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대부분의 아버지는 ‘가장’인 동시에 ‘집 밖 사람’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는 왕과 같은 위치이지만 그렇기에 더 외따로 고립된 존재일 수 있다. 이전 세대 어머니들은 자신의 남편을 일컬어 ‘바깥양반’이라 칭했다. 바깥에서 볼일 보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 가정의 왕(?)인 동시에 바깥사람.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게 일반 가정의 풍속이었다. 가족에서 제일 높은 존재이면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아버지, 오면 반갑고 나가면 더 좋은 존재
엄한 아버지일수록 바깥에 있을 때 해방감을 느끼는 아이들도 있다. 반대로,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삐뚤어지거나 더 외로워지는 아이들도 있다. 아버지는 바깥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의무와 책임을 진다. 동서고금 불문, 선험적으로 부여된 아버지의 역할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가꾼다. 그래서 항상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반대가 되거나 섞이는 경우도 흔해졌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다. 안에 있으면 왠지 바깥에 있어야 할 것 같고, 바깥에 있다가 안으로 돌아오면 잠시나마 환영(歡迎)받는 환영(幻影) 같은 존재?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아버지를 위한 노래>(2011)는 평이한 듯 독특한 영화다. 알고 보면 끔찍할 수도 있을 내용을 평온하고 잔잔하게 이끌고 간다. 차림새부터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은 의외로 평범하고,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은 어딘가 불안하거나 뒤틀려 있다. 그러면서 모든 인물이 아련하고 가련한 체취를 은근히 풍긴다. 영상의 색감은 조밀하게 풍성하고, 시종일관 쓸쓸한 듯 경쾌한 음악이 감정을 알싸하게 삭힌다. 상처와 고통에 대한 토로가 꽤 상큼할 정도다.
주인공은 은둔 중인 록스타 셰이엔(숀 펜). 폭탄 맞은 듯한 펑키 머리에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는 초로의 남자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매사 행동거지가 기운 없고 소심해 보인다. 그는 젊은 시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노래들’(셰이엔 스스로의 표현이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뮤지션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노래를 듣고 두 명의 청년이 자살한다. 충격을 받은 셰이엔은 모든 활동을 접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은둔한다. 그의 곁엔 그보다 더 활달하고 적극적인 아내 제인(프란시스 맥도맨드)이 있다. 제인의 직업은 소방관이다. 그리고 셰이엔처럼 고쓰 분장을 한 까칠한 이웃 소녀 메리(이브 휴슨)가 퉁명스러운 매니저처럼 따라다닌다. 거의 의붓딸 느낌이다.
1980년대 청춘들의 씁쓸 다리다리한 리듬
셰이엔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가 뮤지션이 된 것도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스스로 말했듯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노래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상처와 소외, 고독 등이 삭혀서 그의 목소리가 된 것이다. 셰이엔은 ‘리드기타를 압도하는 리듬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화려한 주선율보다는 본능적 리듬과 자신만의 호흡을 개성적으로 분출했다는 뜻일 거다. 셰이엔 음악의 독창성은 거기서 나왔다고 봐도 된다. 영화의 원제는 <This Must Be The Place>, 독특한 음색과 리듬으로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밴드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노래에서 따왔다. 토킹 헤즈의 리더였던 데이비드 번이 사운드트랙을 맡았고, 직접 자기 자신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셰이엔의 풍모에서 떠오르는 뮤지션이 한 명 더 있다. 역시 1970년대 말부터 우울하고 허무하고 절망적인 노래들을 때론 음침하게, 때론 경쾌하게 불러젖힌 영국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리더 로버트 스미스이다. 풍성하게 부풀린 헤어와 짙은 메이크업은 영락없는 로버트 스미스의 재현이자 풍자다. 더 큐어는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지만, 로버트 스미스의 음악은 결국 고통과 우울, 그리고 그 극복 의지(팀명부터!)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 역시 비슷하다. 우울하지만 기묘하게 위트 넘치고, 잔잔하고 아리지만 엉뚱한 유머가 독특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전체적으로 결이 곱고 따스하다는 느낌은 그런 특징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이 영화는 한 시대의 음악과 그 시대의 음악을 향유한 특정 세대에 대한 ‘송가’라 봐도 무방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정치적 격동을 겪은 세대와 그 아들들, 정확히는 1950년대 초중반 생들의 이야기. 나아가 그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유전되는 길고 긴 상처와 우울, 절망에 대한 차분하고도 쓰린, 가볍고도 깊은 스케치. 시종일관 풍경은 맑고 화사하지만(눈이 쌓인 후반부 장면마저도 맑고 포근한 느낌이다), 그 안에 놓인 인물들의 영혼은 색조의 세밀함만큼만이나 예리하게 찢겨 있다. 셰이엔의 아버지는 바로 찢긴 상처의 원조다.
