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거는 언젠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마른 땅도
난 갯벌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마지막 칠게 한 마리가 살아 있어도
사람들은 그래, 다 죽었어.
그런데 그것도 갯벌이라는 거죠.
갯벌이라는 이름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갯벌로 돌아갈 거니까.
갯벌이었기 때문에, 갯벌이라고 불러줘야 된다.
그래야 살릴 수 있다는 거죠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
‘수라’. ‘비단에 새긴 수’라는 뜻이다. 원래 이름이 없던 갯벌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이 붙인 이름이다. 1991년 시작된 새만금간척사업은 전북 군산부터 부안 변산까지 33.9km에 이르는 방조제를 세워 바다를 막고, 만경강, 동진강 하구의 광활한 갯벌을 매립해 간척지로 바꾸는 사업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갯벌이자 주요 습지 생태계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전 국민적인 반대 여론과 어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2006년 대법원 판결로 결국 바다를 막는 물막이 공사를 강행했다.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지막 갯벌이 바로 군산의 수라갯벌이다.
<수라>는 20여 년간 생태적 감수성과 관점을 지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한국 영화계에 유례없는 길을 개척해오고 있는 황윤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이다.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다룬 <잡식가족의 딜레마>(2015),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비판적 시각으로 들여다본 <작별>(2001), 야생동물의 로드킬 문제를 다룬 <어느날 그 길에서>(2008)까지, 황윤 감독은 산업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며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 ‘생명’에 대한 화두를 던져왔다.
‘기억할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 여전히 기억과 기록이 가진 힘이 유효하다는 믿음’으로 기획된 <수라>는 그저 갯벌은 지켜야 할 대상이라는 당위성으로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멸종위기 1급인 저어새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쇠제비갈매기, 흰꼬리수리, 황새, 흰발농게, 금개구리, 수달, 삵 등 다양한 멸종위기 종과 그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들의 7년이라는 세월이 스크린을 때로는 미려하고 광대하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물들인다. 영화 홍보차 군산에서 상경한 황윤 감독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수라>와 7년이라는 긴 제작기를 들어봤다.
<수라> 개봉일 1만 관객 달성 먼저 축하드리고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무 바빠요(웃음). <수라>는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라는 영화 홍보 방식으로 개봉을 준비했어요. 사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공동체 상영 문의가 많았죠. 한두 번 하다가 계속 공동체 상영으로 풀면, 막상 영화를 개봉했을 때 관객이 안 올 거 같다는 우려도 있었는데요. 독립영화가 개봉관을 잡기도 어렵고 하니, 권역별로 한 번씩만 해볼까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은 겁니다. 그렇게 30여 차례 공동체 상영을 했죠.
그러면 꽁꽁 싸매고 있지 말고,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주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공동체 상영으로 영화를 봤던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자신의 지역에 개봉관을 잡는 겁니다. 개봉일에 전국 100개의 극장을 여는 거죠. 개봉 첫날 관객수 1만 명 돌파를 하자고 자발적으로 움직여주시는 거죠.
어떻게 보면 관객운동인 건데요, 영화의 진정한 주인은 감독도, 극장도 아니고 관객인 거 같아요. 관객이 볼 때 영화가 완성되는 것 같아요. 대자본으로 만들어진 상업영화가 유통망 안에서 배급되면서 제한된 선택지만 있던 관객들이, 좁은 선택지에서 고르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한다는 차원,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개봉 첫날 만 명이 달성되었으니, 그 만 명이 <수라>의 서포터즈가 되어서 입소문을 내고, 한 명이 열 명의 관객을 극장에 데리고 오면 10만 명이 되는 거겠죠?(웃음)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수라>로 제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대상도 수상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죠. 저 역시 올해가 인간-비인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작별>(2001>로 시작했으니 22년째이긴 한데, 중간에 육아휴직으로 2년 쉬었으니까요(웃음). 또 <수라>에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도 2003년에 결성되어서 활동한 지가 20년째에요. 그렇게 20년이라는 숫자가 겹쳐지는 걸 보면서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영화제가 성장하는 동안 저도 죽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활동해서 큰 상을 받게 되어서 뜻깊죠.
