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젊은 연극배우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뭐든 연극하는 것처럼 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소소한 일상 및 생활 패턴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묘한 말이었다. 연극적인 재능과 센스가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특유한 인식에서 나온 말 같았다. 오래 곱씹게 됐었다. 내가 내가 아닌 사람이 되었을 때 발휘하게 되는 힘 같은 걸 떠올렸다.
나는 왜 나이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언제나 요령부득이다. 하지만 살면서 몇 번쯤 부닥치게 되는 질문이자 해답은 요원한 자중지란의 입구와도 같다. 자아가 이미 단단하게 형성되었다고 믿게 되는 성인이거나, 삶의 어느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긍지와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에겐 무용하고 거추장스러운 질문일 것이다. 자신을 정확히 안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리고 불가능하다. 거울은 나를 비추는 게 아니라 나라고 여겨지는 것의 껍데기를 역상으로 반사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나’가 내 몸을 벗어나 또렷한 객체로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1975)는 낯선 곳에서 맞닥뜨린 ‘또 다른 나’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또 다른 나’가 되고자 하는 본원적 욕망을 파헤친 심리극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텔레비전 영화 기자 데이비드 로크(잭 니콜슨)는 아프리카의 내전 상황을 취재 중 길을 잃는다. 사막과 알 수 없는 언어와 갈증에 시달리던 로크는 어느 허름한 호텔에 투숙한다. 샤워기 아래서 때를 벗고 호텔 종업원이 가져다준 물로 갈증을 채운 로크는 우연히 다른 방에 투숙 중이던 한 남자를 발견한다. 데이비드 로버트슨이라는 사업가다. 그가 침대에 죽어있다. 로크는 로버트슨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소지품을 뒤진다. 여권과 몇몇 서류 등이 로크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로크가 로버트슨을 인터뷰한 녹음테이프도 있다. 죽은 로버트슨과 로크의 대화 중 화면은 두 사람을 동시에 프레임 안에 둔다. 청색 재킷 차림의 로버트슨과 붉은색 체크무늬 차림의 로크. 로크는 질문하는 자고 로버트슨은 대답하는 자이다. 희멀건한 호텔 벽이 문득 뭔가가 차근차근 쓰여지는 백지 같다는 느낌을 준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라고도 할 만하다. 이미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대화. 둘의 얼굴이 똑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다. 로크는 묘한 충동을 느낀다. 로버트슨의 여권과 자신의 여권을 바꿔치기한다. 옷도 바꿔 입는다. 자신이 묵던 방에 로버트슨의 시신을 옮겨 놓는다. 그러곤 호텔 카운터에 데이비드 로크의 죽음을 알린다. 로크는 그렇게 로버트슨이 된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내가 되어 죽고 살다
영화 시작 17~8분 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영국 방송국 본사와 로크의 아내 레이첼에게도 소식이 전해지고 신문에 로크의 부고가 뜬다. 로버트슨으로 변신한 로크가 자신의 부고를 읽는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로크는 이제 한때 자신이었던 로크를 자신에게서 지운다. 로버트슨의 수첩에서 발견한 스케줄을 훑고 로버트슨이 하던 일을 하는 척하면서 로버트슨과 관계된 사람들과 만난다. 로버트슨은 아프리카 반정부 게릴라에게 무기를 제공하던 밀매업자였다. 여러모로 로버트슨은 쫓기게 된다. 로버트슨의 뒤를 쫓는 사람들과 로크의 행방을 추적하며 로버트슨을 만나려는 방송국 동료 및 아내 레이첼. 로크에게서 탈출한 로버트슨은 무작정 떠난다. 로크에게서도, 그리고 원래의 로버트슨에게서도. 그러다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젊은 여인을 만난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이름이 없다(마리아 슈나이더가 연기한 이 역할은 크레딧에서도 ‘Girl’이라고만 뜬다). 그녀는 새로운 로버트슨의 조력자가 된다.
둘이 만난 곳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물에서였다. 여성은 가우디의 건축물엔 “숨을 곳이 많다”고 말한다. 그전에 둘은 로크가 막 로버트슨으로 변신한 직후, 런던에서 잠깐 마주친 적 있다. 그녀는 항상 독서 중이다.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새로운 로버트슨과 그녀의 대화는 대체로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이거나 현실 기만적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로버트슨은 자신이 가짜 로버트슨임을 밝히게 되고 그녀는 거기에 흥미를 느낀다. (현실에 존재하나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존재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사랑도 사랑 아닌 것도 아닌 기묘한 애정이 둘을 함께 떠돌게 만든다. 로버트슨을 추적하는 자들에게 그녀는 늘 가림막이 되어준다. 로버트슨은 끝내 로버트슨도 로크도 아닌 채로 계속 사라지기만 한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이 영화의 핵심 줄기다.
