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뚝 떨어진 살인마가 나를 괴롭히는 무리를 모조리 납치해 간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그런데 한편으론 신기하다. “다 죽었으면 좋겠어!” “저들을 벌해주소서.” 울부짖거나 소리 내어 기도한 것도 아닌데 사악한 구원자가 적시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공을 신나게 놀려대던 이들은 이제 피범벅 된 손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운 상황이지만 주인공은 구조를 바라는 손길을 외면하고 살인마에게 인사를 건넨다. 살인마는 주인공만 멀쩡히 남겨두고 유유히 떠난다. 여기까지가 스페인의 영화감독 카를로타 페레다의 단편 <피기>(2018)의 내용이다. 덩치 큰 10대 소녀가 또래 사이에서 겪는 곤경과 장르물의 쾌감이 적절히 배합된 단편은 300개가 넘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피기>는 동명의 단편이 끝나는 자리에서 고민을 시작한다. 주인공 사라(라우라 갈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질까? 갑작스러운 실종 사건은 작은 시골 마을에 어떤 파문을 불러올까? 무엇보다, 사라의 마음속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장편으로 확장된 <피기>는 피와 살이 튀는 장르영화의 주인공도 결국 현실의 온갖 조건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구체적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단편의 결말이 조금의 통쾌함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감독은 사라에게 견디며 살아가야 할 일상이 남아있다고 여긴다. 영화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라는 부모가 운영하는 정육점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 싱그러운 청춘을 만끽하는 아이들. 짐작하겠지만 사라는 그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무리 중 누군가는 부모와 함께 있는 사라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곤 “아기 돼지 삼형제”라고 놀린다. 한편 무르익어 가는 여름의 열기는 사람들을 강으로 불러 모은다. 주민들은 물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는 중이고 곧 폭포 근처에서 축제도 열릴 예정이다. 사라는 북적이는 강 대신 아무도 없는 동네 수영장을 피서지로 택한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인근을 지나는 여자애들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만다.
신체 절단과 사체 출현 등 공포, 스릴러 장르의 익숙한 이미지가 등장하긴 하나 <피기>는 사라의 고통을 정밀 묘사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영화다. 따돌림 당하는 소녀가 주인공인 데다가 핏빛 난장판이 펼쳐진다는 전개는 <캐리>(브라이언 드 팔마, 1976)를 떠올리게 하지만 <피기>가 그려내는 소셜 미디어 시대의 괴롭힘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모양새다. 놀림과 조롱은 온라인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사방에서 공격받는 취약한 소녀에겐 감독의 말처럼 더는 “안전한 공간이 없”는 것이다. 사라의 몸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인터넷을 타고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놀림거리가 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폐쇄적 마을에선 그 못지않게 물리적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자애들은 폭언을 일삼으며 수영하는 사라의 옷가지와 가방을 들고 달아나고, 남자애들은 울며 도망치는 사라의 몸을 너무도 쉽게 만지며 비웃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의 잔소리와 핀잔도 사라를 숨막히게 한다. 사라는 가뜩이나 예민한 10대 시절을 지옥처럼 보낸다. 정체 모를 살인마(리처드 홈스)와의 조우는 그런 사라에게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온다.
살인마의 등장으로 마을은 발칵 뒤집어진다. 수영장 안전 요원과 식당 종업원이 죽은 채 발견되고 세 여학생은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나 성과는 없다. 마을에서 단 한 명, 사라만이 이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녀는 피투성이 여자애들을 차에 싣고 떠나는 살인마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장본인이다. 그러나 사라는 웅성대는 사람들 틈에서 입을 다문다. 이즈음 영화는 사라의 마음속으로 다이빙을 시도한다. 수영장에서 돌아온 이후 사라는 시종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그 긴장의 근원에 단일한 감정이 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살인마에 대한 두려움,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조롱으로 인한 수치심, 단죄를 원하는 욕망 같은 것들이 매번 강도를 달리해 사라를 사로잡는다. 심지어 이러한 감정들은 사라를 모종의 흥분으로 끌고 간다. 살인마와 접촉한 기억은 성적 에너지를 추동하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사라를 휘감아 버린다. 물론 사라는 캐리가 아닌지라 이러한 내면의 소란스러움이 초자연적 현상으로 발현될 리 만무하다. 그저 요동치는 가슴을 끌어안고 세상과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리고 막아서는 상대와는 육탄전을 벌이면서 말이다. 사라는 혼돈의 시기를 저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며 혹독한 성장통을 앓는다.
<피기>는 말을 아끼는 영화다. 카를로타 페레다는 구구절절 늘어지는 말보다 귀를 때리는 매미 소리와 시뻘건 수박 파편 같은 자잘한 요소가 영화의 핵심을 더 정확히 전달한다고 여기는 부류의 연출자다. 신경을 긁어대는 사운드 디자인과 답답해 보이는 4:3 비율의 화면 등 특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가득하다. ‘설명하지 않기’를 모토로 삼기라도 한 듯 <피기>는 인물들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최소한의 대사마저도 피해 간다. 대신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눈짓과 사소한 행동이 그 관계를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식이다. 사라진 아이들 중 한 명인 클라우디아(이레네 페레이로)와 사라의 관계는 우물쭈물하는 표정과 장난감 같은 팔찌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과거 어느 시점까지는 단짝이었으리라. 물론 영화가 가장 설명을 아끼는 건 살인마의 존재에 관한 부분이다. 살인마는 도대체 왜 마을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한 걸까?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이면서 사라에게는 유독 관대한가? 그렇다면 살인마에 대한 사라의 감정은 무엇인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이 같은 질문들에 명료하게 답하기가 어렵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침묵과 모호함은 작품의 결함으로 남는 게 아니라 영화를 훨씬 멀리까지 끌고 가는 힘이 된다. 그렇게 <피기>는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도, 전부 부숴버리는 복수극도 아닌 새로운 길로 사라와 함께 나아간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