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인 실체가 주는 낭만이 있다. 아무리 필름 영화의 시대는 갔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필름 영화를 굳이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2020년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대로 찍은 영화가 속속들이 개봉하고 있다. 그래서 모아봤다. 2020년대 개봉 영화 중, 필름으로 찍은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2023)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대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 여성 ‘소영’과 아들 ‘동현’의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영화는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영상미가 녹아있다. 필름의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는 1990년대의 그 감성을 뭉클하게 재현해 냈다. 마치 그 시절의 홈비디오를 보는 것만 같은, 브라운관 TV를 떠올리는 1.33:1(4:3) 화면비는 덤.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넉넉지 않은 예산 때문에, 하루에 쓸 수 있는 필름의 양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전에 리허설을 여러 번 했다고. 영화의 앤소니 심 감독은 씨네플레이와의 인터뷰에서 카메라팀이 하루에 필름 4롤만 쓸 수 있다고 했다며, 어쩌다 필름을 6롤 쓴 날은 그다음 날 2롤만 가지고 찍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고 밝혔다.


<바빌론>(2023)

<바빌론> 스틸컷. 렌즈로 현장을 체크하고 있는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 <라라랜드>로 ‘천재’ 칭호를 얻은 85년생 감독 데이미언 셔젤. 그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필름을 사랑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데뷔작 <위플래쉬>를 제외하고 <라라랜드>, <퍼스트맨> 모두 필름으로 촬영했다.

데이미언 셔젤이 연출한 영화 <바빌론>은 1920년대 말 할리우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시기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때였다.

<바빌론> 스틸컷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당연하게도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했다. 그래서,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담는 <바빌론> 역시 필름으로 촬영되어야만 했다.

<바빌론> 스틸컷

이 영화는 전부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CG(컴퓨터 그래픽)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정제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초기 할리우드를 담고 싶었다”라고 필름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나일 강의 죽음>(2022)

<나일 강의 죽음> 스틸컷

전 세계에 4대뿐인 6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 <나일 강의 죽음>. 이 영화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나일 강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소설은 실제로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집트를 여행할 때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서인지 유난히 이집트의 풍광에 대한 실감 나는 묘사가 이야기에 묘미를 더한다. 영화 역시, 이집트의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을 잘 담아내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했다.

<나일 강의 죽음> 스틸컷. 달리 트랙 가운데 인물이 연출 겸 주연 케네스 브래너.

65mm 필름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일반 35mm 필름에 비해 두 배 이상의 화질과 깊이감을 자랑한다. 65mm 필름에는 나일강의 매혹적인 전경과 정교하고 디테일한 세트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애프터썬>(2022)

<애프터썬> 스틸컷

몽환적이면서도 찬란한 색감이 가득한 튀르키예의 풍경. 영화 <애프터썬>의 35mm 필름에는 아름다운 영상미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애프터썬> 스틸컷

<애프터썬>은 샬롯 웰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의 주된 테마는 기억과 회상이다. 그래서인지, 애프터썬의 필름에는 기억과 회상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마치 빛바랜 앨범처럼 향수와 슬픔, 그리움, 그리고 어른이 된 후의 미묘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영상미는 그 자체로도 영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리코리쉬 피자>(2022)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필름 촬영은 모든 걸 쉽게 망칠 수 있기에 긴장감이 있지만

그 스릴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인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한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그는 장편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부터 <팬텀 스레드>까지. 8편의 장편 영화를 모두 35mm 필름으로 촬영했다.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모 아니면 도’ 식의 필름만의 스릴을 즐기는 그. 최근작 <리코리쉬 피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35mm 필름에 새겨진 영상은 그 시대의 질감을 선명하게 구현한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스틸컷

<스토커>(2013), <그것> 등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이 참여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35mm 필름으로 찍은 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에드가 라이트가 필름 작업을 선호하기 때문인데, 정정훈 촬영감독은 <스토커> 이후 처음으로 35mm 필름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촬영 현장. 왼쪽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특히 조명과 빛을 잘 활용해 뛰어난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정훈 촬영감독의 말에 따르면,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조명을 세팅하기 쉽지 않은 실제 소호의 밤거리만 디지털로 찍고 그 이외에는 모두 필름으로 찍었다고.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스틸컷

또한,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시각효과(VFX) 작업을 원하지 않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거울 장면은 사실 똑같은 구조와 모양의 세트 두 개를 만들어서 찍은 장면이라고 한다.


<테넷>(2020)

유난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크리스토퍼 놀란은 CG 사용보다 어떻게든 실물로 재현해 촬영하기를 선호한다. 그가 <인터스텔라>의 방대한 옥수수밭, <인셉션>의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트,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배트카까지 실제로 만들어서 촬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놀란 감독의 차기작인 <오펜하이머>에서는 CG 없이 핵폭발 장면을 구현했다고(당연히 폭발하는 효과만 구현했다). <오펜하이머>는 올여름께 한국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테넷> 스틸컷. 왼쪽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20년에 개봉한 <테넷> 역시 아날로그로 탄생한 작품이다. <테넷>의 주된 소재는 ‘인버전’, 즉 시간 역치다. 이 때문에, 영화를 위해 새로운 카메라를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아이맥스' 포맷을 개발한) IMAX 사는 역방향 재생을 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에 이른다. 놀란이 <다크 나이트>에서 최초로 상업 영화에 아이맥스 포맷을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놀란과 IMAX 사는 꽤 돈독한 사이이다.

<테넷> 스틸컷

<테넷>의 촬영은 <덩케르크> <인터스텔라>의 카메라를 잡은 호이트 반 호이테마가 맡았다. 호이트 반 호이테마는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전 작품들에서보다 <테넷>에서 더 많은 장면을 IMAX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밝힌 바 있다. <테넷>의 IMAX 필름을 쭉 나열하면 약 160만 피트, 즉 약 487km 분량이다. 어마어마한 스케일 때문인지,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테넷> 스틸컷

그 유명한 보잉 707 폭발 장면 역시, CG보다 실물로 촬영하는 것이 더 싸서(!) 실제 비행기를 폭파시켰다고. 영화 속, VFX(시각특수효과)를 사용한 장면은 약 280컷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보다도 VFX를 적게 사용한 것.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