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와 함께 당대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빛나는 감독으로 손꼽히는 미야케 쇼의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절찬 상영 중이다.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은 주연 배우 키시이 유키노와 미야케 쇼 감독을 만났다.


배우 키시이 유키노

키시이 유키노 배우. 제공=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청각 장애를 가진 복싱 선수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에세이 「지지 마!」를 원작으로 삼아, 키시이 유키노 배우가 먼저 캐스팅 된 후 미야케 쇼 감독에게 연출이 제안된 프로젝트였다. 키시이는 “재현 드라마가 아닌 미야케 쇼 감독의 케이코 이야기를 만들 테니 촬영을 마칠 때까지 원작을 읽지 말고 경기 비디오도 보면 안 된다”는 프로듀서의 뜻에 따라, 원작은 표지만 본 상태로 캐릭터를 연구했다. “내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고쳐나갔다. 처음 받았던 시나리오와 많이 달라졌다. 미리 케이코의 상을 그려본다기보다, 트레이닝 중에 고통이나 쾌감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케이코가 되어 갔다.” 영화를 본 원작자의 동생은 영화 속 키시이가 실제 오가사와라와 똑같다는 감상을 들려줬다. “언니를 완전히 카피하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싸우는 스타일이 되게 닮았다더라. 특히 강변에서 셰도우 복싱하는 게 아주 똑같았다고.” 영화가 다 완성될 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던 키시이와 오가사와라는 시사회에서 처음 마주하자마자 울며 인사를 나눴다.

원작 「지지 마!」 / 미야케 쇼, 키시이 유키노, 오가사와라 케이코, 미우라 토모카즈

3개월간 진행된 복싱 트레이닝 과정에서 키시이 유키노가 얻은 건 다름 아닌 집중력이었다. “복싱할 때 증량을 위해서 당질을 제한해야 한다. 흔히 머리를 쓰려면 당분을 섭취해야 하고, 그걸 제한하면 대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평상시 눈치를 본다든가 남을 신경 쓴다든가 오만 생각이 왔다갔다 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만 명확하게 포커싱 되는 걸 경험했다.” 실력이 느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건 물론. 원래 키시이가 트레이너에게 맞춰야 하는데, 콤비네이션 미트를 연습하는 장면을 찍을 때엔 트레이너가 나를 맞춰줘야 할 정도로 실력이 빠르게 늘었다. 촬영 준비 당시부터 복싱의 매력에 빠져서 거의 3년이 지난 지금도 개인적으로 복싱을 계속하고 있다. “영화를 위한 트레이닝은 펀치를 때리는 게 아닌, 편치가 상대에게 닿는 것처럼 보이는 액션이다. 연기나 사람의 마음은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복싱은 연습하면 할수록 근육이 붙고 형태가 달라지는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상당한 용기를 얻었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첫 번째 경기는 흔히 복싱 영화에서 보장하는 쾌감이 배제돼 있다. 박진감은커녕 심지어 이기는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승패의 텐션 없이 애매한 분위기만 꽤나 오래 지속될 뿐이다. “케이코는 좋은 경기를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겨서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연기를 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에 나와서 상을 받아서 기쁘다기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케이코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았다.” 경기를 마친 후 사진을 찍는 신은 키시이의 판단이 특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그 장면에 관해선 아무런 디렉션을 받지 않았다. ‘웃으세요 좀 더 웃으세요’ 하며 계속 지시를 받는 상황이라 적당히 웃어도 괜찮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케이코의 기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대로 OK를 받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내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니 그 얼굴이 제대로 잡혀서 기뻤다.” 두 번째 경기에서 케이코는 패배한다. 하지만 그 신을 촬영할 때 키시이는 “절대로 지지 않고 싶다”는 마음만 안고 갔다. “케이코를 꼭 이기게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고 결말이 바뀔 리는 없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노력하면 뭔가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지금도 그 감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케이코와 체육관 회장이 셰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이 키시이 유키노의 역량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신이다. 가드 자세를 하고 있는 케이코가 흐를 것만 같은 눈물을 닦으려 글러브를 낀 손을 슬쩍 얼굴로 가져가거나 문득 회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갸우뚱 고개를 꺾은 채 묘한 미소를 띠는 자연스러운 디테일이 실로 대단하다. “케이코로서도 감정에 큰 변화가 생긴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회장님이 그래도 내 곁에 있다고 느끼며 하는 셰도우 복싱이다보니 조금은 릴렉스한 채로 찍을 수 있었던 신이었다. 그때 현장 분위기가 정말 부드러웠다. 이들이 정말 나를 받아들여주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노동과 복싱을 병행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얻는 케이코가 경영난과 건강으로 인해 체육관을 닫을 수밖에 없는 회장과 마음의 벽을 허무는 과정을 그린다. 현장에서 회장 역의 베테랑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미우라 배우님과 실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말로써 소통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계속 저희와 계속 시간을 보내주셨다. 본인의 촬영 시간 전에 현장에 도착하셔서 분위기를 살펴본다든지, 그야말로 현장에서도 회장님으로서 존재하셨다.”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키시이 유키노

