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바빌론>과 <파벨만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감독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길 원하는 일종의 관문과도 같다. 무성 영화 시절 버스터 키튼은 <셜록 2세>(1924)와 <카메라맨>(1928)을 통해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거장은 <현기증>(1958), <이창>(1954) 등 자신의 필모그래피 내내 영화에 대한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지금도 나이를 불문하고 수많은 감독이 영화에게 헌사를 바치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휴고>(2011)를, 코엔 형제는 <헤일, 시저!>(2016)를, 쿠엔틴 타란티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통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담은 두 작품이 극장에서 개봉했다. 지난 2월 1일 개봉한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2023)과 이번 3월 22일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2)이 그 주인공이다. 데미안 셔젤이 10년 새 할리우드에 큰 주목을 받은 젊은 피라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50년간 꾸준히 엄청난 영화를 만들어 온 거장이다. <바빌론>이 1920년대에서 50년대까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되는 시기를 다룬 ‘영화사’에 헌사를 담은 영화라면, <파벨만스>는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으로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시기를 다룬 자전적인 영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겠다는 야심과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영화를 만들던 처음을 기억하려는 회고. 두 영화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서로 대척점에 놓인 방법론을 사용한다. 과연 <바빌론>과 <파벨만스>. 두 영화 중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자의 영화는 무엇에 가까울까?
<바빌론>: 똥밭에 구르더라도 영화가 좋다
데이미언 셔젤은 이미 2016년 <라라랜드>에서 1950년대 뮤지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한 차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었다. 당시 그는 프랑스의 자크 드미와 할리우드의 진 켈리, 빈센트 미넬리를 비롯한 뮤지컬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특히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인 그림 같은 세트에서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가 춤을 추는 시퀸스는 빈센트 미넬리의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장면이었다. 데이미언 셔젤은 이번 <바빌론>에서도 이런 방식의 오마주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영화계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쫓다가 우연한 기회로 영화계에 합류한 주인공이 <바빌론>의 주된 서사인데,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에 무성 영화 스타들은 서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유성 영화에서 살아남으려 한다는 내용은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매우 유사하다.
<바빌론>의 처음은 영화계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매니(디에고 칼바)이 촬영에 필요한 코끼리를 옮기다가 분뇨 폭탄을 맞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스타들이 참석하는 파티의 리셉션을 담당하면서 영화계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실감한 할리우드의 이면은 배설물과 난잡함으로 가득한 향락의 도시처럼 보인다. 그가 일하는 파티에서는 버스터 키튼의 파트너였던 로스코 아버클처럼 보이는 뚱뚱한 스타가 미성년자 배우의 사망에 쩔쩔매는 사건도 일어나고, 기회를 엿보는 수많은 배우 지망생이 난교를 벌이기도 한다. 매니처럼 기회를 쫓아 몰래 파티에 참여한 넬리(마고 로비)는 감독의 눈에 띄어 얻은 조연 배역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형편없는 발성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는 무성영화 초창기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대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도 매한가지다. 전성기 시절 그는 버번위스키 한 병을 비우고도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던 배우였지만, 유성영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나오는 작품마다 신랄한 혹평과 야유를 받기 시작한다.
