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스토리텔러의 탄생’이라는 수식어로 충무로에 등장했던 장항준 감독이 제10회 들꽃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최근 <리바운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비교적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영화를 만들어온 장 감독과, ‘한국의 선댄스 영화제’를 표방하는 들꽃영화제는 일견 매치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10회 들꽃영화제의 개막작 <오픈 더 도어>는 장항준 감독이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 찍은 저예산 영화다. 들꽃영화제 출품 기준이 예산 10억 원 이하의 국내 개봉작인데, 장 감독의 이번 <오픈 더 도어>는 그 기준에 부합했다. 그렇다고 장 감독의 ‘유명세’ 때문에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다. 오동진 들꽃영화제 운영위원장은 장항준 감독을 이렇게 평가한다.
“장항준 감독은 대중적으로 늘 ‘의도된 가벼움’을 표방하는 바, 얼핏 그는 코미디 장르를 잘 만드는 사람처럼 오해받지만,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연출한 <기억의 밤>(2017)이나 각본을 쓴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감독 신정원, 2020)에서 더욱 다크하고 침울한 무언가를 담아 내려 한다. 스스로가 갖고 있는 개인의 이미지와 대중적 기대치, 그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원형과의 괴리가 꽤 큰 편인 인물이고, 자신도 그 점이 가장 큰 고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DNA가 코미디 장르보다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에 있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의 그 같은 존재 증명은 꽤나 값지게 보이며, 이번 독립영화 <오픈 더 도어>는 그가 국내 영화계의 장인(匠人)급 감독임을 보여 주는데 모자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항준 감독의 저예산 독립영화 <오픈 더 도어>는 일반 대중의 시선에서는 다소 비껴나 있는 작품이자, 어쩌면 전작인 <기억의 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인 셈. 스릴러 장르이며 인간 심리의 위악성을 다룬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제10회 들꽃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미국 뉴저지를 배경으로 한 <오픈 더 도어>는 미국 뉴저지 한인 교포 사회에서 끈끈하게 뿌리내린 한 이민자 가정의 어둡고도 슬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개막작 상영이 끝나고 오동진 운영위원장의 사회로 진행한 GV에는 장항준 감독과 영화 제작자로 첫걸음을 뗀 송은이 미디어랩시소 대표가 참여해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갔고, 기자와 영화평론가, 관객들의 열띤 질의응답이 한 시간가량 이어졌다. 제10회 들꽃영화제 개막식을 겸했던 GV 현장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왜 불현듯 작은 사이즈의 영화를 한번 해야겠다고 결심하셨나요?
상업영화 감독들이 가진 순익분기점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또 영화 한 편은 수많은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각각의 입장에서 충돌하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래서 가끔 생각했죠. 내가 진짜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요. 예를 들어서 이 장면에 딱 맞는 배우, 제가 진짜 원하는 배우는 A인데, 제작사 측에서 난감한 겁니다. A배우는 인지도 측면에서 너무 떨어져서 흥행이 어려울 거라는 거죠. 반면에 이미지가 맞지 않는 B배우는 티켓파워가 있으니 캐스팅이 되고요. 영화판에서 왕왕 발생하는 그런 부분들을 떨쳐버리고 싶었어요.
제목이 ‘오픈 더 도어’ 그러니까 ‘문을 열어라’는 건데요, 어떻게 지으신 건가요? 사실 그냥 ‘도어’라고 했어도 되었을 거 같기도 해요.
사실 첫 챕터 제목이었어요. 문을 여는 순간이 모든 것이 파멸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가 시작된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죠. 문이란 걸 통해 ‘선택’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면서 문을 수만 번, 수십만 번 열지도 몰라요. 그런데 특별한 문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죠.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픈 더 도어’라고 지었습니다. 그냥 ‘도어’라고 하면 너무 짧기도 해서요(웃음). 처음에 문을 여러 번 두드리는 장면에서는 그만큼 이 집은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이란 걸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오픈 더 도어>는 ‘존속살인’을 다룬 영화더라고요. 실제 있었던 일에서 모티브를 찾으신 건지, 아니면 100% 창작하신 건지 궁금해요.
