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각자 능력도, 성격도 다른 모험가들이 파티를 이루어 던전에 들어가 최종 보스를 처치하고 보물을 얻어 돌아온다. 검사와 마법사, 사제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가상의 세계인 판타지 속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말 그대로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런 구조로 진행된다. 어디에나 시작이 있듯이 이 이야기의 시작 역시 있다. 바로 '던전 앤 드래곤(Dungeon&Dragons)'이라는 게임이다.

'던전 앤 드래곤', 속칭 D&D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판타지 세계관을 토대로 한 RPGRoll Playing Game)의 모태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 게임이 있었기에 현재의 RPG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하지만 1980년대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했다. 한때 악마의 게임이라는(...) 오명을 사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소위 너드들의 게임 취급을 받는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카드를 뒤집으면서 전사들의 강렬한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게 괴짜들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


D&D 세팅. 이게 '초심자'을 위한 스타턱팩이다.

미국의 보드게임 개발사에서 처음 내놓은 이 시리즈는 처음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디지털 방식의 게임이 아니라, 테이블에 둘러앉아 주사위나 카드를 가지고 하는 게임, 즉 TRPG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즐기는 게임인 TRPG는 한국에서는 크게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지만 알아서 시스템을 구현해주는 디지털 프로그램이나 기기 없이도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무한한 매력을 갖고 있는 장르다.

TRPG는 'DM'과 '플레이어'로 이루어지는데, 던전 마스터 즉 'DM'이 짠 세계관과 규칙에 따라 어떤 보상을 받고 어떤 던전에 침투할지가 정해져 있으며 플레이어들의 자유로운 행동과 랜덤하게 획득하는 카드의 내용에 따라 게임의 판도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캡콤에서 개발한 아케이드 게임 '던전 앤 드래곤: 쉐도우 오버 미스타라'

최초의 TRPG인 만큼 전통도 깊고 유명세도 높다 보니 초창기에는 디지털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일이 다수 있었고(아마도 오락실에서 했던 게임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듯) 영화화된 적도 있었다. 이후에도 '던전 앤 드래곤' TRPG로서는 여전히 신규 룰이 추가되거나 펀딩을 진행하는 등 유서 깊은 현역 장르로 활약해 왔지만 실사화 소식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원작 그 자체로서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장르의 저변은 넓혔지만, 대중성을 폭넓게 갖춘 콘텐츠로 활용되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IP를 활용한 실사화 작품이나 PC 게임이 원작의 명성만큼 좋은 작품이지 못했던 것도 있고,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 텐데... 하지만 3월 29일, 오랜만에 이 유서 깊은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초의 실사화 영화 <던전 드래곤>

'던전 앤 드래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이미 두 편이나 있지만, 원작 시리즈의 팬들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얘기는 아니다. 2000년에 첫 번째로 실사화된 영화 <던전 드래곤>은 나름대로 화려한 판타지 영화를 목표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제작비조차 회수하지 못하며 실패를 맛봐야 했으며, 평가도 좋지 못해 잊힌 영화가 되고 말았다. 23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꽤나 미묘한 CG 효과들 덕에 어색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게 이유는 아니었다.

배우들은 이 세계관에 몰입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뭔가 어색한 티를 지울 수가 없었고, 방대하고도 탄탄한 원작의 세계관을 가지고도 전반적으로 관객의 머릿속에 물음표만 강렬하게 띄워준 영화였다. 악역으로 출연한 제레미 아이언스의 필모그래피에 오점을 남겼다는(...) 평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고, 그렇게 실사화는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은 일이 되나 싶었건만.

제레미 아이언스조차 살리지 못한 <던전 드래곤>

2005년에 <던전 앤 드래곤 2>가 개봉하게 된다. 전작의 속편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좀 더 낮은 예산으로 제작됐고, 전편에 비해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한국 포스터를 보면 '반지의 제왕'에 이은 판타지 마법 원정대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데...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가 2001년에 개봉해 큰 성공을 거두자 원작의 '근본' 매력과 오리지널리티, 역사로는 절대 지지 않을 '던전 앤 드래곤'을 다시금 스크린에 올리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했듯이 결과는 좋지 않았다. 굴하지 않았던 것인지... 도전은 한번 더 이어졌고, 2012년에 공개된 <던전 앤 드래곤 3>은 스크린이 아닌 DVD로 직행했지만 역시 평가는 나빴다.


대형 영화로는 20년 만에 돌아온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던전 앤 드래곤'의 이번 리부트는 2년 전인 2021년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팬데믹 사태의 영향도 있었지만 판권 문제도 좀 컸다. 원작의 판권을 갖고 있는 회사는 보드게임 개발사이자 게임 제작사로 잘 알려져 있는 해즈브로에게 있었다. 이들은 실사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 전작인 <던전 앤 드래곤>과 <던전 앤 드래곤2>의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가 리부트 계획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 시점이 무려 2015년의 일이었다.

