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램록은 1970년 영국을 중심으로 붐을 일으켰다. 장르라기보다는 비틀스와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이 영국을 넘어 미국까지 ‘침공’(브리티시 인베이전)한 직후 나타난 일종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짙은 화장을 한 남성 뮤지션들이 화려한 색감의 요란한 의상을 입고 부기우기와 로큰롤이 결합된 사운드를 바탕으로 당시로선 기묘한 주제를 노래했다. 동성애(혹은 양성애)와 마약, 외계인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중심에 2016년 새해 벽두에 사망한 데이비드 보위가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가 없는 데이비드 보위에 관한 영화
토드 헤인즈 감독의 <벨벳 골드마인>(1998)은 데이비드 보위의 젊은 시절 전성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열풍을 일으켰던 글램록 스타들의 노래들이 배경에 깔리지만, 정작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는 한 곡도 나오지 않는다. 제작 당시, 데이비드 보위는 이 영화에 난색을 표했다.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왜곡과 과장으로 일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보위는 자신의 노래를 인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보위와 절친했던 동료들의 대표곡들 대부분이 원곡 그대로, 혹은 제작 당시 활동하던 밴드들의 연주로 영화 속에 재생된다.
주연을 맡은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이완 맥그리거가 직접 부른 곡도 다수다. 이기 팝, 루 리드, 티렉스. 록시 뮤직, 슬레이드 등의 노래들이 현란한 모자이크처럼 귓전을 줄곧 때린다. 세련되게 편집된 뮤직비디오 같기도, 어떤 비밀스러운 인물의 일생에 대한 페이크 다큐처럼도 여겨진다.
영화는 1854년에 태어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란한 의상과 현란한 입담, 날카로운 풍자와 아스트랄한 미의식으로 영국을 넘어 미국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그는 가히 록스타의 원조라 불릴만하다. 파리 ‘페르 라셰즈’에 안장된 그의 무덤은 지금도 꽃다발과 여러 국가의 언어로 쓰인 헌정 문구와 키스 마크로 점철된 유리막에 둘러싸여 있다. 미의 개념, 그리고 삶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촌철살인을 통해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한 그는 그 자신이 커다란 이미지가 된 사람이다. 동성 애인이었던 젊은 남성의 고발로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말년의 불운은 외려 그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질 좋은 화분으로 여겨질 정도다. <벨벳 골드마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삶에 오스카 와일드의 세계관을 이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 백 년 후 록스타로 소환되다
1960년대 후반, 짙은 메이크업을 한 채 뚱딴지같은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브라이언 슬레이드(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라는 남자가 영국 팝계에 나타난다. 대중들은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다. 그러다가 영악하고 기민한 프로듀서 제리의 눈에 들어온다. 제리는 이 괴상한 미운오리를 순식간에 백조로 환생시킨다. 영국 팝계가 뒤집어지고 미국까지 진출한다. 미국에서 브라이언은 자학과 냉소로 무장한 록싱어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에게 매혹된다. 브라이언은 제리를 설득시켜 마약에 찌들어 폐인이 되다시피 한 커트의 갱생을 돕는다. 브라이언과 커트는 결국 사랑에 빠진다. 브라이언에게는 맨디(토니 콜렛)라는 아내도 있는 상태. 마약에 찌들어 동성과 양성을 넘나드는 난교 파티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 브라이언이 공연 중 암살당한다. 대중들은 이 엄청난 사건에 경악한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내막이 밝혀진다. 실제로 암살당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설정된 쇼였던 거다.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브라이언은 사라진다.
10년 후, 뉴욕 헤럴드 기자 아서 스튜어트(크리스찬 베일)가 브라이언의 행방을 추적하려 영국으로 날아온다. 아서는 브라이언의 광팬이었다. 영화는 아서가 브라이언을 추적하며 과거 지인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면서 글램록 ‘빠돌이’였던 아서의 어린 시절이 브라이언, 커트 등의 삶과 교차되면서 당시 글램록 열풍의 허와 실을 성찰한다. 198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브라이언과 커트는 이제 대중들에게 잊혔다.
“삶은 이미지다!”
