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에서> 포스터

도대체 무엇을 봐야 할까? 홍상수의 스물아홉 번째 영화 <물안에서>는 내내 그러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화면 속의 시각 정보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반대로 프레임 안의 요소들을 뚜렷하게 식별하기 어려워서다. <물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웃포커스로 촬영된 영화다. 초점이 인물이나 배경에 정확히 맞지 않아 프레임 전체가 뿌옇게 보인다는 뜻이다. 제목처럼 물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만 같다. 세부는 뭉개지고 윤곽은 흐릿하다. 그러니까 <물안에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통상적 영화와 조금 다른 겉모양을 지녔다. 어떤 관객은 영사 사고를 의심하며 극장에 항의할지도 모른다. 어떤 관객은 아무리 기다려도 선명해지지 않는 화면을 쳐다보며 디테일을 구분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도 있다. 이야기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온통 시선을 사로잡는 <물안에서>의 독특한 질감은 홍상수의 전작 <소설가의 영화>(2021)와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견고함을 건드린다.

<소설가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아이는 길을 걷다 갑자기 멈춰 서서 유리창 너머로 카메라 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아이의 존재는 기묘하다. 그는 준희(이혜영)와 길수(김민희)를 바라보는 영화 속의 인물 같기도, 영화 촬영 현장을 기웃거리는 행인 같기도 하다. 심지어 스크린 밖의 관객을 쳐다보는 것 같아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를 성립하게 하는 여러 개의 층을 동시에 건드린다는 점에서 이 장면의 심도는 깊다. 이러한 깊이감이 드러내는 건 영화가 구축하는 허구의 시공간이 단단하기는커녕 꽤 연약하다는 사실이다. 벽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이미지의 지위는 얼마든지 혼동될 수 있다. 이처럼 홍상수는 늘 다른 방법으로 영화가 직면한 곤란을 다뤄왔다. 그의 작업에 따르면 영화란 본디 자신이 대상으로 삼는 시간, 공간, 존재 등의 단일성을 보장할 수 없는 매체다. 그 때문에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기이하고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물안에서>의 얕은 심도는 영화의 표면 자체를 물렁물렁하게 보이도록 한다. 픽셀은 뭉그러지며 뒤섞인다. 관객의 시선은 화면 어딘가에 고정되지 못한 채 자꾸만 미끄러진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성모(신석호)는 배우 일을 하다가 첫 영화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에게 창조성이란 게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란다. 그는 대학을 함께 다닌 상국(하성국)과 남희(김승윤)에게 각각 촬영과 연기를 부탁한다. 세 사람은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의 민박집에 머문다. 촬영지는 제주도가 분명하지만 영화에는 지명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세 사람은 민박집 주변을 거닐며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두 친구는 아직 내용을 떠올리지 못한 성모에게 영감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려준다. 그밖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먹고, 걷고, 대화한다. 그러는 동안 화면의 초점은 점점 더 흐려진다. 도입부에서는 그나마 잘 보였던 인물의 이목구비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형체를 잃어간다. 물론 이건 너무나 간결한 이야기이므로 초점의 상실이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데 그리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후 성모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쓰레기를 줍는 여자를 만나고 결국 그 내용으로 영화를 찍는다.

얕은 심도로 촬영한 <물안에서>

얼핏 창조의 고뇌로 보이지만 성모의 고민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떠돌이의 마음이 담겨있다. 민박집 주인에게 ‘남자 혼자 살만한 방’이 있는지 묻는 그는 여건만 된다면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아보고 싶은 듯 보인다. 하지만 ‘1억에서 1억 5000’이라는 구체적 숫자가 그에게 제동을 건다. 마침내 구상한 영화의 내용을 설명할 때도 그는 두 세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남자 이야기를 한다. 삶의 유혹에 빠진 땅 위 사람들과 그 부산물을 치우는 땅 아래 여자. 그 사이를 맴돌다가 어디로도 가지 못해 결국 죽으러 바다로 향하는 남자. 성모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성모 자신이다. 그는 이미 예전에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서 애쓰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노래를 만든 적이 있다. 이 생각 많은 청년은 세상에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세상과 불화한다. <물안에서>의 맞춰지지 않는 흐릿한 초점은 이러한 성모의 상태와도 일면 공명한다.

견고하지 않은 영화 속에 단단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 성모는 길을 잃는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영화 속을 정처 없이 떠도는 자다. 그건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낮과 밤은 물론이고 날짜의 변화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밤은 찾아오지 않지만 남희는 여전히 밝은 시간도 밤이라고 부른다. 남희가 말하는 두 번의 새벽이 다른 날인지 같은 날인지, 세 사람이 술을 마신 게 촬영하기 전날인지 촬영하는 날인지도 전부 불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희와 상국은 문득 귀신 이야기를 한다. “귀신을 믿으세요?” “몰라. 근데 봤으면 좋겠어. 확실해지잖아.” 상국이 생각하는 귀신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다. 명료한 물리적 실체는 없으나 매번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틀을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야말로 상국이 말하는 귀신과 비슷하다. <물안에서>를 영화의 귀신성에 관한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

거의 모든 게 흐릿하게 체감되는 영화에서 드물게 뚜렷한 게 있다면 바로 소리다. 장면이 전환된 후에도 이어지는 새소리, 여러 차례 반복되는 자동차 소리, 후반부를 휘감는 파도 소리 등 영화의 여러 소리는 다른 요소보다 훨씬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는 “정신 차려!”라는 의문의 외침은 단번에 인물의 과거를 일깨우며 실체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눈을 화면에 고정하지 못하는 대신 관객은 소리를 통해 영화를 경험하는 다른 방법을 배운다. 물론 그 여러 소리 중에서 세 번 반복되는 저음질의 음악을 꼭 언급해야 한다. 이 음악의 정체는 세 번째가 돼서야 확실히 드러난다. 성모가 누군가에게 생일선물로 만들어주었던,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삽입하고 싶어 이제 막 허락까지 받은 음악이다. 그런데 그 음악이 어떻게 영화의 전반부에서도 들려왔던 걸까?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게 실은 성모가 만든 영화였던 것일까? 여기엔 과연 몇 개의 층이 중첩돼있을까?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얕은 심도로도 그와 같은 질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야 만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