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SF를 표방하며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정이>(2023)는 자막이 떠오르는 오프닝부터 희망과도 같은 일출을 보며 엔딩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적당한 답과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먼 미래,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어 지구에서는 인간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우주로 쉘터를 쏘아 올라 삶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거기서도 권력투쟁으로 인해 몇 십 년짜리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욕망을 피해 달아난 곳에서도 그 짓을 계속한다는 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말은 얼마나 타당한가.
연출자인 연상호 감독은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에서 차가운 아스팔트 보다 더 차가운 육신에 대한 묘사를 하거나, <사이비>(2013)에서는 천국을 믿는 자를 미친 사람으로 몰았으며, 드라마 <지옥>(2021)에서는 인간이 만든 체계 자체를 부정하며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든다. 그러나 <부산행>(2016)이나 <지옥>의 4화 에피소드 등을 보면 이에 대해 사람이 보여야 할 모습은, 인간 혹은 가족 서로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이> 또한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상의 세계관을 이어가는 동시에 관계에서 인간적인 어떤 모습을 찾으려 노력한다.
정이(김현주 분)는 현재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최강 용병 출신인 그녀의 뇌는 유족들에게 금전을 나누어주는 대가로 대기업에 종속되고 복제되어 또다시 용병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실험 단계를 거친다. 흥미로운 것은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팀장이 그녀의 딸인 서현(강수연 분)이라는 것. 서현은 자신이 23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하며 육성해온 정이에게 딸 같은 마음과, 동시에 엄마의 모성애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살상해야 하는 용병 이외에도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등의 더러운 꼴 또한 보게 된다. 와중에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상훈(류경수 분)은 무례한데다 제멋대로 이어가는 프로젝트 플랜 때문에 서현은 더욱 절망에 빠진다. 게다가 썩어 문드러진 개그 감각이라니.
인간의 요건
상훈은 왜 유머에 그렇게 몰두할까? 심지어 자신의 (육체적) 정체가 밝혀졌을 때 가장 먼저 내뱉는 말도 '이거 유머야?'였다. 그리고 서현이 음악을 듣고 있을 땐 그것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임을 알아보고, 노을을 보며 경탄할 줄 알며, 맛 좋은 커피를 즐길 줄 알며, 비록 쓰레기 같은 레벨이지만 유머도 구사한다. 애초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요소가 있다. 유머, 예술적인 지각,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등이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존재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하지만 상훈은 인간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대부분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체는 안드로이드였다.
여기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등장한다. 육체를 비롯하여 흔히 말하는 인간이기 위한 요건을 갖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가? 상훈은 요건을 갖췄다. 그러나 이 영화를 감상한 다음에도 그를 인간적인 존재라고 여긴다면 핀트가 나간 셈이 된다. 그렇다면 휴머노이드라는 육신의 형체에 인간의 요건을 집어넣기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될까?
연출자의 의도에 약간 더 다가가보자. 서현에게 있어서 한 세계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엄마는 실물 인간의 형태다. 그런데 식물인간의 윤정이는 딸에게 있어서 엄마가 아니다. 비록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서 있도록 당시에 큰 수술을 받게 해준 사실을 기억하는 엄마, 나아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안드로이드로서의 정이가 서현에게는 실제 엄마인 것이다.
즉, 안드로이드에 인간의 요소만을 갖췄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요건들이 소거되고 현세에 존재하는 육신만이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서현에게 진짜 인간은 자신에게 딸 같은 존재이자, 엄마의 뇌 정보를 지닌 인공지능 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대로 카피된 여러 대의 정이의 휴머노이드 중에서도 서현과 일차원적으로 연결된 정이만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이의 '마음'에 가까운 어떤 것을 빼내어 아직 스킨이 씌워지지 않은 로봇으로 옮겨가는 것은 서현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서현에게 있어 인간임을 정의하는 요소들 덕분에 '정이의 뇌와 결합한 새로운 육신으로써의 로봇'은 그녀에게 딸이자 엄마 같은 존재가 된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완성되는 어떠한 경지라고까지 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의 연출 의도를 빌리자면, 인간성은 인간의 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인간성이란 몸 안이 아닌 무수히 많은 관계 속 어딘가쯤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가정하면, 형성되는 관계 만으로도 인간성은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도 가능하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생물이냐 혹은 무생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답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홀로가 아닌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 이러한 연출의 생각을 엿보았을 때 알 수 있는 인간의 정의는, 결국 인간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욕망과 떨어질 수 없는 윤리
'보이지 않는 주먹'을 제창하며 경제분야의 슈퍼스타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다. 그는 본디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인 감성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한다. 인간이란 곧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적 존재에게는 도덕적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기심은 본능이기 때문에 다스려질 수 없으니, 이를 발전시켜 자본주의라고 하는 개념까지 끌고 간 것이다. 비록 인간에 대한 그의 이론은 칼 마르크스에 의해 무너지긴 했으나 그의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는 인간을 끝까지 믿는다. 결국 그렇게 정화될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의 1할
심리학도들이 현타(‘현실 자각 타임’을 줄여 이르는 말로,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를 느낄 때가 있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결국 화학물질로부터 지배받아 각종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화학 공부를 시작하면 많이들 포기한다.) 그들은 심적 변화란 결국 뇌의 명령을 받은 갑상선과 내분비샘에서 온다고 한다. 즉, 기관이 호르몬을 내뿜는 판단과 그 대응이 '마음'을 설명하는 9할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1할은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영혼일 수도 있고,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숙고해 보자. 당신에게 그 1할은 무엇인가?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