이야기는 실제 교포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 당시 교민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했고, 설정의 변화를 조금 줬어요. 모티브를 삼은 실존 인물은 현재 종신형을 받고 복역 중이고요. 실제 사건들을 최대한 극적인 느낌을 주도록 영화에 녹이려고 했습니다.
영화를 다섯 장의 챕터로 나눴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플래시백 구조를 씁니다. 처음에 가장 무거운 이야기가 나오고,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역설적으로 밝아져요. 시간 배치 역시 챕터를 나누면서 의도적으로 뒤섞으신 건가요?
그렇죠. 어찌 보면 가장 비극적인 순간부터 역순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나 순수했던 사람이 그런 결과를 낳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구조를 짰어요. 그렇게나 끈끈하고 결속이 깊었던 사람, 가족들이 욕망 때문에 이렇게 역설적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마지막 챕터에서 인물들이 모두 카메라 밖으로 나가요. 대사만 나오죠. 그런데 카메라가 그들을 따라가지 않아요. 사실 못 가는 거죠. 그게 저는 또 하나의 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시간의 문’인 거죠. 그들이 좋았던 화양연화의 시절인 거죠.
이야기 구조를 짜는 데는 역시 장항준 감독님이 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구조를 잘 짤 수 있는 건가요?
그것은 김은희 작가의 배려와(웃음). 사실 저는 대학 다닐 때부터 영화를 하고 싶어 했잖아요.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상상을 많이 했어요. 그게 훈련이 된 거 같아요. 예를 들면 버스정류장에 어떤 아줌마가 있는데 가방이 불룩한 거예요. 그럼 전 상상을 하죠. 볼링공이 들었을까? 뭐가 들었지? 저게 사람 머리라면? 만약 저게 사람 머리라면 아줌마는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릴까? 간밤에 이 아줌마가 있던 공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것들을 상상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까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가장 무서운 대사가 “당신 나 사랑해?”라는 대사인 거 같습니다. 살인 교사를 암시하는 대사이니까요. 영화에서 구체적인 대사들이 이어졌으면 촌스러웠을 거 같은데, 그 대사 하나로 딱 모든 상황을 캐치하게 만드는 것이 장항준 감독이 가진 대사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여러 가지 대사를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우리가 친한 친구한테 사업을 같이 하자고 말할 때도 “너 나 믿어?”라고 하는 것처럼요. 제가 미국을 한 번밖에 못 가봤지만, 갱스터 사이에서도 중요한 것이 바로 우정과 믿음이라고 하더라고요. 불법적인 일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차용증도 있을 수 없고 서약서도 무의미한 상황에서 오직 그런 말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 대사를 썼어요.
저예산 영화로 제작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요?
한 챕터를 원씬원컷으로 찍는다거나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들이 많은데요. 그럴 경우에는 배우들이 더 해줘야 해요. 그런데 7회차로 영화를 찍다 보니, 배우들이 감정 이입하는 데 좀 어려웠어요. 어떤 사건이 터지려면 물론 단계가 필요한데, 그 호흡, 연기를 배우들이 보여주기까지 몰입하기까지 과정이 좀 힘들었던 거죠. 감정적으로 배우에게 시간을 줬어야 했는데, 그 부분은 좀 아쉽습니다.
<오픈 더 도어>는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많습니다. 집 외경과 집 내부, 세탁소도 다 미국에서 촬영한 건가요?
