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는 케이팝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케이팝 뮤직비디오에는 가수의 노래와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가수의 세계관, 매력, 개성 등이 밀도 높게, 또 집약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고도화된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3분의 짧은 종합예술이 되기에 이른다.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강렬한 비주얼은 많은 레퍼런스를 낳고, 또 많은 레퍼런스를 반영한다. 케이팝 뮤직비디오가 레퍼런스로 삼는 즐겨 찾는 매체가 있다면, 바로 영화다.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고전 영화에서부터 한국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비주얼을 차용해 ‘오마주’하며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다. 이번에는 영화를 오마주한 케이팝 뮤직비디오 네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방탄소년단(BTS)-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 1952년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할리우드 고전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는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꼽힌다. 유성영화의 태동기,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뮤지컬 영화 1위’에 선정되며, 지금까지도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와 팝콘지수 95%, 메타크리틱 메타스코어 99점을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비를 타고> 중, 주인공 진 켈리가 비를 맞으면서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을 부르며 춤추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이코닉한 순간 중 하나다.
할시(Halsey)가 피처링해 화제가 된 방탄소년단(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 뮤직비디오는 한 편의 뮤지컬 영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사랑은 비를 타고>의 오마주다.
이 뮤직비디오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오마주했음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멤버들이 춤을 추는 세트 뒤에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식이다.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직비디오에서 리더 RM은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를 연상시키는 흰 페도라를 쓰고, 우산을 든 채 무대 한가운데에 등장한다. 또한 멤버 제이홉(j-hope)이 가로등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은 <사랑은 비를 타고>의 아이코닉한 장면 ‘싱잉 인 더 레인’의 완벽한 오마주다. 또한 뮤직비디오에서는 소파가 소품으로 등장하는데, 이 역시 영화 속 장면(Make 'Em Laugh 시퀀스)을 차용한 것.

빅히트 뮤직 | BTS (방탄소년단)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oy With Luv) feat. Halsey' Official MV Credits: Director : YongSeok Choi (Lumpens) Assistant Director : Guzza, Jihye Yoon, HyeJeong Park (Lumpens) Director of Photography : HyunWoo Nam (GDW) Gaffer : HyunSuk Song (Real lighting) Art Director : JinSil Park, BoNa 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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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What Do I Call You: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창작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오마주하는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힌다. 혁오의 ‘공드리’라는 노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아예 <이터널 션사인>에서 영감을 받아서 탄생한 곡이기도 하다.
태연의 ‘What Do I Call You’ 뮤직비디오 역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오마주했다. 뮤비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이터널 선샤인>을 꼭 닮았는데, 영화의 주인공 조엘(짐 캐리)이 그랬듯 태연 역시 기억을 지우고자 한다. 태연은 ‘그’를 떠오르게 하는 모든 소품을 박스에 넣고, 기억을 지워주는 의사를 찾아간다. 뮤비에는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한 네모난 컴퓨터, 일기장, 컵 등의 오브제가 곳곳에 배치되어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뮤직비디오의 이미지는 ‘What Do I Call You’ 가사와 맞물려 아련한 이별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Hello 넌 stranger / 남은 건 별로 없어 memories, memories, memories / 안녕이라 했는데 왜 넌 내 옆에 있어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 어색했던 공기에 웃음이 났어 왜 / 너무 가까웠던 내 것이었던 my honey my daisy”라는 노랫말은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들린다.
에이티즈(ATEEZ)-Guerrilla(게릴라): 영화 <메트로폴리스>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은 타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재미 요소다. 아이돌 그룹은 데뷔 때부터 정교한 세계관을 품고 태어난다. 그들의 앨범 한 장 한 장은 거대한 가상의 세계관 속에 녹아들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담아내는 가장 훌륭한 그릇이다. 아이돌 그룹 에이티즈(ATEEZ) 역시, 독보적인 세계관을 지닌 아이돌로 손꼽힌다. 케이팝 씬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컨셉. 그래서인지, ‘전복’, ‘혁명’, ‘디스토피아’ 등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 에이티즈의 영상들은 ‘넷플릭스 재질’이라는 유머가 돌 정도다.
에이티즈의 ‘Guerrilla(게릴라)’라는 곡 역시 제목처럼 전복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두 귀를 막은 채 / 두 눈을 가린 채 / 똑같은 인형처럼 / 살 순 없잖아 / 모두 고개를 들어 / 마주하라”라는 가사는 ‘빅 브라더’를 떠올리게 한다.
‘Guerrilla’ 뮤직비디오 역시 그들의 세계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비주얼을 입었다. ‘Guerrilla’ 뮤비에는 SF 디스토피아 영화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메트로폴리스>의 이미지가 차용되었다. <메트로폴리스>의 프랑스 개봉 당시의 포스터와 똑닮은 ‘Guerrilla’ 뮤비 속 멤버들이 춤을 추는 무대가 눈에 띈다.
1927년 작 <메트로폴리스>는 흑백 무성 영화로, 영화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최초의 작품이다. 영화의 감독인 프리츠 랑은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도시에서 벌어지는 자본가와 노동 계급간의 갈등을 그려냈다. 프리츠 랑이 상상해낸 미래 도시의 모습은 이후 많은 SF영화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이티즈의 아트워크를 작업한 디지페디 성원모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메트로폴리스>) 영화가 그룹의 이미지, 스토리텔링과 유사점이 많은 만큼 팬들에게도 좋은 즐길 거리가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비비(BIBI)-가면무도회(Animal Farm):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 빌>
매번 컨셉추얼한 곡과 뮤비를 내놓는 아티스트, 비비. 작년 발매된 ‘가면무도회’ 역시 ‘스케일이 큰’ 뮤직비디오로 독보적인 매력을 뽐냈다. 충격적일만치 강렬한 ‘가면무도회’ 뮤직비디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수작 <킬 빌>을 오마주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마니악하고 선정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호불호에 관계없이 비비의 확실한 색깔을 각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비비는 보그와에 인터뷰에서 “쓰든 달든 인생의 갖은 감정을 아름답게 푸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가수보다는 “표현자, ‘Expresser’에 가깝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비가 뮤직비디오에서 <킬 빌>을 오마주하며, 다소 충격적일지라도 원하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보여주고자 한 이유가 짐작 가는 대목이다. 실제로 비비는 ‘가면무도회’ 뮤직비디오를 기획하고 연출했으며, 연기까지 맡았다.
뮤직비디오의 러닝타임은 무려 6분 37초로, 짧은 단편영화를 연상케 한다. ‘가면무도회’ 뮤직비디오에는 잔인한 장면이 다수 등장해 19세 이상만 시청 가능하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