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만약 우리 밖에 없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는 외계인이나 UFO를 주제로 글을 쓸 때 종종 인용되는 칼 세이건의 유명 문구로,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콘택트>에서도 언급된다(이 영화의 원작자가 칼 세이건이기도 하다).
우리 은하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적어도 수천억 개가 있고 우주에는 우리 은하와 같은 거대한 천체들의 무리가 적어도 수천억 개가 있다. 별이 수천억 개가 있다는 것은 각 별에 딸린 행성들, 즉 우리가 위치하는 태양계의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과 같은 천체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억 곱하기 8개가 되는 셈이고, 이 중 하나 또는 두 개가 유사 지구라 하면 수천억 개, 혹은 수천억 곱하기 2개의 지구를 추정할 수 있다.
지구인과 교신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이 얼마나 있을지, 외계에 생명체가 얼마나 있을는지 추정해 보는 드레이크 방정식을 풀지 않더라도 지구의 모든 모래 알갱이 수보다 많은 항성계들 어딘가에 생명체, 나아가 문명사회가 있다는 판단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럼 범위를 조금 좁혀서 지구는 어떨까, 그리고 인류는?
지구는 장장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고 생명체는 대략 35~40억 년 전에 발생했다.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동물은 300만여 년 전에 출현하고 35만 년 전 비로소 현생인류가 등장한다. 인류는 상상하는 능력과 협력하는 능력을 가지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3만 년 전, 예술과 종교, 건축과 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 단순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우리가 상식이라고 배워온 불과 4~5천 년짜리 문명이 당연하고 유일하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1~3만 년이라면 현재 이어지는 문명 이전에 또 다른 문명이 한 번, 두 번 또는 여러 번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칼 세이건의 말을 조금 비틀어 보자면 “지구 생성 이후에 만약 직선적으로 발전한 단 하나의 인류 문명만 있다면 엄청난 시간 낭비"지 않을까?
넷플릭스 <고대의 아포칼립스>
넷플릭스의 8부작 다큐 시리즈 <고대의 아포칼립스>는 인간의 고대 역사에 관해 열띤 논쟁을 다시 유발한다. 그 중심에는 '유사 과학자'로 비판받는 그레이엄 핸콕이 있다. 작가 그레이엄 핸콕은 자신의 책 「신의 지문」이나 「신의 거울」에서 주장했던 가설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집트,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의 고대 유적들을 찾아다니며 시청자를 설득하는데, 그의 저서만큼이나 시리즈를 보는 이들의 의견은 갈린다.
"가장 위험한 넷플릭스 쇼"이자 "음모론자들을 위한"(영국의 일간지 '더 가디언') 다큐라는 비난도 있지만 문명을 역행하는 듯한 선사시대 이전 문명의 흔적을 보면 설득력 있는 해석은 필요해 보이고, 그의 설명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이 다큐에 빠져드는 이유다.
익히 알고 있는 역사가 과연 우리의 모든 역사인가.
다큐는 외계문명설과 같은 황당한 가설들을 언급하는 대신, 세계 각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비슷한 맥락의 고적을 탐험하며, 잊힌 문명의 멸망은 대홍수와 관련돼 있다고 짐작한다. 이 상상은 핸콕이 초지일관 주장하는 신의 전달자, 현생 인류보다 훨씬 더 지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인도네시아의 구눙 파당 언덕 아래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속 석실과 유사한 형태의 구조물을 발견한 현지의 고고학자는 각 층의 건설 연대를 최소 3,500년에서 28,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기초적인 농사로 사회를 일구던 사람들이 동시에 대규모 석조물을 건축하는 거석문화를 가졌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촐룰라에도 비슷한 예시가 있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들의 종교시설을 세웠다. 이 성당은 현재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단순한 언덕이라 생각했던 지형이 수 세기가 흐른 뒤 발굴과 조사를 통해 기원전 500년 경에 만들어진 인공물, 피라미드로 밝혀졌다. 높이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낮지만 면적은 세 배에 육박해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로 불리며 멕시코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꼭 방문해 봐야 할 흥미로운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그레이엄은 촐룰라 피라미드를 포함해 전 세계에 분포하는 많은 피라미드가 각 지역의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건축하거나 종교시설로 만들었다기보다 “잃어버린 문명”의 유산으로써 지어졌다고 말한다. 원주민으로 하여금 대규모 피라미드를 건설하도록 지도하고 견인한 이들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시칠리아 남쪽 몰타섬에서 발견된 약 5,600년 전에 세워진 거대 신전, 약 1만 1700년 전에 세워진 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을 보여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명 발달과정을 역행하는 고적의 존재를 핸콕은 '미지의 선진고대문명'으로 설명한다.
패러다임 체인저? 아니면 그냥 사기꾼?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특정 경향이 한번 자리 잡으면 거기서 벗어나기를 무척 꺼립니다.
자기 존재가 달린 듯 매달리죠.
누군가 패러다임을 깨려 하면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목숨을 걸고 방어합니다.”
<고대의 아포칼립스> 中 핸콕의 말
핸콕은 주류 고고학계에게 유감이 많은 듯하다. 물론 어디에나 ‘마피아’는 존재하고, 학계도 예외는 아니지만, 핸콕은 고고학자들을 싸잡아 "거만한" "소위 전문가"로 평가 절하하고, 고고학적 관행을 무시해 대중으로 하여금 해당 학문에 대한 인식을 손상시킨다. 음모론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이다. 미국 고고학 협회는 장문의 성명서를 통해 이 시리즈가 제시하는 이론이 인종차별주의, 백인 우월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에 우려를 표하고, 고고학적 증거가 희박한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다큐시리즈'가 아닌 'SF'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부에서 온 선구자'가 문명을 건설해 준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해 극단주의자들을 환호케하고, 그것이 내포한 엘리트주의는 원주민의 성취를 폄하할 위험이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시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 문득 떠오른다.
우주가 공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아닌지 만큼이나 고대 '미지의 선진 문명'에 대한 증거는 희박해 보인다.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믿음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맹목적으로 핸콕의 말을 믿거나 판단을 유보해야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무엇이 증거가 될지는 자명하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이고 정돈된 증거를 제시하면 될 일이다. <콘택트>의 주인공 앨리(조디 포스터)가 외계인과 조우했음을 증명한 ‘18시간 동안 녹화된 노이즈 영상’ 따위 말이다.
그전까지 나는 판단을 유보하며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SF로 보는 편을 택하겠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