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는 ‘시(侍)’, 즉 ‘모시는 자’를 뜻한다. 주군이 없으면 사무라이는 호구지책이 사라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일으키고 난 다음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잡는다. 그렇게 시작된 게 에도 시대다. 에도는 현재 도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다이묘들 간의 전쟁을 멈추게 한다. 수 백 년 동안 전쟁으로 지탱해오던 일본 열도가 ‘강요된 태평성대’를 맞는다. 주군을 모시며 전투를 치르던 사무라이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 하급 관리 노릇을 하면서 우산이나 새장 등을 만드는 부업으로 생계를 잇는다. 몰락한 다이묘들의 무사는 이도 저도 아닌 낭인(浪人, 로닌)이 되어 떠돌거나 날품팔이에 나선다.
검을 놓은 사무라이는 뭘 먹고 사는가
하지만 무사 출신은 막노동 인력시장에서도 안 받아준다. 전쟁이 없어도 검은 버릴 수 없다. 무사의 존재 증명이기도 하거니와, 명예와 자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도 시대엔 검이 공무원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들 사이에 ‘연극할복’이라는 게 유행한다. 권세를 누리는 명문가 마당을 빌려 무사답게 할복하겠다고 요청을 하면 다른 영주에게 소개시켜 관직을 주거나 돈 몇 푼 쥐어 주곤 돌려보내는 것이다. 소위, ‘무사의 명예’라는 것, 수백 년을 지탱해 온 모종의 권위와 신념이 돈 몇 푼 혹은 매관매직으로 ‘썩은 가치와 위신’만 남게 된다. 1962년에 제작된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할복>은 당시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몰락한 가문의 무사 집안이 가난에 허덕이다 ‘연극할복’의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다뤘다.
히로시마 후쿠시마 가의 전직 가신이었던 늙은 사무라이 츠구모 한시로(나카다이 타츠야)는 정신과 내공은 여전히 투철하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사로선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몰락한 가문의 무사는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도 기본 생존조차 힘들다. 반면, 도쿠가와 아래 자리를 펴 출세한 가문은 ‘무사’라는 정통성을 권력 삼아 자신들만의 아성을 구축해간다. 사무라이의 명예와 격식에 사로잡혀 자기보존에만 급급하며 위선을 자처하기도 한다. 자신들에게 도전하거나 명예를 더럽히면 “감히 우리 가문을!!”하는 식이다. 에도의 소토, 사쿠라다, 마치, 이위 가도 그중 한 다이묘다.
1630년 5월 13일 오후, 때 이른 더위가 몰아친 이위 가의 공관에 추레한 차림의 츠구모 한시로가 나타난다. 공관 안뜰을 빌려 명예롭게 할복하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이위 가 간부들이 고민에 빠진다.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많았던 거다. 최근에도 한 젊은 무사가 나타났다가 연극할복임을 들키곤 쫓겨난 경우가 있었다(젊은 무사와 한시로의 관계가 줄거리의 핵심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이위 가의 무사들은 츠구모의 진의를 살피면서 사정을 듣기로 한다. 얼핏 지루한 신세 한탄 조가 이어지는데 어딘가 심상치 않다. 자못 지루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싶더니 후반부에 모든 사연의 내막이 풀리며 갑자기 장렬해진다.
비참과 장렬, 슬픔과 분노의 다중주
당시 곤궁에 처한 무사들의 생활 실태에선 비참함이 눈물겹고, 최후의 격투 장면에선 밀도 높은 비장미와 거룩함이 작렬한다. 노쇠한 무사 한 명이 잘나가는 한 가문 전체와 맞서 싸우는 모습은 고통받는 메시아 같기도, 새끼 잃은 짐승의 절규 같기도 한데, 흑백임에도, 그리고 요즘처럼 피범벅 영상이 아님에도 화면에 누혈이 뚝뚝 맺힐 정도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와 더불어 서양 영화계에 사무라이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지만, 단순 무협 영화도 두루뭉술하게 전통을 팔려 드는 시대극도 아니다. 비록 4세기 전의 이야기이지만,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듯, 바로 오늘날 누군가는 겪고 있는 얘기일 수도 있다. 비루함과 비겁, 장렬한 각오와 목숨 건 사투는 결국 삶의 양면이자 핵심이다.
