 구조를 먼저 세워놓고 시작한다”고 말씀하신 걸 봤는데 <흐르다>는 어떤 구조로 시작됐나요?
어머니가 살아있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진영 이 셋의 관계 차이가 초반에 빨리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진영과 아버지가 엮이는 걸로 설정돼 있었고요. 공장에 조금씩 깊게 관여하게 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짰어요.
직접 영화를 찍어 보면서 부녀 관계에 대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이전에는 아버지로서 제 아버지를 봤다면, 이제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군분투하지만 가족들 눈에는 그게 성치 않은 모습들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좀 더 느껴졌어요.
단편들로 많은 주목을 받아오셨죠. 장편 만들면서 새롭게 느꼈던 건 무엇이 있을까요?
이전에 갖고 있는 것들이 많이 깨졌어요.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들이 깨지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프로덕션이 길어서 생긴 문제들이었을 텐데요. 오랜 기간 현장을 이끌어야 하니까 변수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단편은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 촬영하니까 변수가 있어도 대처가 가능했는데, <흐르다>는 촬영 기간도 워낙 길고 등장하는 배우들이나 참여하는 스탭들도 많다 보니까 사람들 사이에서나 작품 내에서도 문제가 발생해서 이런 변수들을 대처하느라 힘든 현장이었어요.
<흐르다>는 몇 회차 찍으셨어요? 촬영할 때가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었을 때였는데.
2020년 가을에 25회차, 한 달 넘게 촬영했어요. 장소 섭외에서 부침이 많았죠. 메인 무대인 공장이 섭외가 정말 어려웠어요.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스탭 인원만 20명이 넘다 보니, 그때는 아예 문을 닫아 두시거나 저희가 오는 걸 꺼려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촬영 전에 온도 측정이나 마스크 착용하고 그러는 것 자체가 생소했고요. 촬영하다가 쫓겨나지 않을까 항상 불안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바깥에서 촬영할 때 어차피 포커스가 좀 날아가니까 지나가는 행인들 그냥 통제 없이 촬영할 수 있었는데,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까 아예 화면에 안 걸리도록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은하비디오’, ‘나만 없는 집’, ‘입문반’, ‘외숙모’ 등 이전 단편들의 제목은 명사형이었는데, ‘흐르다’는 동사형이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대상도 아니에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흐르다>가 생각나기도 해요. 제목은 처음부터 ‘흐르다’였나요?
네. 영화가 잔잔하기도 하고, 사건들이 있긴 해도 딱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명사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시집도 뒤져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다가 ‘흐르다’로 정했어요.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는 것 같아서 우려가 있긴 했지만, 영화를 그나마 설명할 수 있는 제목으로서는 톤앤매너적인 측면에서도 어울리지 않나 싶어서 지금까지 왔어요. 저도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 굉장히 좋아하는데, 아마 그 전례가 없었다면 저도 고민이 더 길어졌을 텐데,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영화가 잔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흐르다’라는 동사는 결국은 느리게나마 움직이고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보통 제목을 각인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러 오시잖아요. 워낙 중의적인 단어니까 각자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점이 있어서 제 입장에선 좋은 제목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