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미국에선 오컬트 붐이 일었었다. 오컬트는 여러 가지 문화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현상이지만, 서양의 주류 문화에선 대체로 중세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비과학적 주술 취급을 받는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다. 유럽의 백인들이 넘어와 인디언 등 토착 원주민들의 문화와 충돌하다가 결국엔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게 미국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왜 악마에게 유혹되는가

하지만 합리와 이성의 밑바닥엔 늘 비합리와 비이성이라 치부되는 원초적 문화의 힘이 용암처럼 꿈틀댄다. 오컬트 붐은 그것의 한 양상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드러난 이성의 광기를 목도하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마적이고도 비밀스러운 욕망과 힘에 대한 각성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악마의 분탕질을 쳐대는 문명의 반대급부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선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악은 그 자체 하나의 역설이자 거대한 모순이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같은 근원적 물음이 휘황찬란하게 건설된 문명의 뒷골목을 탐사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그것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되었다.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마리의 아기>(악마의 씨, 1968)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끔하게 단장된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악마의 주술은 사람들에게 내재한 근원적 공포를 자극했다. 혹시 인간은 인간 자체가 양을 탈을 쓴 악마이거나 괴물이 아닐까. 인간은 겉으로 정제되어 드러나는 도덕과 윤리의 가면으로 짐승보다 더한 패악질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닐까. 질문이거나 의문이거나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찌르는 각성의 조각일 뿐 답은 없다. 다만,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규정지어놓은 논리와 이성의 틀 안에선 포착하지 못할 보다 원시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만 아직 유효할 뿐이다.

알란 파커 감독의 <엔젤 하트>(1987)는 그러한 가설을 충격적으로 제기한 영화였다. 소위 오컬트 스릴러라 불릴 만한 작품인데, 개봉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섬뜩하고 악랄한 설정들이 오싹하다. 리메이크될 거라는 소문도 오래전부터 떠돌았으나 아직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윌리엄 홀츠버그가 1978년 발표한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의 제목은 「폴링 엔젤」이다. ‘타락한 천사’.


타락한 천사는 흉측하다, 아니 안쓰럽다

주인공 이름은 해럴드 엔젤이다. 줄여서 해리라 자주 불린다. 외모 최절정기에 달했던(이후 그는 말 그대로 ‘폴링’하여 괴물처럼 변한다) 미키 루크는 정통 미국식 하드보일드한 탐정과 자신도 가늠하지 못하는 운명에 처참하게 희생되는 무기력한 자아를 서늘하게 연기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부인 루이스 사이퍼 역의 로버트 드 니로. 고딕풍의 아우라를 으스스하게 풍기는 그는 흡혈하는 장면 전혀 없이도 한 사람의 영혼을 은밀하게 빨아먹는 흡혈귀의 존재감을 밀도 높게 표현한다. 두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두 시간 동안 보는 이를 이 세계가 숨겨놓은 비밀의 장소로 끌고 간다. 그곳은 억눌린 본성과 파괴 충동이 표일하게 서식하는 자아의 또 다른 은신처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원작 소설에 대해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생각해 보라. 이 소설이 딱 그렇다”고 말했다. 여지없이 적확한 평가다. 영화를 보면서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화자 필립 말로우가 귀신에게 홀려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귀신’은 과연 누구인가. 워낙 유명한 영화라 줄거리를 요약하진 않겠다. 스릴러 장르인 만큼 아직 보지 않은 이들에게 스포일러를 뿌리고 싶지 않다. 그저 어떤 상처투성이인 사람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지는 내용이라고만 얘기하겠다. ‘귀신’은 바로 그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살짝 덧붙이겠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생각해 보라!”

루이스 사이퍼는 사람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혹은 흔히 사람이라 불리는 존재가 사람인 척하면서 숨겨놓은 모든 사람의 이면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루이스 사이퍼(Louis Cyphre). 첫 만남에 해리가 그의 이름을 ‘루이스 사이피에’라는 식으로 잘못 발음한다. 손가락을 가로저으며 사이퍼가 교정한다. “내 이름은 사이퍼요.” 루시퍼(Lucifer). 악마를 뜻한다. 악마가 인간의 이름을 가장한 것이다.

