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영화인이 본인만의 관심과 관점에 따라 영화를 선택해 관객과 공유하는 전주국제영화제만의 특별 프로그램이다. 2021년 배우 류현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감독 연상호가 전주를 찾아 가타야마 신조 감독의 <실종>,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등을 소개한 바 있다.
올해는 그 전통을 배우이자 화가, 음악가, 현대미술가인 백현진이 이어받는다. 백현진은 루이스 부뉴엘 만년 3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그리고 그가 출연한 <뽀삐>(2002) <경주>(2014)를 선택했다. 자신이 연출한 <디 엔드>(2009) <영원한 농담>(2011)도 소개한다.
박찬욱 감독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백현진이 보여준 독창성에 찬사를 보냈고, 설치미술가로서 그는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도 수상했다. '종합예술인' 백현진의 안목을 신뢰한다면 당장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아 그가 고른 작품들을 만나보자. 이제는 만나보기 힘든 그의 초창기 작품들과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을 큰 스크린을 통해 감상하는 흔치 않은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뽀삐>(2002) <경주>(2014)
백현진에게 <경주>와 <뽀삐>는 각자의 이유로 특별하다. 2002년작 김지현 감독의 <뽀삐>에서 그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고, <경주>(2014)는 그의 연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다.
먼저, 첫 주연작 뽀삐는 영화감독 김수현(백현진)이 10여 년간 키워오던 강아지 '뽀삐'가 죽자, 그 상실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개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를 결심하고 개를 키우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영화다. 추리작가, 영화배우, 스님, 수의사, 결벽증 환자 등 다양한 이들과의 인터뷰와 '사건재연'식의 드라마들이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에 독특하고 유쾌하게 녹아있다. 특히, 뽀삐가 죽은 뒤 ‘개 죽은 것 갖고 뭘 그러냐’는 어머니의 말에, '엄만 왜 뽀삐 보고 개래? 만약 엄마가 죽었을 때, 그냥 ‘사람 죽었다’고 하면 기분 좋겠어'라고 따지는 장면이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인터뷰이들에게 엉뚱하지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배우 백현진의 20년 전 연기는 여전히 유쾌하고 묘하다.
'연기 같은 연기'를 싫어한다는 백 배우는 영화 <경주>에서도 특유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로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지질함을 찰떡같이 표현한다. 비굴함과 분노 사이를 묘하게 줄타기하며 이어가는 최현(박해일)과의 술자리 대화 장면은 단연 압권. 짧은 출연에도 그의 전매특허인 생활 연기 내공을 발휘하며 영화 속 웃음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 백현진은 “동료로서 품앗이한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해왔지, 배우라는 정체성을 가진 건 불과 2~3년 전부터”라고 말하며,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너무 싫어한다. 말하듯 자연스럽게 하려고 한다. 또 해당 지역의 분들을 속일 자신이 없어서 사투리 연기는 하지 않고 서울말만 쓴다”라고 연기 철학을 털어놓기도 했다.
배우 박해일은 지난 금요일에 진행된 <경주> GV에서 “<경주>를 다시 보고 싶어서 '전주'를 찾아왔다”라고 라임을 맞추며 장난스레 말했다. 박 배우를 따라 이번 기회에 '전주'를 찾아 <경주>를 다시 보자. 10년 전과는 또 다른 영화적 경험이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디 엔드>(2009) <영원한 농담>(2011)
위에 소개한 영화 <뽀삐>는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백현진이 직접 연출한 단편과 함께 묶어 상영된다. 백현진은 “김지영 감독의 <뽀삐>는 지금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뽀삐라는 강아지가 주인공이었고 제가 서브였다. 이 작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길이가 70분 정도라 돈 내고 오신 분들이 100분 넘게 보고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 미술 작업할 때 만들었던 비디오를 함께 선정했다. <디 엔드>라는 작품에는 박해일, 문소리, 엄지원, 류승범 등등 배우들이 나온다”라고 관객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그 다운 독특한 선정의 변을 밝혔다.
먼저 30분가량의 단편영화 <디 엔드>는 도시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얼굴에 대한 사려 깊은 탐색, 실험을 담은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박해일, 엄지원, 문소리, 김학선, 류승범, 오광록 등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촬영감독 김우형, 음악 장영규, 미술 김준까지 충무로 최고의 스태프들이 전원 무급으로 참여했다. 비디오아트와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낯선 영상언어가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평.
<영원한 농담>도 40분가량의 단편영화로, 영화는 제주도에서 오랜만에 만난 두 남자(오광록, 박해일)의 '농담'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는 비밀스러운 사연들이 배여 농담 같은 진담, 진담 같은 농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데, 문어체의 대사, 미니멀한 화면구도와 앵글, 인물들의 응축된 연기 방식은 부조리극을 연상시킨다. 이들이 이어가는 끝없는 농담은 위로받고 싶은 현대인의 몸부림에 다름없다.
루이스 부뉴엘 만년 3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루이스 부뉴엘 만년 삼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자유의 환영>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부뉴엘 영화의 정수로 불린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귀족 제도의 끝자락에 사는 서양인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그린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상식과 비상식, 앞과 뒤가 뒤바뀐 현대 사회를 비웃으며 넘쳐흐르는 자유 속에 진정한 자유 없음을 탄식하는 <자유의 환영>, 남자의 성적 욕망에 대해 성찰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까지. 위선적인 대상에 대한 묘사와 조롱, 냉소적 풍자로 인간의 욕망을 신랄하게 다룬 루이스 부뉴엘의 코미디를 보고 있자면 백현진이 연출한 작품의 어투가 겹쳐진다.
백현진 프로그래머는 “루이스 부뉴엘은 내가 흥미 있어 하는 예술가 중에서도 유독 독특하게 다가온 인물이다. 이번 상영작으로 선정한 루이스 부뉴엘의 삼부작을 특히 즐기는데,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다. 극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보면 즐겁겠다 싶어 선정하게 됐다”라고 추천의 변을 전했다.
올해로 스물네 번째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는 4월 27일(목)부터 5월 6일(토)까지 전주 영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전주 곳곳에서 개최된다. 황금연휴다. 팬데믹 이후 명실상부 정상화된 영화 축제를 즐기러 전주를 찾아가보자. 평소 스크린으로 만나보기 어려웠던 '선 넘는 영화'들과 전주의 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