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자의 최고작으로 손색이 없다

당췌 영화란

영화는 기술과 예술과 결합체의 최고봉이라 불린다. 심지어 막대한 제작비로 인해 산업과의 조우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파벨만스>(2023)의 새미는 첫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때 아빠와 엄마의 태도를 보면 감독인 스필버그가 보고 있는 영화의 어떠한 시선과 맞닿아 있다. 아빠 버트(폴 다노)는 영화의 원리와 기술적 측면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는 반면에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는 영화는 꿈이라며, 내재적 의미에 관한 것을 던져준다. 과학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 어쩌면 영화일 수 있다는, 스필버그의 주장이 설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를 근본으로 하는 영화의 속성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엄마와 아빠의 사이에서 태어난 새미는 영화의 분신쯤 되는 것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식

아빠와 아빠의 친구 베니(세스 로건) 때문에 엄마의 악보에 구멍이 나는 장면이 있다. 이에 새미는 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여 사실감을 부여한다. 자신이 찍은 영화 속 현실적 효과가 떨어지는 총싸움 장면에서 편집본 필름에 구멍을 내서 진짜처럼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짜'인 영화이지만, 공학적 '기술'로 인하여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거듭나는 것이다. 즉, 엄마의 감각과 아빠의 솜씨를 이용하여 제3의 것을 만든다.

아빠는 새미가 처음으로 본 영화인 <지상 최대의 쇼>(1952) 에서 나왔던 기차를 사주는 동시에 카메라를 선물해주고, 엄마는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를 고민해주면서 새미라는 인간의 영혼이 충만해져 간다. 극장이 겁났던 소년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도 가족 덕분이다. 즉, 스필버그 감독에게 영화란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스필버그의 실제 가족사진. 고 놈 참 거장감일세.


내적 충돌의 은유

흥미롭게도, 영화에 대한 인식은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비유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새미의 부모님은 완벽한 한 쌍으로 보이지만, 실은 둘 사이엔 균열이 존재한다. 엄마는 심연 저 멀리에서 올라오는 본능을 따라야 하는 끓는 피를 가진 사람이고 아빠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창작 활동 따위는 취미 쯤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아빠는 엄마의 외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정을 지켜내려고 하지만 엄마는 결국 이혼을 결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간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어떤 은유처럼 보인다. 기술과 예술이 합쳐져야 이상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지만, 이 둘은 언제나 양립할 수는 없다. 심지어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산업적 측면(예산)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만들고 그것을 아끼는 행위는 소중하지만, 그 유지가 쉽지 않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일의 괴로움과 그 행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촬영장에선 외적 충돌이 더 많다! (<더 포스트> 촬영장. 보라빛 셔츠가 스티븐 스필버그.)


융합만이 답일까

새미에게 영화는 가족과 같은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며, 무엇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의 이혼에 단초가 된 베니를 미워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실은 그 또한 일종의 '파벨만스'의 일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베니는 마지막까지 새미에게 최신형 카메라를 쥐어주는, 그의 영화 인생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아빠에게는 없는 위트와 재치가 있다. 새미의 엄마와 유사한 속성을 담은 베니는 -그래서 그 남녀가 금기를 넘어서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장비의 선물이라는 물리적 영향뿐만이 아니더라도, 영화에 있어서 내재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베니를 향한 (새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양가적 마음은 마치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새미는 취향에 의하여 전쟁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캠핑이 주 소재가 되는 가족 영화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미는 영화를 열심히 만들수록 가족과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심지어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을 데려다가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가족회의를 할 때에도 새미는 이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느끼면서도 문득, 보리스(주드 허쉬)가 말해줬던 '예술이라는 마약에 중독될수록 가족과는 멀어지고 홀로 외로워질 것'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결코 섞이지 않는 두 이질감은 결국 융화되지 않은 채 병립한다. 지금도 역사상 최고의 이야기꾼의 머릿속엔 수많은 역설적 요소들이 두섞이지 않고 공존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스필버그의 영화하면 전쟁과 가족 아니겠는가. (영화 <우주전쟁>)


무엇이 저주이길래

그러한 예술적 태도는 새미이자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곧 자신을 구제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적막감을 제공하는 상반적 태도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보리스 삼촌은 이를 저주라고 표현했다. 지금 가족이 해체되게 생겼는데 영화편집이나 할 때냐는 동생의 투덜거림을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 재앙이나 불행의 어떤 형태처럼 보일 수 있겠다.

단편 전쟁영화 <이스케이프 투 노웨어>를 찍을 때 새미는 생존한 지휘관 역할의 친구에게 연기를 요구한다. 이들은 나치를 죽이기 위해 전쟁터에 왔지만, 본인이 동료들을 데리고 참전함으로써 가족 같은 전우들이 죽었다. 새미는 이를 본 군인의 슬픔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며 연기를 지도한다. 그리고 가족회의를 하면서 지금의 이 공기를 찍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촬영장에서 전투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엔딩에서 장군의 감정을 목도하고 나니 정말 중요한 것은 진짜에 가까운 어떤 정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족회의에서 수심에 잠긴 사람들을 보며 이 '진짜'라는 감정을 보면서 이것을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시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아마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즐거운 재앙은 어디까지 이어지게 될까?

예술이 저주가 아닐 리가 없어어오우어으아으으르ㅡ


스스로도 모르는 본능

학교 친구인 로건(샘 레히너)은 새미에게 못되게 군다. 그러나 학교 행사를 촬영한 <땡땡이의 날>에서 새미는 로건을 아주 멋있게 찍는다. 이에 로건은 새미의 멱살을 잡고서 물어본다. 널 괴롭힌 나를 이렇게 멋있게 찍은 이유가 뭐야? 이에 새미도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아마 (대중문화) 창작을 하는 이들은 이 장면의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새미가 그렇게 찍은 이유는, '대중들이 그것을 좋아하니까'이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다. 이제는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생기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카메라에 담지 않으면 안 되는 불치의 병에 풍덩 빠진 것이다. 그렇게 서른네 작품을 만든 것이다.

거장의 태도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되지만, <파벨만스>에서 스필버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그리면서 멋지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을 담담하게 재생할 뿐이다. 그런 담백한 시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역시 본능이다. 으스대는 것을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장의 위치에 놓였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일찍이 공자님은 70대의 나이를 가리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가진 자가 어찌 우리의 마음을 훔치지 못하겠는가. 그가 언제나 건강히 창작해주길 바랄 뿐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