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의 의미
“저는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때, 머릿결과 구두를 보거든요.” 쿠팡플레이 시리즈 <안나>에서 주인공이 가짜 부모에게 상류층에 걸맞는 스타일링을 요구하며 건네는 이 대사를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이렇게 바꾼다. "저는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때, '미간 주름'을 보거든요."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는 뷰티업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미간을 찌푸릴 때 잡히는 주름을 의미한다. 프롤로그에서 남성 모델 칼(해리스 디킨슨)이 브랜드 오디션을 보러 간 현장에서 관계자는 '슬픔의 삼각형'을 펴보라고 한다. 칼의 미간 주름은 그렇게 잠깐, 지시에 따라 미소와 사라진다. 하지만 깊이 패인 '슬픔의 삼각형'은 여러 해 퇴적된 인생의 굴곡에 다름없다. 주름이란 놈은 불가역적이라 그것을 무표정 뒤로 가리고 보톡스로 펴보아도 금세 도드라질 뿐이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절대 안 넘는” <기생충>의 노련한 기택(송강호)조차도 감출 수 없었던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가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주름이 된다. 가진 자가 드러내는 하층민을 향한 극도의 경멸감은 행주 냄새로, 그리고 미간 주름으로 그 모습을 달리한다. 이렇게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미간에 새겨진 삼각 주름'을 계급 피라미드라는 또 다른 삼각형으로 병치시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슬픔의 삼각형'이 상기시키는 계층 피라미드
영화는 잘나가는 인플루언서이자 모델 야야(샬비 딘)와 그의 연인인 칼(해리스 디킨슨)에게 벌어지는 일을 3부에 걸쳐 따라간다. 1부는 모델계를 조명하며 일반적인 권력관계가 역전된 계급사회를 비춘다. 칼은 톱 모델인 여자친구 야야에게 기대어 협찬을 통해 부자의 삶을 맛보지만, 그는 '슬픔의 삼각형'이 깊게 패인, 업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한낱 가난한 모델일 뿐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3배 이상 돈을 잘 버는 패션모델의 세계에서도, 야야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항상 '을'이다.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데이트 비용 문제로 증폭된다. 칼은 돈은 훨씬 많이 벌면서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길 바라는 야야의 은근한 강요가 달갑지 않다. 야야는 야야대로 언제 은퇴할지 모를 불안정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 안전하게 살고 싶은데, 자신에게 기생하는 듯한 칼은 적임자가 아닌 것 같아 불만이다. 이에 칼은 자신이 성공할 테니 걱정 말라고 야야를 다독이지만, 실상 그는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에 가깝다. '돈 이야기는 섹시하지 않아'라며 회피하려는 야야와 싸움 끝에 데이트 비용의 일부인 50유로를 건네는 야야에게 '돈이 문제가 아니야!'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폭발하는 칼의 모습은 돈은 무척이나 섹시하며, 그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 그 자체임을 역설할 뿐이다.
최고의 구토 시퀀스!
칼과 야야가 초호화 크루즈에 오르며 2부는 시작된다. 협찬으로 크루즈에 승선하게 된 둘은 일종의 경계인이자 관찰자다. 그들은 유색인종인 배의 청소부, 백인 승무원, 그리고 슈퍼 리치를 비추며 계층 간 충돌과 마찰음을 전달한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똥을 팔아요'라고 말하는 비료사업가 드미트리(즐라트고 버릭)와 서빙하는 승무원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해야 하니 내가 누리는 것을 너도 누리면 좋겠다 말하는 그의 아내 베라(수니 멜레스)는 얼핏 천진하고 관대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해갈되지 않으면 즉시 민낯을 드러낸다. 베라가 수영을 권하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승무원에게 “감히 내 말을 거절해?”라며 윗선을 통해 전 승무원에게 강제로 수영을 시키는 장면은 그 어떤 폭력장면보다 섬찟하다.