<잡식가족의 딜레마> 이후 7년 만의 신작입니다. 너무 오래 걸렸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또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도 궁금합니다.
그동안에 <수라> 만드느라 팍삭 늙었어요(웃음). 인생의 한 챕터가 가버렸더라고요. 7년이나 걸릴 줄 알았다면 신중하게 했을 텐데 말이죠(웃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신나는 일이기도 하고요. <빨간머리 앤> 대사였나요?
사실 <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아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만해도 물새를 조사하는 분, 어민의 삶을 조사하는 문화팀, 게를 조사하는 저서생물팀, 식물팀까지 정말 다양해요. 이분들의 기록도 메모, 보고서, 사진, 영상 등 방대하고요. 그런 기록물을 보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특히 영상은 하나하나 다 봐야만 하니까요. 테이프가 한 500개 되었거든요. 그걸 보다가 6mm 데크가 고장이 날 정도였죠.
새만금 갯벌이 엄청 넓어서 시간이 더 걸렸을 거 같기도 합니다.
만경강과 동진강 전체 유역의 어마어마한 규모죠. 전 세계적으로 봐도요. 그런 광범위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생태를 찍어야 하는 장면들이 많아서 기다림의 연속이었죠. 야생 새들은 제가 스케줄을 비우고 간다고, 기다린다고 해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또 갯벌은 물떼가 있다 보니 정말 촬영 난이도가 높았죠. 날씨도 좋은 날에만 찍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감독으로서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었어요. 사람만 쫓아다니고 자료만 나열할 수는 없으니까요. 구심점을 찾아야 하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고민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게 느껴집니다. 특별히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특별한 사건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결정적인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릴 때 같이 살았던 동물들이 영향을 미친 건 분명한 사실이죠. 개를 키웠는데 제가 이브 몽땅의 노래를 피아노로 치면 그렇게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어요. 다른 곡에는 반응하지 않는데 말이에요(웃음). 동물도 개성이 있는 존재란 걸 알게 되었죠. 제인 구달 박사가 침팬지 연구하러 갔을 때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개성이 넘친다는 걸 발견했던 것처럼요.
그래서인지 유독 동물에 동심이 많으셨죠. <작별>(2001)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새끼 호랑이 크레인이 주인공이었죠.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실내 사육장에서 크레인이 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야 했고, 그게 마음 아팠어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도대체 인간이 어떤 권리로 이 동물들을 감금시키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계속 한 겁니다. 크레인에게 약속했었어요. 너를 지금 당장 철장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너희들의 목소리를 영화라는 매체로 전달하는 통역사가 되겠다고요. 카메라를 들 힘이 있을 때까지는 너희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다짐을 한 거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거 같아요.
본격적으로 <수라> 이야기를 나눠 보죠. 새만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새만금 갯벌이라고 부르죠. 어학사전에 없는 말이에요. 지도에도 없다가 지금은 있고요. 지명도 그래요. 역사에도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의 앞 글자를 조합해서, 그만큼 넓은 새 땅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새만금이라고 한 거죠. 엄밀히 갯벌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하튼 새만금 갯벌이 처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끈 건 2003년 4명의 성직자가 부안에서 서울까지 3보 1배를 했던 사건이었죠.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갯벌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 행렬 끄트머리에 있었고요. 당시 개화도에 살던 이강길 감독(<살기 위하여>)이 다큐를 찍고 있었어요. 저 역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카메라를 들었지만, 현실을 기록한다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거 같아요. 당시 다른 작업을 하고 있기도 했었고요.
그렇게 전 국민적 관심을 받았는데, 2006년 대법원에서 새만금 갯벌 간척을 해도 좋다는 판결이 내려졌죠.
전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2006년에 갯벌을 간척하라는 판결을 내리고서야, 저도 다급한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살아 있는 갯벌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촬영해 줄 선배를 섭외해 부안 개화도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갯벌의 상황을 처음 보신 거군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지막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상황이었어요. 한쪽에는 급격히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말라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살아있는 조개가 엄청나게 많았고요. 마치 연옥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삶이 있는 곳은 황홀하게 아름다웠지만, 그 바로 옆의 죽음은 너무 충격적이었죠.