영화는 폭력과 연쇄살인, 부두교, 정신적 외상과 그로 인한 기억 상실 등을 모티프로 전개된다. 해리라는 이름에서 이른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떠올리는 건 작위적일까. 작가가 캐릭터의 이름을 짓는 건 때로 임의적이거나 우연일 수 있으나, 고도로 계산된 작의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과잉 추측만은 아닐 것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흔히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정신 장애다. 2차 대전 참전용사였던 해리는 전역 후 12년 정도(1955년이 배경이다)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그가 루이스 사이퍼에게 청탁 받은 임무는 정체가 묘연해진 왕년의 인기 가수 자니 페이보릿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이다. 모든 설정이 존재와 사라짐, 낯섦과 낯익음의 교차와 연관돼 있다. 권총이나 신분증, 병원 기록 등마저 모종의 비밀을 암시하는 부적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 까닭이다. 그리고 나중엔 엄청난 비밀이 드러난다. 근친상간과 관련된,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가 이 영화를 오마주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닌 것으로 안다.


이게 정말 뉴욕이라고?

뉴욕이 배경이다. 그런데, 뉴욕이 뉴욕 같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에 나타난 뉴욕의 모습이 진짜 뉴욕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시종일관 눈이 내려 질척하고 음습하고 어둡고 칙칙하고 지저분하다. 전 세계 패션과 예술의 메카로서의 뉴욕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뭔가에 홀린 듯 광신적이고, 어딘가 병들어 있고, 그 병을 감추려 거짓 친절에 휘둘리는 허깨비들 같아 보인다. 자주 등장하는 바이블이 싸구려 외설 잡지처럼 여겨질 정도다. 해리가 루이스 사이퍼를 처음 만나는 장소는 종교 단체가 집회하는 곳이다. 열변을 토하는 흑인 목사의 모습은 당시 유행했던 재즈 가수의 도발적인 쇼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켠엔 피범벅 된 살인 현장이 있다. 다들 죽자고 살고, 살려고 서로를 죽이는 듯한 풍경. 광기는 은밀하고도 전면적이다. 모두 멀쩡한 듯하지만 모두 미쳐 있다. 그 안에서 해리는 그 자신인 동시에 다른 이의 분신이다. 또는 자신 안에 숨은 진짜 자신에게 홀려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루이스 사이퍼는 일종의 저승사자이자, 악의 전도사이다. 그래서 그는 더 솔직하고 근원적이다.

루이 사이퍼는 손톱을 길게 기른 채 늘 요사한 정장을 하고 나타난다. 척 봐도 이상한 사람이라 외려 영화 속에선 가장 건강(?)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명석해 보인다. 해리와의 두 번째 만남 장면. 어느 허름한 식당이다. 루이스 사이퍼 앞에 새하얀 삶은 달걀이 접시에 담겨 있다. 첫 조사 이후 자신이 찾아갔던 의사가 자살한 장면을 목격한 해리가 일을 반려하겠다고 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루이스 사이퍼가 느긋하게 손톱으로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기며 일당을 높여주겠다고 말한다. 엄청난 거액이다. 이때,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이다. 그렇다면 해리는 파우스트인가. 아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는 오르페우스나 오이디푸스에 가까워 보인다.


악마의 덫에서 당신은 이제 못 벗어난다!

해리는 이미 루이가 던진 덫에 걸려들었다. 출구는 없다. 그는 루이의 손톱 끝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달걀과도 같다. 해리는 루이의 입속으로 부드럽게 삼켜진다.

해리는 이미 루이가 던진 덫에 걸려들었다. 출구는 없다. 그는 루이스의 손톱 끝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달걀과도 같다. 해리는 루이스의 입속으로 부드럽게 삼켜진다. 루이스는 맛깔나게 입맛을 다시고, 해리는 루이그의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악마의 주술에서 이제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어두운 비밀들이 까발려진다. 해리는 해리가 아니다. 루이스는 사람이 아니다. 루이스는 악마이고 해리는 악마의 씨거나 악마의 숙주였던 것. 꼭 보라. 여전히 자신이 선하다 철석같이 믿는 모든 불쌍한 악마의 종들에게 비린내 나는 자신의 속살을 떠먹여줄 수도 있을 테니. 삶은 달걀은 부드럽다. 그러나 그걸 먹고 뀌는 방귀 냄새는 어떻던가. 농담 같은가.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