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도그마 95 선언은 덴마크의 새로운 영화 운동이었다.

영화사를 돌이켜보자. 할리우드의 전성기가 저무는 195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여러 국가에서 새로운 영화의 물결이 등장했다. 1940년대 후반 로베르트 로셀리니와 비토리아 데 시카로부터 비롯되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부터 시작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 운동인 195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 1960년대 로만 폴란스키, 안제이 바이다, 미클로시 얀초 등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같은 동유럽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뉴웨이브 운동까지. 이는 1980년, 1990년대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80년대 에드워드 양과 허오 샤오시엔을 필두로 시작된 대만 뉴웨이브와 1995년 라스 폰 트리에를 포함한 덴마크의 감독 4명이 선언한 도그마 95선언까지. 파격적이고 신선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운동은 50년간 이어져 왔다.

1962년 오버하우젠 단편 영화제에서 발표된 오버하우젠 선언

이 중 1970년대 대표적인 영화 운동을 꼽으라면, 단연 서독의 뉴 저먼 시네마 운동일 것이다.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오랜 기간 좋은 작품을 만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와 <피나>(2011)로 잘 알려진 빔 벤더스. 지금도 왕성하게 작품을 찍고 있으며, <잭 리처>(2012)와 <마다가스카의 펭귄>(2014) 등에서 배우로도 활동한 ‘괴짜의 아이콘’ 베르너 헤어조크.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로 불린 두 감독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작업으로 많은 영화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기사에서 우리가 다룰 감독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요절한 천재, 진정한 ‘뉴 저먼 시네마’의 선구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다.


괴짜? 워커홀릭?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1945년 뮌헨에서 태어나서 1982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에 발을 들이기 전, 그는 뮌헨의 배우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들었고, 잠시나마 뮌헨의 전위적인 극단에 들어가 연극배우 생활을 경험했다. 하지만 1968년 그는 극단의 배우들을 이끌고 ‘안티 테아터(Anti-Theatre)’라는 새로운 영화 공동체를 조직하고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1969년 첫 장편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를 연출하면서 짧은 13년간의 영화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랑소와 오종이 연출한 <피터 본 칸트>는 파스빈더를 그린다.

40편의 장편영화와 3편의 단편영화, 2편의 TV 영화 시리즈, 24편의 희곡. 거기에 그는 직접 배우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필모그래피만 본다면 60~70세의 황혼기에 접어든 거장의 이력서 같다. 총 69편의 작품을 13년 만에 만들어냈다니. 그의 손을 거쳐간 작품 편수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소문난 워커홀릭이었다. 후술하겠지만 파스빈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문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는 같은 해에 작업한 그의 대작 영화 <마르타>와 <에피 브리스트>의 촬영 기간 사이에 생긴 여유를 채우기 위해 15일 만에 촬영된 작품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파스빈더의 영화 미학 최전선에 놓인 작품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두고 파스빈더는 인터뷰에서 촬영 기간 사이 쉬어가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정한 펑크 스타 같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지금은 베르너 헤어조크를 두고 진정한 영화계의 괴짜라고 이야기하지만, 생전 파스빈더의 모습이야말로 광인에 가까웠다. 옷은 항상 가죽 자켓과 청바지만을 고집했으며, 폭음, 폭식, 애연을 즐긴 파스빈더는 펑크의 의인화 같은 존재였다. 엄청난 작업량 사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동성 애인들을 만나며 숱한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만들었고, 뉴 저먼 시네마가 기존 독일 영화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그는 사회의 모든 체제에도 반항하기를 즐겼다.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내느라 그는 함께 작업한 배우와 스태프들과도 마찰이 잦았고,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는 증언도 종종 존재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삶은 괴짜이자 천재, 동시에 타고난 중독자의 면모를 지닌 펑크 스타가 아니었을까? 코카인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37세의 나이에 요절한 마지막마저 과연 그다운 죽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유작 <쿼렐리>(1982)의 후반 작업 중이었다. 이는 그의 후기작 중 최고로 꼽는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이 개봉하여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해기도 하다.


뉴 저먼 시네마의 불꽃

192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는 완벽했다.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스틸컷.