2006년 시작한 촬영이 영영 무산되게 됩니다. 갯벌 지키기 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했던 어민 고은식, 고 류기화 부부 사건이었죠.
2006년에 개화도에서 촬영할 당시 숙소를 제공해준 분이 바로 어민 고은식, 류기화 부부였어요. 갯벌 지키기 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분들이죠. 정말 따뜻한 분들이셨어요. 상경하고 한 달쯤 지났는데, 류기화 어민이 익사했다는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 말도 안 되어요. 방조제 문을 예고 없이 열어서 바닷물이 들이닥치고 집 앞마당처럼 잘 알던 갯벌에서 목숨을 잃은 거죠. 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트라우마가 되어서, 저는 새만금을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때 찍었던 테이프들을 한 번도 다시 본 적이 없어요. 사실 다시 볼 엄두가 안 난 거겠죠. 직시할 수 없어서 캐비닛에 넣고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새만금을 떠났다가 2015년에 다시 카메라를 드셨어요.
맞아요.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고 군산으로 이사를 갔어요. 개인적인 이유로 온 건데, 와서 보니 여기가 바로 새만금의 도시 아니겠어요? 새만금 마트, 새만금 부동산, 택시…. 온갖 곳에 새만금이라는 단어가 있더라고요. 다시 이사를 가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냥 생각하지 말고 지내자고 하다가, 1년 뒤에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을 만난 겁니다.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은 목수가 직업이고요. 물론 나중에 다른 일도 하지만요. 수만 마리 도요새의 군무에 매혹되었지만, 갯벌이 사라지면서 느낀 안타까움 때문에 20년 청춘을 물새 모니터링에 바쳤습니다. 정말 ‘새덕후’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요. 처음 오동필 단장을 만나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해요.
와,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나 싶었어요. 작은 영웅이라고들 하죠?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멋졌어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사실 조사단을 만났을 때 느낌이 너무 복합적이었습니다. 저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있었고요. 갯벌이 아직 남아 있구나, 이렇게 귀한 저어새 150마리가 군산에 있구나, 새만금의 도시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죠.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행스러운 마음도 있고, 안도감, 희망도 느꼈지만, 이면에 부끄러움도 일었어요. 한 번도 갯벌에 와보지 않아놓고서 ‘새만금은 다 끝난 이야기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부끄러움, 미안함 같은 마음들이었죠.
또 생업만으로도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고 돈을 모아서, 그 어떤 전문가나 단체들도 하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는 점에 존경심이 일었어요. 고마운 마음도 들었고요. 낡디낡은 스코프 망원렌즈로 새를 관찰하는 모습이 정말 놀랍더라고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수라 갯벌이 그 세월 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을 거 아니에요? 정말 위대한 일을 묵묵히 하고 있던 거죠. 그 첫날부터 촬영이 시작된 겁니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목수, 어린이책 작가, 전직 기자, 인류학자, 학생, 농부 등 평범한 시민들로 2003년에 구성된 단체죠. 매월 첫째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 각지에서 군산으로 모입니다. 메모, 사진, 동영상, 인터뷰 녹음, 보고서까지 방대한 기록물은 어떻게 확인하고 분류하셨는지 궁금해요. 그중에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자료는 무엇이었는지도요.
중요도로 영화에 쓸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사료적 가치는 있을 수 있지만, 영화적 가치는 다를 거니까요. 또 영화가 자료만 중심으로 하는 고발 다큐가 아니라서요. 영화는 철저하게 인물과 감정, 제가 찍는 분량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10주년 보고서입니다. 5권짜리 책인데 그걸 보고 전율이 일었어요. 오동필 단장이 10년 동안 물새 변화를 데이터로 기록했더라고요. 간척 이전에는 어떤 새들이 얼만큼 있었다는 것, 10년 동안 얼마나 줄어들었다는 점을 데이터로 정확하게 증명하고 있어요. 감정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요. 이걸 시민들이 했다고? 그 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정말 궁금했던 게 있어요. 새를 세는 방식입니다. 조사단원들이 ‘5마리, 6마리’ 이렇게 말해요. 10마리까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350마리, 2만 마리’ 이렇게 확장이 되는데 뜨헉(!)했죠. 이분들은 새를 어떻게 어림해서 세는 건가요? 비법이 정말 궁금합니다.
