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 시장에 새로운 붐이 불고 있다. 바로 ‘재개봉/미개봉 영화’ 개봉 전략이다. 길게는 75년 전 고전 영화부터 시작하여, 거장의 작품들, 신예 감독의 데뷔작, 컬트 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박스 오피스에 이름을 올리려고 한다. 2023년 2분기에만 개봉 소식을 알린 재개봉/미개봉 작품들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1948), 데이비드 린치의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오디션>(1999), 비간 감독의 <카일리 블루스>(2015) 등이 있다. 제일 최근에 제작된 작품이 8년 전에 영화제에 소개된 작품이다. 그야말로 극장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최근 예술 영화 수입/배급사들이 이런 경향을 보이는 데에는 코로나 이후 위축된 예술 영화 시장의 여파가 큰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시기 왕가위 감독의 특별전을 진행하여 4K로 리마스터링된 <중경삼림>(1994), <해피 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등을 개봉해 좋은 반응을 끌어냈고, 이외에도 오즈 야스지로 4K 복원 기념 특별전, <지옥의 묵시록>(1979), <디어 헌터>(1978), <사랑은 비를 타고>(1952) 등 4K 디지털 복원된 고전 작품들 역시 코로나 시기를 기점으로 극장에 개봉됐다. 중장년층 관객에게는 향수를, 젊은 시네필들에게는 고전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기회를 제공하며, 새로운 예술 영화를 개봉하는 것보다 실패 가능성이 적은 명작들 위주의 상영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2분기에 개봉될 네 작품의 성격은 각기 다르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은 영화사적으로 뛰어난 작품이지만 동시에 국내에서는 6.25 전쟁 중이었던 1952년 이후 극장에서 개봉 상영한 전적이 없었고, <오디션>은 미이케 다카시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으나 고어 장면으로 진입 장벽이 높고, <카일리 블루스> 역시 국내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동아시아권 감독의 출세작이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필모에서 가장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유명한 작품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블루 벨벳>(1986)에는 한창 미치지 못하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코로나 시기에 개봉하여 큰 호응을 얻었던 왕가위나 오즈 야스지로, <지옥의 묵시록> 같은 할리우드 명작들에 비해 이번 2분기 상영작들은 ‘숨겨진 명작, 뛰어난 동아시아 감독들의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새로운 예술 영화의 개봉이 더뎌진다는 점은 슬프지만, 동시에 극장에서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뒤늦게 국내 관객들과 마주한다는 사실은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이번 2분기에 개봉할 네 작품을 살펴보면서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볼 나날을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
<자전거 도둑> dir. 비토리오 데 시카
세계 영화사를 읊어나갈 때면 비토리오 데 시카의 걸작 <자전거 도둑>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미국 할리우드를 대변하는 작품이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누벨바그 운동이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인 것처럼, 이탈리아 영화를 대변하는 단 하나의 작품을 꼽으면 무조건 <자전거 도둑>의 이름이 거론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부터 봉준호까지 이 작품의 팬을 자처하는 거장들은 수도 없이 많다. <자전거 도둑>이 어떤 작품이길래, 7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며 국내 관객들에게 찾아올 수 있었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경제는 완전히 황폐해졌고,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선전 영화를 주로 제작하며 무기력하게 쇠퇴하고 있었다. 당대 영화 시스템으로는 현실의 피폐함을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젊은 감독들은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고 게릴라 촬영을 감행한 채,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영화적 사조인 ‘네오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자전거 도둑>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궁핍한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 속에서 가장인 안토니오는 광고 전단을 붙이는 일자리를 드디어 구하게 되지만, 처음으로 일을 하러 나선 날 가장 필요한 자전거를 도둑맞게 된다. 안토니오는 아들과 함께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으러 나선다. <자전거 도둑>의 미학은 단순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황폐해진 전후 이탈리아의 풍경과 이들을 빈곤하게 만든 국가 권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데 있다. 9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이토록 가혹한 두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가슴 한편이 강하게 저려올 것이다.