2009년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키시이 유키노는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해왔음에도 대단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분명 키시이의 커리어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이다. 키시이에겐 주목과 명예를 안긴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육체와 마음을 온통 다해서 도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남기기 위한 것들로 가득 찬 99분이 아니었나 싶다. 부담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앞으로 연기하는 데 있어서 이번 작품처럼 팔이 아프고 한쪽 다리가 저리는, 신체적인 반응까지 동반하는 경우는 앞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미야케 쇼 감독

미야케 쇼 감독과 키시이 유키노 배우. 제공=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주인공 케이코가 방안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복싱 소재 영화답지 않은 처음이다. “편집 과정에서 발견한 지점이다. 제목처럼 초반부터 케이코를 계속 바라보는 영화로 만들자고 생각하고 방 장면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얼굴에서 부상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그가 격투를 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전달될 테니까.” 2020년 12월, 도쿄 아라카와. 영화는 자막으로 케이코를 소개하며 극중 시간/공간적 배경도 슬쩍 명시한다. 원작자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경기 결과는 실제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출신지와 복싱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는 또 다르다. “재현 드라마처럼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들고 싶지 않았고, 오래된 체육관이 문을 닫는 상황이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는 설정도 크게 작용했다. 두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과 <와일드 투어>(2019)를 각각 홋카이도와 야마구치에서 찍은 미야케 감독은 첫 도쿄 영화의 공간을 북동부에 위치한 아라카와(荒川)구로 정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었지만 거기서 찍고 싶었다. 흔히 도쿄라고 하면 시부야나 신주쿠가 유명한데 역사적으로 따지면 아라카와 부근이야말로 도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도쿄의 근원과도 같은 공간이 팬데믹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와중에도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것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을 담은 영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촬영현장의 미야케 쇼 감독과 키시이 유키노 배우

청각 장애를 가진 복싱 선수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에세이 「지지 마!」를 토대로 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키시이 유키노 배우가 먼저 캐스팅된 다음 미야케 쇼 감독에게 연출이 제안된 프로젝트였다. 권투도 수화도 문외한이라 촬영 전 키시이와 3개월간 권투와 수화부터 배웠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 “키시이 씨는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1년에 영화관에서만 200편 가까이 본다더라. (키시이의 전작 중 하나인 <구름 위에 살다>를 유작으로 남기고 2022년 3월 세상을 떠난) 아오야마 신지 감독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던 감독이셔서 그 분은 어떻게 연출했는지 틈만 나면 물었다.” 평소 키시이를 뛰어난 동시대 배우라고 느꼈기에 감독직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는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촬영은 그걸 매 순간 깨닫는 과정이었다.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케이코와 관장의 셰도우 복싱 신은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고조된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계획대로였다. 다만 거기에 리얼리티가 담긴 것은 키시이와 미우라 토모카즈가 만들어낸 “계획 이상의 일이 일어났”던 결과였다. 영화 내내 좀체 표정이 없는 케이코와 달리 실제 키시이의 미소는 강력하고 매력적이어서, 언제 어디서 케이코가 웃는 걸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녀가 치아를 활짝 드러낸 채 만면의 미소를 보이는 순간 관객들의 마음도 잠시 누그러진다.