앞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괴팍한 면모만 너무 부각하여 그를 그려냈지만, 그는 독일 영화사를 다룰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이름 중 하나다. 1960년대 후반 독일 영화계는 나치즘의 후유증을 강하게 겪고 있었다. 1920년대 나치 집권 전 독일 영화는 프리츠 랑과 F.W. 무르나우, 로베르토 비네 등 표현주의 감독들의 무성영화로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나치의 도래는 화려했던 독일 영화계를 완벽하게 말살하였고, 파시즘 영화만이 체제 선전을 위해 생산되었다. 종전 이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고, 1960년대 초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기성 독일 영화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파스빈더의 걸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오버하우젠 선언의 주된 골자는 ‘영화는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시대의 문제를 다뤄야 하며, 1920년대 표현주의 영화의 근본을 기억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파스빈더는 이와 더불어서 할리우드에서 멜로드라마를 주로 만들었던 더글라스 서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더글라스 서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1955)의 이야기를 이주 노동자와 노년 여성의 멜로드라마로 변주해 만든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성소수자와 독일의 역사, 노동의 문제와 나치즘의 문제 등을 멜로드라마의 문법 아래에서 치밀하게 담기 시작한다. 1970년대 세계의 모든 영화인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비롯한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장 마리 스토로브 위에 등의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들이 모인 독일 영화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982년 파스빈더의 요절과 빔 벤더스, 헤어조크의 미국 진출로 뉴 저먼 시네마의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파스빈더의 13년간의 작품 활동은 세계 영화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문 너머로 바라보는 역사와 사회

프레임 안에 갇힌 인물들 영화 <중국식 룰렛>

파스빈더의 영화는 항상 인물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알리(엘 헤디 벤 살렘)을 여러 겹의 열린 문안에 가둬놓듯 묘사하는 장면이나, <중국식 룰렛>(1976)의 모든 인물들이 진실 게임의 일종인 ‘중국식 룰렛’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방 가운데에 놓인 유리로 된 술 진열장에 인물들이 계속 갇히듯 카메라로 촬영하는 기법은 인물을 바라보는 파스빈더의 인장과도 같다. 창문, 유리장, 거울, 차창, 대문 등 파스빈더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네모난 틀 안에 갇혀있거나 걸쳐있다. 파스빈더는 생전에 “나는 나의 영화들로 하나의 집을 만들고 싶다. 어떤 영화들은 지하실이 되고 어떤 영화는 벽이 되고 어떤 영화는 창문이 된다. 나는 결국에는 영화를 통해 완성된 하나의 집을 짓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폐쇄적인 파스빈더의 프레임 안에서 그의 캐릭터들은 불안함을 겪어내지만, 불안함의 주체는 계층과 무관한 사회/역사의 모든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그의 말대로 그의 영화는 하나의 집이 된다.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그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중국식 룰렛>에서 가족 공동체의 위선과 타락을, <퀴스터스 부인의 천국 여행>(1975)에서는 노년 여성의 사회적 고립을,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9)에서는 나치즘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결혼제도의 맹점을 공격한다. 그의 영화는 오버하우젠 선언처럼 삶의 경험을 기반하지만 동시에 독일 사회가 겪어야 했던 사회 문제와 역사를 반드시 경유한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불안정하고 어딘가 흔들리는 이유는 어쩌면 격변하는 서독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빔 벤더스가 로드 무비를 통해 삶의 허무를 그리고, 베르너 헤어조크가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통한 인간의 광기를 그렸다면, 파스빈더는 자신이 몸소 겪은 사회적 혼돈과 차별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녹여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사회의 아픔과 파스빈더 개인의 아픔을 모두 느끼게 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3월 29일부터 4월 23일까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회고전을 진행하고 있다. 양질의 영화를 수입하는 영화사 엠엔엠(M&M International)과 함께 고전, 예술 영화를 소개하는 ‘엠엔엠 콜렉티오 시리즈’의 일환으로 파스빈더의 작품 10편과 파스빈더의 영향을 받은 네 편의 동시대 영화를 상영한다. 그의 영화세계가 궁금하다면 23일까지 이어질 파스빈더 회고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자세한 안내는 하단 링크를 통해 알 수 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