흔히 매의 눈이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분들이 그래요. 하도 오랜 시간을 관찰하다 보니 그냥 슥 하고 보기만 해도 몇 마리인지 파악이 되는 거죠. 아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일정 부분을 세서 곱하기하는 방식인 거죠. 이 정도면 몇 마리라고요. 사실 거리도 굉장히 멀거든요. 웬만한 망원렌즈로 당겨도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오동필 단장이나 승준이(오동필 단장의 아들)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다 알아요.
야생동물 로드킬을 다룬 <어느날 그 길에서>(2008)에서도 조사원들이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면서도 로드킬당한 동물 수를 파악하더라고요. 오랜 관찰에서 나오는 힘인 거 같아요. 오동필 단장에 도요새 종류를 구분하는 방식을 인터뷰하면서 저도 재미있었는데요, 생긴 모습으로 구분하기는 어렵고, 먹이 먹는 패턴으로 구분한다는 걸 보면서 그게 결국 관찰의 힘이고 사랑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대상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알아보는 것처럼요.
정말 수려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갯벌의 경관들이 멋지게 보입니다. 갯벌의 수려한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최고의 스태프와 함께 하셨어요. 김성환 프로듀서를 비롯해 김정근, 신임호 촬영감독까지요.
김정근 감독은 자연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이세요. 우리나라에서 방송 다큐를 오래 한 분이죠. 그래서 갯벌에 사는 손톱보다 작은 게들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들을 찍어달라고 요청했죠. 거대한 갯벌을 드론으로 찍는다든가요. 신임호 감독은 가장 멋진 도요새 군무를 담아주셨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유부도 장면이요. 초반에는 제작비가 없어서 제가 찍었고요. 또 바로바로 오동필 단장을 쫓아다니려면 근거리 카메라는 저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영화에서 감독님이 많이 등장합니다(웃음). 특별히 그렇게 구성하게 된 이유가 있나 궁금해요.
제가 카메라 앞에 많이 나올 생각이 아니었어요. <잡식가족의 딜레마>(2014)에서는 동물을 먹는다는 문제에 대해 매일 밥상 차리고 아이 키우는 입장이어서 기획 때부터 주인공이었지만요. <수라>는 등장인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어요. 조사단을 만나고 너무 위대하다는 생각에 이분들 찍기만도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하면서 제가 조금씩 들어온 거고, 나중에는 확 들어온 거죠.
혹시 연기에 욕심이 있으신 건?(웃음)
전혀 아니고요(웃음). 그래야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로서 더 힘이 날 거로 생각했어요. 연출자로서 저도 7년간 수라 갯벌을 찍으면서 계속 변해왔으니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갯벌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생각을 했었겠고요. 잠깐 촬영하다가 사건이 터지면서 트라우마가 되어서 망각의 시간도 거쳤죠. 그러다가 운명의 장난처럼 군산 한복판으로 이사를 가게 된 건데요. 잊으려 했던 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오동필 단장을 만나면서 점점 저도 변했어요. 처음에는 피상적으로 수라 갯벌을 갔는데, 두 번, 세 번을 가게 되면서 갈 때마다 너무나 아름다운 새들을 만나면서 수라를 깊이 사랑하게 된 거죠.
군산이 새만금의 도시란 걸 알게 되면서 너무 끔찍했는데, 그래도 아직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며 다시 군산이 너무 좋아졌어요. 이제 모든 이야기 속의 한 사람, 당사자가 된 겁니다. 조사단의 일원이 된 거고요. 이 과정에서 제가 겪은 변화들이 한 이야기의 큰 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도 비슷한 눈높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화자가 됨으로써 그 간극을 좁혀가는 친절한 안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7년 동안 지켜본 수라 갯벌의 모습도 많이 변했을 거 같아요.
