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겨울 땐, 스스로를 미국 하이틴 영화 속 주인공이라 상상하곤 한다. 고등학교 때, 한국식 야자를 하며 책상 앞에 주구장창 앉아있을 때도 그런 상상을 했다. 나는 미국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내 이름은 사실 김지연이 아니라 킴벌리다, 나는 이 시기만 지나면 프롬(prom, 졸업 파티)을 간다, 멋있는 옷을 입고 화려하게 등장해 나의 10대를 마무리한다, 라며 염불을 외우듯 스스로를 환상 속에 가두곤 했다. 그때의 나는 비록 입시에 찌든 K-고등학생이었지만, 머릿속만큼은 할리우드였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상상(혹은 망상)에 불을 붙여줄 영화 속 프롬 장면을 소개한다.


<파벨만스>(The Fablemans)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영화, <파벨만스>. 파벨만스의 주인공, ‘새미’는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소년 새미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에 처음 간 후로, 영화라는 예술에 매료된다.

<파벨만스>는 새미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 만큼, 고등학교의 꽃 ‘프롬’ 장면 또한 그려냈다. 프롬에서 새미는 학교 행사 '땡땡이의 날'에서 촬영해 만든 영화 <땡땡이의 날>을 친구들 앞에서 상영한다. 이 장면이 상징적인 이유는, 새미(혹은 그의 전신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가 바라보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시각이 집약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프롬 장면은 새미는 왜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 또 영화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영화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매체인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하게끔 한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Mean Girls)

하이틴 영화의 정석, 하이틴의 고전, 하이틴의 교본 <퀸카로 살아남는 법> 역시 빠지면 서운하다. 린제이 로한,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지금은 할리우드 톱스타가 된 배우들이 한데 모인 전설의 작품. 네이버 영화평에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김태희, 송혜교, 전지현이 청춘이던 시절 동반 출연한 영화”라는 말이 달리기도 했다.

이 영화는 특히 타 작품에서 자주 오마주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U, Next’ 뮤직비디오에서는 트로이 시반이 카메오로 등장해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패러디하기도.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하이틴 영화의 정석답게, 화려한 프롬 씬이 빠질 수 없다. 사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등장한 파티는 프롬이 아닌 ‘Spring Fling’이라고 불리긴 한다. 영화의 주인공 케이디(린제이 로한)는 이 파티에서 ‘퀸’으로 뽑힌다. 케이디가 퀸이 된 후, 플라스틱 왕관을 여러 조각으로 부순 뒤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장면이 압권.

파티에서 케이디는 자신의 왕관을 보며 “이건 그냥 플라스틱일 뿐이잖아요”라는 소감을 내뱉는데, 레지나 조지를 중심으로 한 퀸카 무리의 이름이 ‘플라스틱스(the Plastics)’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많은 의미가 내포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간 ‘퀸카’가 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케이디가 파티에서 비로소 ‘퀸카’가 되자, ‘퀸카’의 의미를 해체하고 재정의하게 된 것.


<레이디 버드>(Lady Bird)

<레이디 버드>는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달라 말하는 크리스틴의 성장담을 그려낸 영화다.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 사는 고등학생 레이디 버드는 지겨운 고향을 떠나 뉴욕을 가고 싶다는 생각뿐. 영화는 ‘레이디 버드’가 본래의 이름인 ‘크리스틴’이 되기까지, 흔들리고 불안했던 10대의 현실적인 여정을 그려낸다.

<레이디 버드>는 부모, 친구 등 주인공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다. 하이틴 영화라면 으레 등장하는 프롬이라는 소재 역시 미묘한 관계와 갈등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프롬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며 레이디 버드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는 모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엄마는 레이디 버드가 고른 드레스를 보곤 “너무 핑크빛이지 않니?”라고 말하고, 레이디 버드는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라고 답한다.

<레이디 버드> 프롬 장면 촬영 현장

레이디 버드가 절친 줄리와 화해한 후, 프롬으로 향하는 장면 역시 인상 깊다. 프롬에서 이성 파트너가 아닌, 절친 줄리와 춤을 추는 레이디 버드의 모습은 한 청춘이 성장하는 과정을 엿보는 것만 같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0 Things I Hate About You)

히스 레저의 앳된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하이틴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그 시절, 풋풋한 로맨스를 그려낸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현재는 톱톱배우가 된 조셉 고든 레빗이 조연으로 열연하기도 했다. 영화를 본 적이 없더라도, 작품 속에서 히스 레저가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부르는 장면은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한 번쯤 본 적 있을 터.

미국 고등학교에서, 상대방에게 프롬에 같이 가자고 말하는 행위는 곧 데이트 신청과 같다. 그래서 ‘prompose(prom+propose)’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패트릭(히스 레저)이 캣(줄리아 스타일스)에게 “프롬 같이 갈래?”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로맨틱하다. 드레스와는 전혀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던 캣이 드레스를,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패트릭이 턱시도를 입고 프롬에 나타나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또 하나의 명장면이다.


<싱 스트리트>(Sing Street)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주옥같은 영화, <싱 스트리트>. <원스>, <비긴 어게인>에 이은 존 카니 감독의 세 번째 음악 영화다.

주인공 ‘코너’(페리다 윌시-필로)의 밴드 ‘싱 스트리트’가 프롬 파티에서 ‘Drive It Like You Stole It’을 연주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신나고 찬란해서 오히려 눈물을 짓게 한다. 물론 코너의 상상 속이었을지라도, 별 볼일 없었던 코너가 화려한 뮤지션으로 변해 원하는 음악을 하고 첫사랑을 이루는 장면은 뭉클한 폭발력을 지닌다.

코너의 상상 속 프롬 장면은 영화 <빽 투 더 퓨쳐>의 오마주다. 실제로 <싱 스트리트>의 배경은 <빽 투 더 퓨쳐>가 개봉한 1985년이기도 하다. <빽 투 더 퓨쳐>의 주인공 마티가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의 부모님이 있는 프롬에서 신나게 음악을 연주한 장면처럼, <싱 스트리트>의 프롬 장면 역시 오래도록 회자가 될 듯하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