정말 아우슈비츠 이후엔 시도 삶도 불가능했나?
셰이엔의 아버지는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상처의 진원은 결국 전 세계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패닉이었던 거다. 전후 태어난 셰이엔은 그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랐다. 셰이엔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이후 수용소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준 나치 대원을 찾아 복수하기를 꿈꾼다. 그렇게 여생이 허비되며 아들에게 사랑을 전할 기회를 놓친다. 셰이엔은 소외되고 고립되어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힌 채 성인이 된다. 그 모든 외로움의 원인이 된 아버지를 샤이엔은 30년 동안 떠나 있었다. 그러다가 부고를 받고 가족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은 그가 한때 명성과 인기를 누렸던 곳이다. 화려하기만 한 그 도시가 셰이엔에겐 그저 휑하고 낯설 뿐이다. 비행 공포증이 있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기에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다. 사촌 리처드로부터 아버지가 생전 나날이 끼적였던 일기를 건네받는다. 왜 아버지가 가족을 등한시했는지, 아버지의 진정한 상처와 고통의 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샤이엔은 되새긴다. 거부감과,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된 놀라움과, 그렇게 전이되는 부자간의 불분명한 슬픔의 궤적을 살피는 셰이엔의 표정이 자못 알쏭달쏭하다. 그것을 연기하는 숀 펜은 진짜 외계인 같아 보인다. 이 감정의 정체는 뭘까. 왜 이런 게 내 몸을 스멀스멀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싶은, 감정을 초월한 어떤 물리적 진공 상태. 나로선 이 영화에서 가장 음악적인 순간(?)이라 여겨졌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고통은 인간에 대한 처참한 살육행위로 기록되어 있다. 전 세계가 격노하고 충격받았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재고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이뤄졌을 정도다. 가스실과 생체 실험 등 인간이 도대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연구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약간 각도를 달리한다. 셰이엔의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가장 큰 고통은 가스실도 생체 실험도 아니었다. 셰이엔의 아버지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언제든 느낄 수 있는, 아주 사소해 보이면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그곳에서 겪었다. 가스실에 갇히거나 생체 실험을 당했다면 오히려 나았으려나. 이미 죽어 없어졌으면 모든 게 다 잿더미가 되어 차후의 고통 따위 없었으려나.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결국 죽은 자들이 떼어놓은 나머지 고통으로 평생 시달려야 한다.
삶은 언제나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셰이엔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노래 때문에 죽은 두 청년의 넋을 아무리 스스로 달래려 해도 달랠 수 없다. 청년들의 무덤에 들러 추모하려 하면 그들의 부모가 셰이엔에게 분노와 경멸을 퍼붓는다. 셰이엔은 자신의 고통을 노래로 승화했지만, 그것 때문에 죽은 이들의 아픔을 자신이 달래줄 순 없다. 살아남은 자의 업보이자 고통이다. 셰이엔의 아버지도 마찬가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으되, 그 대가는 평생 잊히지 않는 치욕과 수모와 무너져내린 자존심에 대한 갈구뿐이다. 평소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권총까지 무장한 채 그 전범과 마주한 셰이엔의 행동이 이 영화의 참된 아이러니다. 슬프고 웃기고 어색하고 정밀하다. 사운드트랙으로 깔린 음악들의 리듬처럼 어딘가 엇박인데, 새겨보면 정박인 묘한 곡절.
아버지는 주로 집에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완전히 없으면 집구석이 ‘개판’(?)된다. 그 ‘개판’에서 자란 아이들도 결국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된다. 제대로 정비된 ‘사람판’(?)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때로 개판에서 자란 아이들이 더 성숙하고 깊이 있는 삶을 성찰하게 되기도 한다. 랭보가 그랬고, 니체가 그랬다. 어떤 특별한 이름이 아니어도 아버지는 자기 안에 있다. 극복도 복수도 사랑도 결국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제목이 그럴 거다. ‘This Must Be The Place’ .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자신의 삶은 바로 거기 있다. 웃기게 엇박으로, 그런데 느닷없이 정박이 되는 요지경 속에.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