수라 갯벌을 처음 봤을 때는 황무지 같았어요. 멀게 느껴졌죠. 매립장에서 아름답지 않은 장면들도 너무 많이 봤고요. 그런데 계속 갈수록 새끼들, 알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영화에서도 오동필 단장이 “아름다움을 본 죄”라고 말하잖아요. 만약 제가 갯벌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인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7년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수라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인간이 다 안다고 하는데, 오 단장은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해요. 저 역시 겸허해지더라고요. 갯벌이 원형을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염습지 역할을 하면서 많은 생명이 살아요. 계절마다 수라의 모습도 달라지고요.
공동체 상영으로 영화를 보고 수라 갯벌을 방문한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 후반부에 넣으셨어요. 마음에 남더라고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라>를 처음 공개한 이후에, 관객들이 수라에 너무 와보고 싶다고 연락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수라 갯벌 탐방 공지를 올리면, 금방 매진이 되는 거예요. 저는 수라를 많이 가봐서, 이제 안 가봐도 되는데, 관객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려고 가죠.
관객들과 함께 수라 갯벌을 걸을 때 감정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오동필 단장이 제게 매개체가 되어서 수라를 알게 되었는데, 관객들은 영화를 매개체로 수라를 알게 되었죠. 관객들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수라가 국민에게 알려지고 있고요. 그 현상들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바로 오 단장이 매혹에 빠진, 아름다움을 본 기억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 모든 현상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관객들이 수라 갯벌을 걸은 발자국이 해수가 들어와서 싹 지우는 장면을 그래서 영화에 넣었어요. 인간의 발자국이 바닷물에 의해 사라지는 거죠. 관객과 함께 만든 샷입니다. 아름다움을 경험한다는 힘이 이렇게 커요.
영화는 1991년 시작된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한 일대기처럼도 보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3보 1배, 환경단체와 시민들의 반대 운동, 대법원의 새만금간척사업 강행 판결까지요. 영화를 만드시면서 새만금간척사업에 관한 시간을 되돌려보셨을 텐데, 가장 아쉽게 느껴졌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당연히 2006년의 대법원 판결이죠.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정말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생각해요. 유치원생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환경영향평가 자체가 졸속이었고요. 얼마나 많은 멸종위기종, 법정보호종이 서식하는데 생태적인 가치나 보호 가치가 없다고 판결하나요? 그리고 애초 목적이 간척지에 농사를 짓겠다는 거였는데, 그 자체가 사라졌어요. 심지어 최대 바지락 생산지였던 해창갯벌을 2주간 잼버리대회를 한다고 매립하고 있습니다. 수만 년에 걸쳐 생성된 갯벌을요.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서 마지막 남은 수라 갯벌이라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못했으면 돌릴 수 있어야죠. 방조제도 언젠가는 개방해야 할 거고요. 바다를 어찌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나요?
기자간담회에서도 말씀하셨지만 곧 군산 신공항도 들어선다고 하잖아요. 수라 갯벌의 미래는 어떻게 보시나요?
영화의 흥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신공항은 첨예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찍는 과정에서 신공항이 부각되더니,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하더라고요. 2023년은 정말 중요한 해입니다. 지금 1,308명이 신공한 추진 계획을 취소하라는 국민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그 와중에 <수라>가 개봉하는 거고요.
2006년 대법원 판결에서는 졌지만, 그전에 2심에서는 이긴 적이 있어요. 2003년에 종교인들의 3보 1배로 전 국민적인 관심이 일어나면서 여론이 일어나니 행정소송에서 이긴 거죠. 그때처럼 이번에도 수라 갯벌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면 이길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정말 <수라>를 많은 분들이 보면 좋겠습니다. 영화가 보도자료도 아니고 뉴스도 아니지만, <수라>가 촉매가 되어서 수라 갯벌이 전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고,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풀처럼 퍼지면 좋겠어요.