현실은 잘 편집된 가짜 진실의 허구
현실의 사소한 디테일들을 모아 재조립하고 편집하다가 보면 늘 숨겨진 진실이 발견되곤 한다. 로크의 직업이 다큐 영화 제작자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미 전작 <욕망>(원제 ‘Blow-up’을 한국에선 ‘욕망’이라는 엉터리 제목으로 번역했는데 원래는 폭발·확대라는 뜻이다)에서부터 그런 점을 다루었다. 조각난 현실의 파편들이 그려내는 보다 크고 본질적인 진실. 그러나 그것이 편집되기 전엔 늘 뒤엉킨 우연과 예측불가한 암시로만 범상하게 떠돌 뿐이다. 사실이었던 것들이 사실을 가장한 조작이었고,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내면 깊숙이 숨겨둔 비밀이었음을 알리는 경우는 실제로 허다하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고 그걸 총체적으로 조장하는 게 미디어이다.
영화에선 왜 로크가 자신을 버리고 로버트슨이 되려 했는지 그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그 행위가 너무 비밀스럽기도, 너무 당연하게도 여기게 된다. 자연스럽지도 부자연스럽지도 않다는 묘한 중립 상태.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어 거처도 목적도 없이 떠도는 삶. 그리고 정체 묘연한 젊은 여인과의 불안정한 동행. 극도로 제한된 대사와 평범한 듯 기묘한 기하학적 미감이 느껴지는 이미지들의 나열로 보이지 않는 큰 그림을 드러내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특유의 미장센은 이 영화에서 극점에 달했었다.
로크도 로버트슨도 아닌 채로 어느 한적한 시골 호텔 방에서 조용히 혼자 죽어가는 마지막 7분의 롱테이크는 영화사적인 전대미문의 장면으로 남아있다. 어떤 극적인 행동이나 말도 없다. 호텔 방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인 카메라는 좁은 창살 사이를 서서히 벗어나 호텔 앞 공터의 시시콜콜한 풍경과 인물들의 산발적인 행동들을 훑으며 점점 시야를 넓힌다. 호텔 주위를 뱅그르르 돌면서 이내 한꺼번에 몰려드는 로버트슨의 추적자들의 모습을 무감하게 채집하듯 한다. 그리고 다시 이번엔 창밖에서 로크이자 로버트슨이자 그 둘 중 아무도 아닌 남자가 죽어있는 방을 포착한다. 그는 죽기 전 그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경찰이 출동하고 신원 확인이 이뤄지는 등 어수선한 장면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건조하게 스쳐 지난다. 그가 로크인지 로버트슨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로크의 아내 레이첼은 로크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는 듯 해가 지고 여관 주인이 입구에서 담뱃불을 켜자 로비에 불이 들어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떠나는 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앞서 언급한 연극배우의 말 때문에 다시 보게 된 영화다. 배우(俳優)란 단어를 풀면 ‘사람이 아니다’(人+非)라는 뜻이 숨어 있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함의를 가진다고 봐도 된다.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면 자신이 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일 거라는 건 물리적으로 명확하다. 그럴 경우, 세계도 변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그’가 아는 세계가 되고 내가 나였을 때엔 몰랐거나 무시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었을 때엔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가능하게 (또는 그렇게 여겨지게) 된다. 나를 바꾼다는 건 내가 숨겨뒀거나 감추고 했던 모종의 진실을 스스로 고발하는 행위인 것이다.
풍경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반영한다. 낯선 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게 된다. 여행은 그래서 흥분되고 설레는 일이자, 무섭고도 잔인한 일일 수 있다. 내가 나의 바깥으로 가는 여행이든 바깥에서 안으로 되돌아오는 여행이든, 결국 떠나는 건 나 자신이고 다시 만나는 것 역시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이다. 그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 삶 자체가 끝없는 여행이라는 진부한 명제를 새삼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또 내가 나인 줄 알았던 나를 배반하는 또 다른 하루임엔 분명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인 법이니까.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