그 어떤 권위나 명예도 모종의 비루와 능욕을 감수하거나 거치지 않고선 기반이 허약할 수 있다. 모든 독재자와 권력자들의 이면에는 한심하고 유치한 몰락과 나락의 과정이 있었다. 더러웠기에 더 강력해지고, 허술했기에 더 잔혹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 그들은 장차 꽃이 되거나 시체가 된다. 살아남더라도 꽃으로 피거나 최강자가 되는 건 소수다. 거기서 소외된 자들은 다시 모종의 바닥에서 분루를 삼켜야만 한다. 그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건, 신념도 실력도 진실도 진심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와 명예와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더 강력해진 자들의 더 더러운 행각과 더 교묘하고 잔혹하게 설정된 시스템에 의해서라고 일단 말하겠다.
오늘도 누구는 오늘만을 위해 죽는다
사무라이 문화는 일본 특유의 독특한 미학을 품고 있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검을 자신의 목숨으로 여기는 정신은 짐짓 유치하기도 어처구니없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웃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거기서 발아한 일본 특유의 미학과 생명관에 대해선 탐구해 볼 여지가 여전히 많다고 여긴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주군이든, 자신만의 예술이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든 삶과 죽음마저 초월하는 가치를 스스로 지켜내는 일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삶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가치. 그것은 결국 삶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장 낮은 지점과 가장 높은 지점을 하나의 궤로 꿰뚫어내는 일이다.
진창과 죽은 생물들의 잔해 사이에서의 허덕임이 끝끝내 봄날 한철의 꽃으로 개화하는 일. 그러나 꽃은 잠깐만 아름답다. 차후엔 먼지와 쓰레기와 깡마르고 걍팍해진 줄기의 스산한 연명뿐이다. 결국 한 해 지나 또 피어날 꽃이지만, 그것은 과연 올해 피었다 진 그것과 같은 꽃일까. 인간의 찬란과 몰락과 허세와 본질을 거기 대입해 보는 일은 지난하기도 유구하기도 부질없기도 하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 꽃보다 오래 사나 꽃처럼 다시 피는 주기를 일정하게 지니지 못한다. 그러면서 모두 오늘을 살려고 허덕이거나 오늘의 기쁨에 찬탄하거나 오늘의 허망함에서 벗어나려 내일을 기대한다. 혹은 피었다 진 한 시절을 그리며 오늘을 뭉개고 내일을 지우려 들기도 한다. 그래,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오늘 허다할 것이다. 그들은 과연 무얼 잃었고 무얼 찾으려 하다가 좌절한 걸까.
사무라이의 할복은 생명과 관련해선 그릇되어 보이나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전통이다. 검으로 일어선 자는 결국 검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 츠구모는 검으로 한 시절을 구가했으나 결국 검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려 한다. 그 처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자신을 능욕하고 내팽개친 세상 전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애틋할 수밖에 없는 가족에의 사랑과 애착이 동기가 되지만, 결국 츠구모가 지키려 했던 건 무사로서의 자신의 명예다. 그리고 그것과 상충되는 가짜 명예와 싸우게 된다. 그렇다고 호의호식하는 이위 가의 무사들이 ‘절대악’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모종의 운으로 위세를 가지게 된 자들이다. 츠구모와 출발점은 대동소이하다. 무사의 시대를 살았고 무사로서 살아왔으며 무사의 신념을 지키려 또 다른 무사를 내치려 할 뿐이다. 괴이한 악순환이다. 그 고리를 꿰어내는 것 역시 ‘무사도’라는 동일하나 파편적으로 쪼개진 가치다. 모두 정의를 주장하나 그 어느 쪽도 정의롭지 않은 작금의 정치판이나 세태와 과연 뭐가 다를까.
승자도 패자도 없고, 삶도 죽음도 허망하다
결국 누구는 장렬하게 스스로 할복하고 또 누구는 거대한 손상을 입은 채 또 다른 시대를 살게 된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죽었기에 살아남는 사람도 있고, 살았으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존재도 있다. 앞서 메시아 같기도, 새끼 잃은 짐승의 절규 같다고도 했거니와 영예와 슬픔이 이토록 한 몸이다. 츠구모는 살기 위해 죽고, 이위 가는 명예로운 죽음을 그르쳤기에 거대한 멍에를 둘러쓰게 된다. 이 기괴한 역설이 사뭇 처연해 이 영화가 제법 아프다. 흐드러진 벚꽃들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아니 너무 아름답고 현란해 오히려 짐짓 죽으러 가는 누군가를 위한 허망한 아치처럼 여겨지기에.
딱 50년 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야쿠쇼 코지를 주연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디테일이 조금 다르고 원작보다 진액(?)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그저 사족 삼는 사견이다. 그 역시 볼만한 영화는 맞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