<스트레이트 스토리> dir. 데이비드 린치
기괴한 이미지와 파편화된 서사, 어딘가 결여되고 신경질적인 인물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공간.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온갖 극단적인 수식어가 필요하다. 그가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1977)부터 드라마 <트윈 픽스> 시리즈까지 린치의 작품은 언제나 파격과 난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어쩌면 린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의외의 작품이다. 위독한 형을 보기 위해 잔디 깎기 트랙터를 타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데이비드 린치보다는 차라리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데이비드 린치가 다루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라니,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정석적인 경로를 밟아간다. 한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노인의 여정을 조망한다. 로드 무비의 전형을 따라가면서 그가 걸어온 기나긴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사려 깊게 듣는다. 오랜 불화로 형과 절연한 노인 앨빈 스트레이트(리처드 판스워스)의 전사 역시 덤덤하게 풀어낸다. 그렇다면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팀 버튼의 <덤보>(2019)처럼 감독의 색깔은 사라진 채,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평범한 영화일까? 그렇지 않다. 밝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만, 앨빈을 뒤따라오는 죄책감의 그림자와 회한의 정서는 린치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단지 영화의 분위기가 음산하지 않을 뿐,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감동을 넘어서는 불안함과 먹먹함을 공유하고 있다.
<오디션> dir. 미이케 다카시
미이케 다카시는 유혈의 미학을 아는 감독이다. 100편이 넘는 다작을 이어오면서, 그는 어떤 소재에도 폭력의 코드와 파격적인 상상력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과장된 폭력을 유머로 승화시켰고, 박찬욱이 폭력을 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면, 미이케 다카시의 폭력은 극단으로 치달아 끝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근에는 정해인, 고경표, 김혜인 배우와 합작하여 OTT 시리즈 <커넥트>를 연출하며 한국 진출 또한 시도했다. <오디션>은 미이케 다카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알린 출세작이다. <오디션>은 지난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출범 당시 한국의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기도 했다.
<오디션>은 고어적 요소가 가미된 사이코 스릴러다. 7년 전 아내를 잃은 뒤로 결혼을 망설이는 영화사 사장 아오야마(이시바시 료)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재혼을 결심한다. 그는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신붓감을 찾기 위한 묘책을 낸다.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여주인공을 뽑는다는 오디션 공고를 내고, 4,000명의 지원자 중 자신의 이상형에 걸맞은 아사미(시이나 에이히)를 택한다. 하지만 그와의 행복한 연애는 얼마 가지 않아 아사미의 거짓말을 알게 되며 사라지고 만다. 사랑에서 공포로 바뀌는 지점에서 <오디션>은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23년 전 전주에서 첫 상영 당시 몇몇 관객들이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오디션>의 충격적인 설정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호러와 고어 장르의 팬에게는 <오디션>은 일종의 바이블이다.
<카일리 블루스> dir. 비간
비토리오 데 시카, 데이비드 린치, 미이케 다카시. 앞서 언급된 세 감독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비간이라는 이름은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다. 작년 <헤어질 결심>(2022)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탕웨이가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던 <지구 최후의 밤>(2018)을 기억하는가? 비간이 처음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바로 <지구 최후의 밤> 덕분이었다. 다소 난해한 서사 구조, 꿈과 현실을 뒤섞었던 환영적 연출, 3D 촬영과 원테이크 핸드헬드 기법의 차용 등. 비간 감독의 야심이 돋보였던 <지구 최후의 밤>이 국내 영화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카일리 블루스>가 제작 8년 만에 국내 관객들과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 해외 초청을 통해 한차례 국내 관객들과 만난 적 있던 비간의 <카일리 블루스>는 영화제 상영 당시에도 그의 재능을 높게 보며 차기작을 기대하던 관객들이 많았다. 카일리라는 중국의 한 마을을 두고 펼쳐지는 기억과 현실, 꿈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연출을 보이는 <카일리 블루스>는 분명 일반 관객들에게 낯선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평소 존경하는 감독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을 꼽은 비간의 인터뷰를 고려해 보면, <카일리 블루스>에 등장하는 꿈과 현실을 교차하는 연출은 그가 사랑했던 감독들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구 최후의 밤>을 흥미롭게 보았던 관객이라면 분명 <카일리 블루스>에서 드러나는 비간의 인장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영화의 미래'로 불리는 비간의 첫 출발이 궁금하다면 <카일리 블루스>를 극장에서 만나는 기회는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