그렇죠. 미국 뉴저지가 배경입니다. 사실 미국식 가옥을 찾느라 고생했는데, 어렵게 찾은 곳도 막상 집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한국식 구조더라고요.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송은이 대표가 사재를 털어 세트를 지어줬습니다. 사실 촬영한 집 내부는 다 세트를 지었어요. 집 밖도 사실은 한국입니다. 일산 근교죠. 배우 중에서 미국에 간 사람은 없었고요, 한국에서 소스 촬영을 위해 저만 미국을 다녀왔습니다(웃음). 제작비 상당 부분이 세트 제작에 들어간 거죠.
재정 여건이 좋지 않았다면, 굳이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한국으로 설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무대를 한국으로 바꾸기만 하면 예산이 확 줄어드니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봤죠. 왜 모티브가 된 사건에 끌렸을까를요. 생각해보니 교민사회라는 폐쇄성이더라고요. 교민들을 만나보면 굉장히 가족적이고 의외로 보수적이에요. 미국 산다고 다 껌 씹고, 문신하는 게 아니라요(웃음).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끈끈해요. 그렇게 의지할 데 없는 다민족 국가에서 냉대와 차별을 뚫고 얼싸안고 살게 된 관계가 매력적이었던 거죠. 그건 한국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저예산이지만 포기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오픈 더 도어>는 뉴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식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의 허상에 대한 시선이 있는 작품인 거 같아요. 감독님은 궁극적으로 무얼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가족이라고 표현하셨듯이, 가장 견고하고 끈끈해 보이지만 가장 허술하고 가장 불안정한 사회구성원들이 모인 공동체가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쩔 수 없이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뭉쳐야 한다는 공동체라는 사실인데요. 사실 가족이 공동운명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묻지마 살인’보다 더 많은 게 ‘존속살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오늘 댁에 들어가시면 조심하십시오(웃음).
보통 거대담론을 바꾸면 사는 게 좀 좋아질 거라고들 생각하잖아요. 국가나 경제나 체제 같은 것들이죠. 그런데 감독님 영화는 그게 아니에요. 개인의 욕망, 생각을 바꾸기 힘들다고 보는 거 같아요.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저는 <오픈 더 도어>에서 욕망이란 것에 집중한 거 같아요. 사실 욕망과 파멸의 역사는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요?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욕망과 파멸의 역사가 반복되고 단 한 번도 전복된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여전히 반복해 왔고, 반복하고 있고, 또 반복할 거예요. 그게 국가든 대륙이든 종교든 심지어 가장 가까운 혈육 사이에서도 더욱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고요. 우리의 본성 안에 <오픈 더 도어>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욕망이 있고, 경제적 파멸이 있고, 두려움에 어던 사람은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하는 거죠.
장항준 감독님은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고, 또 본인이 너무 밝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사회비판적이며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중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작품 세계에서 괴리감을 느끼나요?
그런 괴리감은 저도 가끔 느낍니다. 제가 2011년에 <사인>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는데요. 그걸 제가 했다는 걸 안 사람들이 굉장히 놀라더라고요. (드라마계에서) 장르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이 로맨틱 코미디가 넘쳐나던 시절이었거든요. 또 <기억의 밤> 때도 관객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죠. <오픈 더 도어>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느 정도 조금 인간의 욕망, 심연에 있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매일 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요. 자장면이나 이태리 음식도 가끔 먹어야죠. 영화로서의 잡식성이라고 할까요? 저는 영화계의 대표적인 ‘김밥천국’ 같은 감독입니다(웃음).
<오픈 더 도어>에서 본연의 어두운 이야기를 하셨어요. 코미디는 다시 하실 건가요?
얼마 전에 <리바운드>가 개봉했고요. 9월쯤 단편을 하나 찍을 예정이에요. <구마사제>(가제)라는 영화인데 코미디입니다. 돈 때문에 퇴마의식을 행하는 파문당한 신부의 이야기죠. 각색 작업 중입니다.
본업인 영화감독으로 칸 영화제 욕심은 없나요?
많이들 칸 영화제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제 꿈은 10년 후에도 현장에 있는 겁니다. 벌써 저도 50대 중반이에요. 10년 후 어느 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갔을 때, 제가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