본인들의 의지이기도, 세상의 변화에 휩쓸린 탓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씁쓸하기도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브라이언은 화려하고 순수해 보였던 꽃이 세상의 요란한 조작을 통해 가공된 조화(造花)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브라이언은 전성기 시절 “삶은 이미지다”라고 밝힌 적 있다.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록스타의 삶,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암살쇼, 또 그리고 영락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10년 후의 삶. 진실은 애초에 없거나 꾸며지거나 변질된다. 브라이언은 그것을 깨닫고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역시 조작이지만, 거대한 미디어의 장삿속과 대중의 무지한 환상을 버무려 만들어진 조작된 삶을 뒤집는 건 또 다른 조작밖에 더 있겠는가. 브라이언은 토미 스톤이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느끼한 ‘중년 가수’가 되어 있다.
데이비드 보위가 왜 이 영화에 난색을 표했는지 이해할 만하다. 1998년이면 보위가 여전히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전개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렵이다. 그는 시쳇말로 ‘변신의 귀재’였다. 포크록과 로큰롤에서 시작해 글램록, 디스코, 일렉트로닉, 월드 뮤직 등 그가 섭렵하지 않은 음악이 거의 없을 정도다. 1970년대 초반의 글램록커 시절은 그가 스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특정한 이미지 혹은 특정한 스타일 안에 가둬두지 않았다. 그건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보위가 패션계에 일조한 몫은 실로 지대하다. “대중음악의 피카소”라는 표현이 과장만은 아닐 정도다.
<벨벳 골드마인>은 보위가 1972년 발표한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지기 스타더스트의 흥망성쇠)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제목도 그 앨범의 수록곡에서 따왔다. (하지만 전술했다시피 영화에서 보위의 곡은 누구에 의해서도 불리지 않는다) 보위의 출세작이지만, 그는 그 앨범 한 장, 그리고 그 스타일로만 자신이 한정되기를 원치 않았다. 더욱이 영화는 보위의 실제 사생활로 오인 혹은 호도될만한 내용들도 상당하다. 다만, 그와 절친했던 이기 팝, 루 리드 등과의 사연이 커트에게 빙의되다시피 인용된다. 그들뿐 아니라 커트에게선 짐 모리슨과 1990년대 벽두에 록 음악의 애티튜드를 혁명적으로 뒤집어엎은 커트 코베인의 그림자도 느낄 수 있다.
변하고 변하니, 안 변하는 것이 곧 죽음이다
‘지기 스타더스트의 흥망성쇠’. 지기 스타더스트는 당시 데이비드 보위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자신의 페르소나 혹은 캐릭터였다. 영화에선 물리학에서 따온 ‘맥스웰 데몬’이라 지칭된다. 변화와 관련한 용어다. 변화는 자의적이기도 수동적이기도 하다. 삶은 계속 흐르면서 변화한다. 유행도 환희도, 비극도 코미디도 무시로 흐르면서 사라졌다가 반복되기를 거듭한다. 그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꽃이 피거나 피를 흘리거나 우주를 깨닫거나 지옥을 경험하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순간 자체로 영원하다. 잊히거나 되새겨지는 것도 마찬가지. 본질은 그대로이되 화장술만 바뀌고, 화장을 지우고 나면 문득 나 자신이 낯설거나 이물스러워질 때가 있다.
브라이언이 브라이언이던 시절, 개화 직전의 꽃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부르는 뮤직비디오를 촬영한다. 설정된 캐릭터와 우스꽝스럽고도 화려하기도 한 세트 안에서 브라이언의 목소리와 숨결에 의해 꽃잎이 활짝 열린다. 그 꽃은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버려졌든 누군가의 꽃병에 꽂혔던 결국 시들었을 것이다. 시든 꽃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꽃이 그러하듯 눅눅한 자연의 폐기물이 되어 다시 흙이 되고 물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흙과 물이 또다시 누군가를 꽃피워 세상 한 모서리를 빛내다가 다시 또 다른 무언가로 변할 것이다.
‘벨벳의 노다지’라. 그건 세상 안에도 세상 밖에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현듯 세상 한가운데 나타나 누군가를 홀리고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또 누군가를 슬픔에 빠지게 할 것이다. 노다지란 게 그렇지 않던가. 한때의 영화가 영화 그 자체로 몰락의 시발이 되는 것. 누구나 그렇다. 그래도 누구나 오늘을 노래하지 않으면 몰락도 영화도 자신만의 것, 자신만의 삶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