<바빌론>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분비물의 영화다. 침, 토, 소변, 분뇨, 정액, 땀 그리고 눈물. <바빌론>에는 인간의 몸에서 배출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등장한다. 향락에 가까운 파티는 분뇨와 정액으로 가득 찼고, 교양있는 유력가들 앞에서 넬리는 거나하게 술에 취해 카펫에 구토한다. 유성 영화의 도래로 카메라맨은 방음 부스 안에서 땀을 흘리며 촬영해야 했고, 소리를 내어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의 입에는 침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영화 만들기’ 과정을 바라보며 중년의 매니는 객석에서 눈물을 흘린다. 데이미언 셔젤은 가장 추하고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과거를 들춰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영화계를 사랑한다는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모든 추의 역사까지 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는 의문이 든다. 극한으로 상황을 몰아붙인 뒤, 방대한 영화사를 훑어 내려가려는 마지막 장면의 몽타주는 애정보다는 야심만이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바빌론>이 자랑하는 이 분비물의 영화를 과연 애정이라 할 수 있는가? 살아본 적도 없는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강화시키기 위해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쏟아내는 <바빌론>은 애정보다는 차력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파벨만스>: 풍랑 속에서도 놓을 수 없던 영화
많은 이들이 마틴 스콜세지가 2011년 <휴고>를 발표했을 때처럼, 스필버그가 그릴 ‘영화에 대한’ 영화도 영화사를 훑는 작업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는 <휴고>나 <바빌론>처럼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세실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고, 청소년기 존 포드의 서부극을 보며 처음으로 영화와 사랑에 빠지고, 영화를 만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려 한다. 하지만 <파벨만스>는 그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유년기를 회고하는 낭만적인 영화가 아니다. 차라리 지난 겨울 관객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2022) 속 유년처럼 위태롭다.
GE의 엔지니어인 아버지 버트(폴 다노)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미치(미셸 윌리엄스) 아래에서 태어난 소년 새미 (가브리엘 라벨)은 극장에서 <지상 최대의 쇼>를 처음 보고는 악몽을 꾼다. 열차와 열차가 충돌해서 모든 것이 폭발하는 장면에 겁을 먹은 새미는 그때부터 그 장면을 찍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아버지가 선물한 장난감 기차와 카메라로 충돌 장면을 찍은 새미는 이후에도 카메라로 많은 것을 찍으려고 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어서 스카우트 대원인 친구들과 그는 서부극을 찍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아버지는 그에게 영화는 취미고, 공부에 집중하라는 잔소리를 하지만, 새미의 유일한 낙은 영화를 찍고 만들어 주변인들에게 상영하는 일이다.
하지만 새미의 영화 만들기는 순탄치 않다. 단순히 그의 아버지가 영화 만들기를 내키지 않은 것 때문만이 아니다. 새미는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불안해하는 어머니 미치를 위해 며칠 전 아버지의 친구 베니(세스 로건)와 가족들이 함께한 피크닉 영상을 편집해 영화로 만든다. 그러던 중 새미는 어머니가 베니와 외도하는 장면을 발견하고 충격을 금치 못한다. 어머니의 외도 장면을 뺀 채 무사히 영화를 만들었지만, 새미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그녀를 냉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이직으로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가족은 적응에 어려움을 느낀다. 베니와 헤어진 뒤 미치는 신경쇠약에 빠지게 되었고, 새미는 새로운 고등학교에서 유대인 혐오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결국 버트와 미치는 이혼을 결정하고 새미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새미는 끝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파벨만스>의 위태로움은 소우주가 흔들리는 고통에 가깝다. 어머니의 외도를 발견하게 만든 것도, 아버지와 다툼을 겪은 것도, 어린 시절 악몽에 시달리게 만든 것도 결국 영화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선언하고 서로 다투던 어느 오후 새미는 문득 그 장면을 카메라로 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팼던 로건을 오히려 졸업식 영상에서 영웅처럼 그리려 한 새미의 의도는 영화의 매혹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바빌론>이 분비물로 점철된 더러운 할리우드에도 자신의 영화를 사랑하겠다는 하드코어 차력쇼를 선보인다면, <파벨만스>의 위태로움은 풍랑 속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애증의 태도를 견지한다. 불안정하지만 따뜻한 어머니와 친절하지만 무뚝뚝한 아버지 밑에 자란 새미가 부모의 장단점을 모두 닮았던 것처럼, 자신을 궁지로 모는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파벨만스>의 위태로움은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 제아무리 화려함을 뽐내며 애정을 고백하려 해도 데미안 셔젤의 <바빌론>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에 <파벨만스> 자신의 소우주를 덤덤히 드러내는 것으로 도착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