키시이 유키노 외에도 든든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배우들이 있다. (영화에선 주로 ‘맛짱’이라고 불리는) 마츠모토 트레이너 역의 마츠우라 신이치로와 하야시 트레이너 역의 미우라 마사키다. 마츠우라는 실제 프로 복서의 트레이너 출신으로, 일본의 수많은 복싱 영화의 지도자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가 없으면 일본 영화사가 달라질 정도로 중요한 존재라고. “이 영화에 참여하기 전에는 복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마츠우라 씨가 모든 걸 가르쳐줬다. 비단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어떻게 성실하게 상대를 대하는가’에 대한 태도를 실천하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복싱 경험이 있는 미우라와는 체육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상의할 수 있었다. “케이코가 마츠모토가 연습하고 있을 때 실제 체육관처럼 느껴진다는 건 그건 온전히 프레임의 가장자리나 바깥에 있던 미우라 덕분이라 해도 좋다.”

복싱을 소재로 하는 영화지만 두 번의 경기 신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은커녕 승패가 갈리는 징후조차 없다. 무언가 찍어야겠다기보다 찍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더 크게 느껴진다.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될지 주변과 자주 상의한다. 영화를 찍는다는 건 스스로 의식하든 않든 어떤 윤리적 감각이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특히 케이코를 비롯한 등장인물은 나와 아주 다른 타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타자를 향해 어떻게 카메라를 들이댈지 하나하나 검토를 거듭했다.” 케이코가 처음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을 때가 대표적인 예. “케이코에게 소중한 체육관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얼굴이 신경 쓰였다. 그 장면을 실제 얼굴을 클로즈업했다면 배우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얼굴로 표현해야 하는구나, 하면서. 하지만 그건 진실과 다른 것 같아 관객이 상상하기를 기대하면서 전신으로만 찍었다.”

“소리와 영상의 타이밍이 조금 어긋나는 게 중요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가 방 안에서 일기를 쓰고 호텔에서 일하고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는 것만큼이나 아라카와의 풍경을 세심하게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 작품이다. 각종 기구들이 끽끽대는 소리와 함께 연습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수평과 수직을 교차해 보여주는 체육관의 첫 신이나 자동차와 열차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강변 신은 직접적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섬세한 인공을 통해 사운드와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획득한 결과다. 한편,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다분히 잉여처럼 보이는 쇼트가 있다. 체육관에 가는 길에 지나가는 계단에서 케이코와 관장 부부가 마주치는 대목. 영화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계단 신들은 멀찌감치서 정면으로만 찍혔는데 그 신에서만 대뜸 옆에서 관장 부부가 프레임을 가로지르는 구도를 택했다. “관장은 체육관을 닫는다는 말을 케이코에게 직접 전하지 못했고, 케이코 역시 지금 고민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지 못했다는 비극적인 엇갈림이 일어났다. 어쩌면 그 계단 신 이후로 세상은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긴장감을 갖고 집중해서 멋진 훈련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16mm 필름으로 찍은 미야케 쇼는 필름이 디지털에 비해 촬영 분량 대비 제작비가 확연히 불어나기 때문에 한 테이크 한 테이크 신중을 기하게 돼 배우나 스탭에게 무리를 요구하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야말로 필름 촬영의 최대 효용이라고 여러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영화 자체만큼이나 그걸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을 위하는 미야케 감독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미학적인 측면에선 체육관 내부의 빛이 크게 만족스러웠다. 케이코는 주로 낮엔 호텔(일반적으로 청각 장애인이 많이 갖는 직업과 복서로 활동하면서 자기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직업을 고려한 설정이다)에서 일하거나 집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비추고 밤에만 체육관에 나오는데, 어떤 시기를 통과하면서부터 케이코가 체육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체육관을 닫기로 결정되면서 분위기가 어두워지는데 그래서 더욱 체육관을 밝은 톤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후반부로 가면 체육관은 거의 낮 장면이 된다. 저 작은 창문을 통해 아침의 빛, 낮의 비, 저녁의 빛, 다양한 종류의 빛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빛의 그라데이션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실로 감동이었다.” 케이코가 지나온 겨울과 봄의 시간들에 새겨진 빛들을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볼 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