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난 후 돌발한 잼 세션처럼 소리가 하나씩 겹친다. 일정한 속도로 바닥에 채는 줄넘기 소리와 케이블 로프를 당길 때마다 울려 퍼지는 쇳소리, 여기에 샌드백을 치는 타격음까지 더하자 명쾌한 리듬이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소리와 무관한 케이코(키시이 유키노)가 체육관에 들어선다. 서른을 목전에 둔 여자 주인공과 복싱. 단순한 조합만으로 떠오르는 영화가 적지 않다. 국내 작품으로는 <파이터>(윤재호, 2020)를 꼽을 수 있고, <백엔의 사랑>(타케 마사하루, 2014)은 일본 영화라는 접점까지 공유한다. ‘영원한 현역’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수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공식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나이와 계급, 무엇보다 성별로 인해 온갖 편견에 부딪혔던 주인공이 끝내 선수로 데뷔해 링에 오른다. 빠른 편집이 시선을 붙잡는 와중에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인물의 신체와 움직임을 숨 가쁘게 쫓는다. 피가 엉겨 붙은 얼굴과 보석처럼 빛나는 땀방울을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생애 최고로 뜨거운 순간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한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시작부터 이러한 절정을 단념한다. 케이코는 이미 라이선스를 취득한 프로 복서이자 제 몫을 착실하게 해내는 사회인이다. 영화는 캐릭터에 힘을 주며 복싱 경기라는 사건을 이야기 축으로 삼는 대신에, 인물을 둘러싼 풍경과 일상을 스케치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수많은 전례를 비켜나간다.
차라리 영화는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 속 얼굴을 채집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라든지 상실과 이별 앞에서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잃지 않는 <만춘>(1949)에 빗댈 만하다. 오즈 야스지로는 묘비에 딱 한 글자를 새겼다. 없을 무(無). 케이코가 왜 복싱을 계속하는지 묻는 기자에게 체육관 회장(미우라 토모카즈)은 덤덤히 답한다. “복싱을 하고 있을 때는 머리가 텅 비어요. 그걸 ‘무(無)가 된다’고 하는데 그 기분이 좋은 걸지도요.” 무념무상으로 눈앞에 놓인 세계를 받아들이는, 죽음과 닮은 그 상태는 어째서 케이코에게 만족감을 주는 걸까?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케이코의 마음을 비추려는 듯 영화는 ‘무(無) 되기’를 연습한다. 대사는 최소화하고 카메라는 고정된다. 열정 넘치는 고백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를 지워낸 자리에서 그저 바라보기를 택한다. 케이코의 생활은 단조롭다. 아침에는 강변을 달리고 낮에는 호텔 객실을 청소하며 돈을 번다. 퇴근 후 체육관에서 훈련을 마치면 그제야 하루가 끝난다.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모습은 케이코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솔기가 터진 케이코의 글러브를 바느질하는 회장의 굽은 등과 체육관의 낡은 거울을 공들여 닦는 케이코의 표정이 둘의 관계를 말해준다. 영화는 그렇게 들여다봄으로써 들여다보기를 권유한다.
청각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케이코는 복싱 선수로서 “치명적으로 불리”하다면서도 회장은 주눅 들 필요 없다는 듯 곧장 말을 잇는다. “케이코는 눈이 좋아요. 계속 보고 있어요.” 잘 봐야 한다는 것. 이는 복서에게 재능만큼 중요한 덕목이자 청각장애인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훈련한 자세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의도를 헤아리는 일, 그 속에 담긴 제 모습을 깊이 살피는 일. 영화는 그렇게 담백하고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복서와 청각장애인, 나아가 스크린과 마주한 관객 사이에 공통점을 부여한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에서 케이코는 고요하게 움직이는 주체다. 햇빛이 스며든 창가를 떠다니는 먼지처럼 케이코는 말없이 반짝이고 부유한다. 동시에 영화는 강물과 교차로, 고가도로 위를 달려가는 열차 등 정제된 운동성을 지닌 풍경에 주목한다. 이러한 인서트는 다가올 사건을 암시하거나 인물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속도와 분위기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강물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듯, 질서와 규칙에 따라 열차가 이동하듯 세상에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존재한다. 인간은 늙고 장소는 사라진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체육관은 코로나19로 회원이 줄어든 데다 재개발까지 결정되며 폐업 위기에 처한다.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온 회장 또한 병세가 악화된다. 영화는 지극히 보편적인 운명을 애석하게 여기면서도 현실에 눈 감지 않겠다는 태도로 환상이나 헛된 희망과는 거리를 둔다.
변화하고 갈등하는 세계에서 케이코는 눈에 띄는 별종도, 뜻밖의 계기로 본인의 힘을 깨닫고 각성하는 히어로도 아니다. 첫머리에 언급한 영화 속 주인공이 각각 한반도 남쪽에 어떻게든 정착해야 하는 탈북민, 서른이 넘도록 집안에 틀어박혀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히키코모리,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대도시로 이주한 웨이트리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케이코에게도 청각 장애라는 허들이 있다. 다만, 영화는 장애를 플롯의 필수 장치로 동원하지 않는다. 고난 끝에 승리를 거머쥐는 주인공을 통해 희열을 선사하는 대신에, 영화는 손쉽게 과소평가 당하는 ‘작고 느리지만 끈질긴’ 투지를 조명한다(이 영화의 영문명은 ‘Small, Slow but Steady’다). 케이코는 타인의 비웃음과 걱정을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사회 구성원이다. 불투명한 앞날을 염려하는 가운데 자신이 선택한 바를 묵묵히 책임지는 청년이기도 하다. “오늘은 몸이 기분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쉬는 건 두렵다.”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지만, 마음 놓고 꿈을 확신하기란 불가능하다. 멈추면 뒤처질 거라는 공포, 이대로 가다가는 가까운 이에게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케이코는 긴 훈련과 짧은 경기에 최선을 다한다.
음악을 거의 배제하고 일상 소음으로 사운드를 대체한 영화이지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라카와강 둔치를 오르는 케이코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백엔의 사랑> 엔딩곡 가사가 떠오른다. “지금부터 시작할 매일매일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평범한 날들이라도 괜찮아요.” 두 영화에 공통점이 있다면 적어도 주인공의 승리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엔의 사랑> 속 이치코가 그러하듯 케이코도 진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싸웠으니 졌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패배했다고 해서 삶이 모조리 끝나지도 않는다. 종이 치기 전까지 나와 전력으로 싸워준 너는 적이 아니라, 오늘 이 링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어제를 견뎌준 동지다. 복싱을 소재로 한 기존 영화와 다른 길을 걷기는 하지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역시 성장을 펼쳐 놓으며 마무리한다. 챔피언 칭호나 메달과 같은 성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케이코는 오늘을 살아내며 내일로 달려갈 힘을 마련한다.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다 해도 누군가는 꾸준히 영화를 만들고 기다리듯, 경기장에 관중이 입장하지 못해도 싸움은 이어진다. 그들에게 보내는 박수와 함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가 눈앞에 놓인 언덕을 넘어가야 할 때, 영화는 젊음의 속성을 알아차린다. 청춘은 고여 있지 않다. 헤매고 실패할지언정 팔다리를 내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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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