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는 2021년부터 특별 프로그램, '올해의 프로그래머' 섹션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는 매해 한 명의 영화인을 프로그래머로 초청해, 자신만의 관점에 따라 선택한 영화를 공유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섹션이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는 백현진이 선정되었다. 백현진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늘 선을 넘지"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뮤지션이자, 배우이기도, 감독이기도, 설치미술가이기도 한 이른바 '종합예술인'. 미술, 음악, 연기 등 장르를 국한하지 않고 '선을 넘는' 백현진은 어떤 한 가지 직업으로만 소개하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해, 그저 '백현진'이라는 이름 석 자만이 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듯하다.

백현진은 <은교>(2012), <경주>(2014), <그것만이 내 세상>(2017),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경관의 피>(2020) 등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드라마 <모범택시>, <해피니스>, <가우스전자> 등에서도 연기력을 뽐낸 바 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백현진의 출연작 중, 영화 <경주>를 상영하고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배우 박해일, 신민아가 주연을 맡은 영화 <경주>는 장률 감독이 연출한 2014년 작품이다. 극중 백현진은 '박 교수'를 맡아,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권위적이면서도 허위의식, 비굴함을 모두 갖춘 인물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왼쪽부터) 백현진 올해의 프로그래머, 박해일 배우의 'J 스페셜클래스' 현장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현장에는 배우 박해일과 문석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도 함께 참석했다. 박해일과 백현진은 관객들과 함께 나란히 <경주>를 관람한 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에는 현장에서 나온 두 배우의 인상적인 말, 말, 말을 정리했다.


<경주>를 다시 보고 싶어서 전주를 찾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보고 나니) 전주에서 마치 경주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다.

배우 박해일

영화를 개인적으로 관람하는 것과, 극장에서 익명의 개인들과 함께 관람하는 행위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면 혼자 볼 때와는 달리 커다란 화면으로, 또 좀 더 몰입해서 본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 외에도 영화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타인과 함께 호흡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혼자서 영화를 관람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포인트에서 다른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를 들으며 같이 웃기도 하고, 다른 관객들이 숨을 죽여 묘한 적막감이 흐르는 대목에서는 나도 덩달아 숨을 죽이며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게 된다.

<경주> 스틸컷

<경주>를 함께 관람한 두 배우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2014년 6월에 개봉한 작품인 만큼, 영화가 첫 선을 보인 이후로 약 9년이 지났다. 9년 전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다시 관람하는 일은 배우들에게도 남다른 의미였을 터.

박해일은 큰 스크린으로 <경주>를 다시 관람하니,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까지 섬세하게 볼 수 있었다며, 영화는 역시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백현진 역시, <경주>를 오랜만에 다시 관람하는데도 역시나 재밌었다며 관람 소감을 전했다.


(<경주>의) 장률 감독님은 디렉션을 크게 주지 않으셨다. 현진이 네가 (대사를) 만들어서 해보라고 하셨다.

백현진

(왼쪽부터)'J 스페셜클래스' 현장의 문석 프로그래머, 백현진 올해의 프로그래머, 박해일 배우

백현진이 맡은 '박 교수'는 <경주>의 문제적 역할이자 신 스틸러다. <경주>에는 정말 경주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경주 어느 술집에 가면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을 법한 박 교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활기 있고 재밌는 캐릭터의 모습은 백현진이 일부 창조한 것이다. 장률 감독은 백현진에게 연기에 관한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기보다는, 큰 틀만 준 채 대사를 일부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백현진은 자신이 대사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며, 캐릭터에 살을 덧입혔다.


(<경주>의) 장률 감독님 스타일은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이다. (호흡이 긴 연기를 하며) 속도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박해일

(왼쪽부터) 백현진 올해의 프로그래머, 박해일 배우의 'J 스페셜클래스' 현장

장률 감독은 긴 호흡의 장면을 즐겨 찍는 연출자다. <경주>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롱테이크 기법의 촬영은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중요한데, 박해일은 이런 장면들에서 배우끼리 호흡을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어 좋았다고 밝혔다. 또, 실제로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았다고. 그는 실수가 있을지언정, 상황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촬영이었다고 밝혔다.

<경주> 스틸컷

백현진 역시, 자신은 롱테이크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마치 실제로 대화하듯이 연기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그는 밴드 활동 당시의 경험을 언급하며, 밴드 녹음을 할 때도 세션별로 녹음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가 녹음실에 들어가 함께 녹음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장률 감독과의 작업 역시 편했다고.


사람 안에는 수많은 모습이 있다. 어떤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냐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관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모습들이 다르게 보이는 거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있는 것 중에서 끄집어내서 쓴다고 생각한다.

백현진

<경주> 스틸컷

백현진은 "연기의 '자연스러움'은 어디서 나오나. 내면에 있는 건가, 따로 레퍼런스가 있는 건가?"라는 질문에 자신은 미술이건, 음악이건 어떤 작업이건 간에 레퍼런스를 전혀 찾으려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혹시나 무의식중에 자신 안에 어떤 레퍼런스가 들어온다면, 삭제하려고 한다고. 그는 모든 연기는 자신의 내면의 일부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백현진 올해의 프로그래머, 박해일 배우의 'J 스페셜클래스' 현장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장률 감독님은 그게 정상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촬영 시작하기 전, 감독님과 함께 경주에 가서 며칠 지냈다. 죽음에 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는데, 그냥 능을 바라보면서 족발도 먹고, 술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랬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됐다.)

배우 박해일

<경주> 스틸컷

<경주>에는 경주 사람들, 즉 어디를 가도 능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능'이란, 왕·왕후의 무덤이니 곧 죽음을 뜻하기도 하는 것. 능을 바라보며 장률 감독과 소소한 일상을 보낸 박해일 역시, 죽음을 바라보며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영화 <경주>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일지도.

<경주> 스틸컷

극중 최현 교수(박해일)가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주변인들의 죽음 역시, 능을 바라보며 일상을 이어가는 경주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터다. 유난히도 죽음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 이 영화는 죽음을 별난 것으로 다루기보다는 늘 곁에 있는 '능'처럼 다룬다. 사실 실제로도 죽음은 별다른 것 없는 하루처럼 유별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글=전주 ·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