해즈브로는 진행 중인 계획도 있었고, 원작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인 터였기에 판권이 자사에 있다며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소송이 길어지면서 영화 제작 역시 차일피일 미루어졌지만, 2017년에 결국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협업해 실사화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2018년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인 제작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9년, 연출과 각본이 조나단 골스스테인과 존 프랜시스 달리 두 사람으로 변경되면서 제작 과정은 다시 길어진다. 많은 부분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각본 작업에 재착수했고, 이후 각본이 완성돼 현재의 라인업대로 캐스팅하며 드디어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의 청사진이 그려진 것이었다.

원작 실사화 영화가 대부분 겪는 일이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지연에, 저작권 논의가 늦어지면서 당초 계획보다는 많이 늦은 올해 3월 드디어 개봉하게 된 셈인데. 어쨌거나 제작이 확정된 덕분에 흑역사로 남을 뻔 했던 '던전 앤 드래곤'의 실사화 프로젝트는 다시 명예를 수복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원작이 있는 장르 영화에서 실사화가 이미 실패한 상태일 때 이걸 리부트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원작이라는 리소스를 활용해 실사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례도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애초에 실사화 프로젝트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원작 IP를 활용하는 실사영화의 그들의 상상력과 기대치에 걸맞을 정도로 화려한 결과물이 나오려면,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이 왜 그걸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 작품이 왜 인기를 얻었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요소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지를 알아야 다음 콘텐츠에 그 이유들을 담아내고 확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화 그 자체로서의 완성도와 매력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게임 원작과는 크게 연관이 없었음에도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었던 <레지던트 이블>처럼.

D&D를 플레이 중인 <빅뱅 이론> 주인공들

아마도 2000년과 2001년의 영화에서는 그런 이해도가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첫 영화에 비해 두 번째 영화에는 원작 세계관의 요소가 보다 더 반영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던전 앤 드래곤'을 모태로 했다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영화로서의 매력이 너무나 부족했다(세 번째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거기에 판타지 세계관을 토대로 한 작품들이 흔히 받는 평가인... '유치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은 감독들은 '던전 앤 드래곤'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재미있는 관람이 될 수 있게끔 하는 데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원작 팬들에게는 알고 있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활용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이 세계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관객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게 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예고편과 비평가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에... 이 발언이 실제로 어떨지는 스크린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전작의 리부트 형태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강력한 전사(바바리안)로 미셸 로드리게즈, 마법사(소서러스)에 저스티스 스미스, 성기사(팔라딘)에 레지 장 페이지,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주술사(드루이드)에 소피아 릴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악가 바드에 크리스 파인까지 5명이 모여 레드 위저드라는 최악의 적을 상대하는 내용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넓은 중세 판타지풍 배경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 다섯 명의 전투는 2023년의 기술력에 걸맞은 화려한 CG와 액션도 함께 할 예정인데, '도적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예고편의 시작은 감옥에서의 탈출이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걸로 보이는데, 바바리안이 병사들을 때려눕히는 사이 크리스 파인(바드: 음악가)은 계단에다 밧줄이나 비벼대고 있다. 판타지 스토리가 흔히 그렇듯이 '용사'가 되어 명예를 얻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찬 그런 용사 지망생과는 꽤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파티원들인데.

뭔가 명예롭고 우아한 듯하지만 나사는 빠져 있는 것 같은 팔라딘에, 그냥 나사가 빠져 있는 것 같은 소서러에다 어쩐지 리더라기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바드까지.. 거기에 진짜 도움이 되는 건 왠지 바바리안뿐인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쩐지 하나씩 모자란 것 같은 이들 다섯 명을 보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가 생각나기도 한다.

배우진 중 하나인 휴 그랜트는 메인 파티 5명이 모두 문제 있는 녀석들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대단한 영웅심과 정의로움보다는 필요와 요구에 의해 뭉쳤다는 점(마치 조별 과제 같다)이 영화 초반의 재미 요소가 되지 않을지 생각해 본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이들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기는 했기에.


중세 판타지를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져 오기는 했지만, 판타지 소재의 비현실성 때문인지 어린이용 가족영화 수준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관객들도 그에 따라 연령대가 낮은 편이었던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실사화에 성공하면서, 장대한 세계관을 토대로 한 깊은 서사가 판타지라는 장르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가상의 세계관에 현실적인 서사를 접목한 콘텐츠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아마도 히어로 무비를 비롯한 장르 영화가 흥행 상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개중 마블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는 실사화 프로젝트 MCU는 세계 최대의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영화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어 커다란 스토리를 만든다는, 히어로 실사화 프로젝트의 거대한 목표는 초반에는 꽤 흥미진진했으나 10년 이상 경과한 현재에 와서는 콘텐츠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가 되어 버렸고, PC 논쟁과 더불어 영화적 완성도도 이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해(물론, 기대치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면도 있다) 아쉬운 상황이다.

그렇기에 "원작을 몰라도 재밌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말은, 몇 번쯤 들었던 것 같음에도 어쩐지 반갑게 느껴진다. 던전 앤 드래곤의 규칙과 룰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기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대중 영화라는 게 그런 게 아닌가. 소수의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범대중을 아우르는 넓은 관객층을 확보하고 싶을 것이고, 그래야 또 다른 영화로 무난하게 이어질 수 있으며, 관객도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