이런 자본가들의 위선이 거센 풍랑으로 드라마틱하게 폭로된다. 선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캐비어와 송로버섯을 즐기던 승객들은 서서히 뱃멀미를 느끼지만, 멀미를 할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승무원들의 강권에 음식을 구겨 넣는다. 파국을 앞 두고도 멈출 줄 모르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은유다. 파티가 절정에 다다르며 자본가들은 마침내 먹은 음식을 분수처럼 게워내고 미끌거리는 토사물 위를 돼지마냥 구른다. 변기까지 역류하며 크루즈는 흡사 거대한 똥통으로 변한다. 15분간 이어지는 이 불편하고 역겨운 구토 시퀀스는 편집에만 6개월 정도가 걸렸다고. 그 어떤 영화의 구토신보다 더 잘 묘사해 내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은 이뤄진 듯하다.
뒤집어진 '삼각형'
폭풍이 지나간 후, 해적선의 습격으로 배가 침몰하며 마지막 3부가 시작된다. 무인도에 표류한 8명은 권력과 계급에 대한 새로운 실험체가 되는데, 감독은 여성과 남성, 부자와 빈자, 유색인종과 백인 등의 상황을 역전시켜 욕망의 단순한 민낯을 들춘다.
원시로 돌아간 듯한 섬에선 먹을 것과 성은 중요한 자산이자 권력이며 흥정 수단이 된다. 생선을 잡고, 불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이 급부상하며, 필리핀 출신 여성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계층의 최하단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던 애비게일이 기존 위계질서를 뒤집고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서 일종의 모계사회를 구축하는 장면은 묘한 통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피라미드를 뒤집으면 역피라미드가 되지 않고, 또 다른 피라미드가 될 뿐이다. 먹을 것이 곧 자본인 이곳에서 애비게일은 자본가들 못지않은 계급 구축 스킬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장악하고, 칼에게 성적인 서비스까지 요구한다. 그렇게 야야-칼-애비게일로 이뤄진 '슬픔의 삼각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필터 없는 직설적이고 일차원적인 조롱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인만큼 어려운 예술영화 아니냐고? 걱정하지 말자. <슬픔의 삼각형>의 원제는 "Sans Filtre". 직역하면 '필터 없이'라는 뜻인데, 영화는 제목에 충실하게 초부유층에 대한 여과 없는 조롱을 노골적으로 쏟아낸다. 계급에 대한 풍자도 일차원적이고 레퍼런스도 낯익다. 계급을 묘사하는 방법은 <기생충>(2019)을 떠올리게 하고, 표류 시나리오는 리나 베르트뮬러 감독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부터 미드 <로스트>, 영국 희곡 「훌륭한 크라이턴」 등 여러 장르에서 이미 익숙하게 봤던 전개다. 이 식상함을 호화롭고 과잉된 이미지로 보완하는 것도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
거센 풍랑으로 배가 요동치며, 승객이 토사물을 쏟아내는 와중에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는 '똥 팔이' 러시아 비료 재벌과 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대립시키는 한 편의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특이하게 미국과 유럽의 제3세계 수탈이라는 위선을 고발하는 쪽이 미국 출신 호화 유람선 선장이며, 자본주의 질서를 찬양하는 것이 구소련 출신 비료 재벌이다. 이 둘의 대화는 현대 서구 사상사 논쟁을 풍자한다. 레이건과 마크 트웨인, 마거릿 대처와 케네디의 어록을 인용하며 격발되는 둘의 대화는 의미심장해 보이지만, 실상 별 의미가 없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영화가 개연성이 적은 ‘선장’을 돌출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선장'은 결국 감독 자신과 지식인을 표상하는 듯하다.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말을 빌려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인터내셔널가를 삶의 배경 음악 삼고, '촘스키'의 책을 읽으며 자신이 누리고 있는 환경을 성찰할 줄 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몰락하는 세계를 응시할 뿐 자기 존재를 부정하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는 없다. 술에 전 그는 무력하기에 냉소한다.
영화는 계급 뒤집기와 오물 투척이라는 충격 요법으로 무력감에 휩싸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 묻는듯하다. 깊게 패인 '슬픔의 삼각형'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회에 머물 것인지, '사랑에 대한 열망과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지. 각자의 답은 어쩌면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갈릴 것이다.
*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는데 하나는 사랑에 대한 열망이고, 둘은 지식에 대한 탐구이며, 셋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좌우명으로 그를 존경했던 이 시대의 양심이자 행동하는 지식인 촘스키가 그의 연구실에 걸어두어 더 유명해졌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