아참,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있네요. 오동필 단장이 영화 완성본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보여주기 전에 자기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걸 보고 너무 당황한 거예요(웃음). 조사단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주인공처럼 나온 거에 대해서 심적으로 부담감을 느꼈다더라고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너무 좋아했어요. 그동안 제가 귀찮게 해드렸던 걸 다 용서해주셨고요(웃음). 사람이 너무 착해요. 그렇게 많은 걸 부탁하고, 자료 요청하고, 인터뷰해달라고 하고 그 지난한 과정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 받아주셨거든요. 최고의 캐릭터이자 제게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저는 7년이라는 시간이 영화에 녹아 있어서 더 좋더라고요. 특히 아빠 오동필 단장으로부터 시작된 작업이 아들 승준에게 이어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요. 혹시 2편도 나오려나요?
벌써 시작했어요(웃음). 사실 <수라>는 2부작이 되었거든요. 모든 걸 다 <수라> 한 편에 넣으려고 했더니 너무 방대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속편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설마, 속편도 7년 후에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죠?(웃음)
첫 작품을 2년 만에 완성했고, 다음 작품이 4년 걸렸고요. <수라>가 7년 걸렸네요(웃음). 보통 한 작품 들어가면 2~3년은 가니까 사실 엄두가 안 나기도 해요. 이미 시작해서 그만둘 수도 없고요.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해요. 약간 제 운명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제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제게 온 거라서요.
속편은 어떤 내용인가요?
수라 갯벌에 인접한 하재라는 마을이 있어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2천 명이 넘는 주민이 살았죠.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봐도 조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 중에 하나라 풍요로운 어촌이었는데, 지금 그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아주 작은 보상금을 주고 내몰다시피 한 거죠. 텅빈 마을에 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어요. 그 나무를 중심으로 사라진 어촌마을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승준이가 나올 수도 있을 거 같네요.
나와야 되지 않을까요?
아빠의 대를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승준에게는 정말 천재적인 능력이 있어요. 새소리만 듣고도 어떤 새인지 알아맞히는 건 당연할 정도로요. 가끔 주말에 같이 수라 갯벌과 하재 마을에 가서 조사를 하는데, 속편에서도 승준이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요. <수라>를 찍을 때만 해도 승준이 비중이 크지 않았어요. 오동필 단장에 주목했고, 조사단의 주요 인물들을 찍기만도 바빴죠. 승준이는 처음 만났을 때 중3이었는데, 어느 순간 너무 멋진 청년이 되어 있었고요. 지금 수라 갯벌을 지키는 데 정말 중요한 조사를 하니, 승준이의 성장기가 영화의 또 하나의 축이 되겠다고 봤죠. 승준이의 비중이 커지면서 제 아들 도영이의 비중도 커진 거고요.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셨어요. 영화제 초청 및 수상도 많아지면서 ‘독보적 다큐멘터리스트’라고 불리시기도 합니다. 최근 OTT에도 의외로 다큐가 많더라고요. 혹자는 OTT가 ‘다큐 맛집’이라고도 하고요. 감독님은 OTT와 작업 계획이 혹시 있으신가요?
모든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영화를 핸드폰이나 모니터보다는 극장에서 큰 화면과 좋은 스피커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공통된 바람일 겁니다. 특히나 <수라>는 극장에서 볼 때 더 큰 감동을 느낄 수는 영화고요. 갯벌의 장대한 풍광이라든가. 도요새의 아름다운 소리…. 이런 것들은 핸드폰 화면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거든요. 꼭 극장에서 봐주시면 좋겠어요. 공동체 상영으로 <수라>를 먼저 접한 관객들이 개봉관을 잡는 운동을 펼치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극장 소멸의 시대에 우리 영화는 시대를 거꾸로 가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수라>를 볼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수라> 제작 지원은 영화진흥위원회가 했고요,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파타고니아(친환경 패션 브랜드) 본사에서 최초로 지원을 받은 국내 영화에요. 파타고니아는 사회 공헌을 정말 많이 하는 회사잖아요. 환경 관련 영화 중에서는 주로 미국 작품들이 지원을 받아왔는데, 이번에 최초로 지원을 받았어요. <수라>의 문제의식과 작품성에 공감해준 거라고 봅니다. 너무 고마운 일이죠. 그래서 해창갯벌의 수많은 장승 중에 파타고니아 장승도 있고요(웃음). 그러니까 <수라>는 극장에서 보면 더욱 감동적인 작품일 거란 이야기입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