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엄정화 노래를 꼽으라”라는 질문으로 대답하는 사람의 나이대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7-80년대생은 ‘Poison’이나 ‘초대’, 90년대생은 ‘D.I.S.C.O’, 00년대생은 환불원정대의 ‘DON’T TOUCH ME’.
세대에 따라, 각자가 기억하는 엄정화의 대표적인 모습이 다르다는 것은 엄정화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항상, 그리고 꾸준히 활동해왔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가수로서의 엄정화 못지않게, 배우로서의 엄정화 역시 그렇다. 배우 엄정화는 1992년 영화 <결혼 이야기>의 단역으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아왔다. 한편, 엄정화가 주연을 맡은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12회 기준 시청률 18.5%를 경신하며 그야말로 최근 한창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수의 이미지로, 또 누군가에게는 배우의 이미지로. 엄정화를 지칭하는 말로 ‘멀티 엔터테이너’라는 표현이 이보다 적합할 수 없다. 아이유·수지·이승기 등 가수와 배우의 겸업이 흔해진 현재, 엄정화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시작을 알린 스타라고 봐도 무방하다. 엄정화는 영화 <해운대>로 천만 배우 반열에 이르렀으며, 스크린부터 브라운관까지를 모두 섭렵한 스타다.
“마녀가 어때서? 남한테 의존하고, 민폐 끼치는 백설공주보다 자주독립적인 마녀가 백 배는 낫지.”
엄정화가 배우 박서준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tvN 드라마 <마녀의 연애>(2014) 대사의 일부다. 어쩌면 엄정화의 장장 30년에 걸친 활동을 집약하는 말이 아닐까. 엄정화는 일부에선 질타가 있을지언정, 오랜 세월 줄곧 음반과 연기를 동시에 병행하며 독립적으로 새로운 길을 닦아왔다.
20년 차 가정주부에서 1년 차 레지던트가 된 <닥터 차정숙>의 차정숙도 그렇듯, 엄정화는 유난히도 여성 캐릭터가 서사를 이끄는 작품에 빈번하게 출연해왔다. 이는 솔로 가수로, 또 배우로, 오롯이 주체로서 활동해왔던 엄정화 본인의 서사와도 꼭 들어맞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된 작품이자 엄정화가 주연을 맡은 작품을 모아봤다.
엄정화의 최애캐, ‘사이다’같은 싱글 여성! <싱글즈>(2003)
엄정화는 최근 본인의 유튜브에서 ‘내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로 영화 <싱글즈>의 ‘동미’를 꼽았다.
영화 <싱글즈>에서 엄정화가 연기한 동미는 자신을 성희롱하는 상사에게 통쾌한 ‘사이다’를 날리고,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고, 욕구에 솔직한 29세 싱글 여성이다. 그러던 중, 동미는 임신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기를 낳을 결심을 하게 된다.
엄정화는 “그때는 동미와 같은 독립적인 결정을 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내가 서른 즈음 이 작품을 찍었다. 그때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 (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는 동미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결단력, 용기, 당당함이 있다. 그래서 <싱글즈>의 동미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관객들도 많았다”라고 동미를 사랑하는 이유를 밝혔다.
평범한 주부에서 걸그룹 멤버로! <댄싱퀸>(2012)
환불원정대 이전에도, 엄정화가 걸그룹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엄정화는 영화 <댄싱퀸>에서 본인 이름과 동일한 ‘엄정화’ 역으로 출연해, 왕년의 ‘신촌 마돈나’가 ‘댄싱퀸즈’라는 걸그룹을 결성하는 이야기를 그려내며 열연을 펼쳤다.
황정민과 엄정화는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이어 <댄싱퀸>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실제로, <댄싱퀸>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황정민과 엄정화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엄정화가 아니면 누가 소화할까 싶은 ‘신촌 마돈나’ 역할. <닥터 차정숙>의 차정숙도 그랬듯, <댄싱퀸>의 엄정화 역시 평범한 아이 엄마였다가 뒤늦게 꿈을 이루는 인물이다.
중년 여성의 현실적인 이야기, <관능의 법칙>(2014)
실제로도 비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던 엄정화. 엄정화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단 한 번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엄정화는 공교롭게도 싱글 여성 역할을 여러 번 맡았다.
영화 <관능의 법칙>은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싱글즈> 연출을 맡았던 권칠인 감독은 11년 후, <관능의 법칙>에서 다시 한번 엄정화를 주연으로 발탁했다. 서른을 앞둔 싱글들의 이야기를 다룬 <싱글즈>처럼, <관능의 법칙>역시 4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 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엄정화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관능의 법칙>에 대해 “왜 여성은 나이를 먹으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가는 것인가. 그 부분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엄정화는 “<관능의 법칙> 속 신혜는 <싱글즈> 동미의 10년 후쯤 모습이 되겠다”면서 “지금 상상해 봐도, 동미라면 신혜처럼 돼 있을 것 같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동미와 신혜 모두,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상을 그려낸 캐릭터다.
한편, <관능의 법칙>은 엄정화 외에도 문소리, 조민수가 주연으로 출연해 많은 화제가 되었다. 연기력으로 손꼽히는 배우들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인 만큼, 찰떡같이 척척 맞는 세 배우의 호흡을 감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양자경 못지않은 액션 연기! <오케이 마담>(2020)
엄정화는 영화 <오케이 마담>에서 액션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오케이 마담>은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난데없이 비행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부부(엄정화, 박성웅)가 평범했던 과거는 접어두고 숨겨왔던 내공으로 구출 작전을 펼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아냈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오케이 마담>은 양자경 주연의 영화 <예스 마담>을 오마주 했다. 여성이 주연인 액션 영화가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엄정화는 <오케이 마담>에서 양자경 스타일의 강도 높은 액션으로 관객들에게 시원하고 통쾌한 한 방을 날렸다.
실제로 엄정화는 항상 액션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고 한다. <오케이 마담> 대본을 읽고도, 액션 분량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액션 연기에 진심인 엄정화. 사실, 그는 <오케이 마담>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의 캐스팅이 다 완료되기 전부터 액션 스쿨에 다녔다고. 50대에 도전한 첫 액션 연기지만, 엄정화는 훈련하는 시간을 굉장히 즐겼다고 밝혔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