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굉장히 특별한 동작 같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나 도구가 발명되기 한참 전엔 사람의 움직임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주로 쓰는 근육과 신체 각 부위의 활용도가 오랜 시간 동안 엄청나게 변했다. 인간은 직립하는 존재이지만, 직립이 완성되면서 몸의 구조도 많이 변화하였다. 유별난 인류학적 근거를 새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가끔 상상해볼 뿐이다.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엔 사냥을 할 때나 사랑을 나눌 때나 몸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모든 춤은 거기서 출발한다.


아주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나 고유한 춤이 존재한다. 역시 언어 이전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뭔가를 소통하고 표현하기 위해 사람은 춤을 개발했을 거라는 뜻이다. 그건 특정 지역의 식습관과 기후, 그리고 그로 인한 사람의 기질과 깊게 연관돼 있다. 살풀이 등 한국무용은 주로 지신(地神) 밟기에서 유래한 발놀림에서 시작됐다. 아르헨티나의 탱고나 발리의 무용이나 결국 그들만의 문화적 특성을 나타낸다. 스페인의 플라멩코는 집시에게서 유래했다. 자유와 사랑, 고통과 분노에 기반한 격렬하고도 서글픈 음색, 요동치는 스텝이 주요 특징이다. 스페인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는 중년을 넘긴 이후 그 리듬과 그 안에서 진동하는 스페인의 전통과 영혼에 집착했다. <카르멘>(1983)은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피의 결혼식』을 영화로 옮긴 지 2년 만이었다. 플라멩코 춤의 대가 안토니오 가데스와 역시 플라멩코 기타 명인 파코 데 루치아가 두 작품 다 참여했다. 유명한 문학작품을 춤 공연으로 옮기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피의 결혼식>(1981)이나 <카르멘>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카르멘>엔 약간의 영화적 서사가 첨가됐다.

프랑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유명한 소설(오페라로도 유명한 그 작품 맞다)을 뮤지컬 공연으로 옮기려 하는데, 연출을 맡은 안토니오 가데스는 카르멘 역할을 할 배우를 찾지 못해 고민한다. 그러다가 딱 적합해 보이는 여배우를 알게 된다. 호세로 분한 안토니오와 카르멘으로 분한 여배우가 연습 중에 사랑에 빠진다. 여배우에겐 수감 중인 남편이 있다. 남편이 출감하자 둘의 관계가 난감해진다. 그러면서도 계속 뮤지컬을 만들어나간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둘 사이의 이상한 혼란과 그럼에도(아니, 그러기에?) 더욱 정교해지는 연출과 춤 동작이 이 영화의 진짜 볼거리다.


춤에 의한, 춤을 위한, 춤에 대한 영화

명인이라 불릴만한 전문 댄서와 세계적인 뮤지션이 세계적인 영화감독을 만나 어우러진 극중극 형식이라 할 만하다. 무시로 음악이 격동하고 춤이 꽃송이들처럼 때론 고요하게, 또 때론 강렬하게 분출하지만 어딘지 알 수 없는 고요, 태풍의 눈 같은 내밀한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갑자기 사랑에 빠진 남녀 댄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배역에 몰입해야 하고, 감정의 밀도가 격앙될수록 더 고요하고 차분하게 동작의 마디들을 이어나가야 한다. 발끝 하나 손끝 하나가 정지된 상태로 내밀하게 격동한다. 눈빛과 땀이 보이지 않는 에로스를 뿜어내고, 교차하는 팔다리가 서로 당겼다가 밀었다가 한다. 문득, 사랑의 실체 같은 걸 보게 된다고나 할까.

사랑은 늘 돌발적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난 이후 선후 관계를 따져 보면 뭔가가 정확하게 계산된 듯 꽉 찬 ‘구조’가 느껴질 때 있다. 처음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딱히 불륜이 아니더라도)이 발생한다. 몸도 마음도 내 것인 동시에, 상대를 향해 한없이 떠밀려 가며 문득 자신을 잃게도 된다. 동시에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기 자신임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어필하려 하게 된다. 사랑은 내부의 균열이자 외부와의 충돌인 동시에 내·외부를 통튼 격렬한 전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났을 때, 뭔가 명료해지는 게 있다. 누가 쓰지도 않은 각본이 나를 다시 변화시키고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 그 안에서 환희하고 때론 허우적대며 내가 나의 가면을 벗거나 들통나 버리는 일. 춤은 어떠한가.

이 영화 <카르멘>은 이후 무대에서도 공연됐다.


사랑도 춤도 결국 살아있는 몸의 일

일반인이 처음 춤을 배울 땐, 스스로가 박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성인일수록 더 그렇다. 근육은 손상되었고, 특정 부위는 거의 퇴화하다시피 했으며 호흡은 가슴 위로 떠 모든 게 삐딱하다. 걷는 것, 서 있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도 없다. 심하면 자의식 균열부터 체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상은 늘 편안한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게 안전하다고, 몸 편한 게 마음 불편한 것보다 낫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춤은 그 모든 걸 다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도록 유혹 혹은 경고한다. 그게 시작이자, 경계선의 출발이자, 춤으로 개화하는 몸의 최초 반응이다.

위 문단에 사랑을 겹쳐 보자. 사랑도 결국 자기균열이고 일종의 파행이며, 갈아엎음 아니던가. 어떤 대상을 만나 나를 변하게 하거나(또는 저절로 변하거나), 특정 생각이나 행위를 돌이켜 반성하거나, 자신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던가.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라면 사랑은 그저 불장난에 그칠 수도 있다. 춤도 그렇다. 정녕 자신의 몸과 그 몸의 조밀한 쓰임새에 대한 궁극적인 재고와 성찰이 없다면 춤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잔기교를 익히거나 겉보기에 아름다운 몸매나 선을 꾸며내고자 한다면, 그건 춤을 흉내 낸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멘>은 춤과 음악, 그리고 스페인 특유의 현란한 색감만으로도 오감 충족이 가능한 영화다. 그저 한없이 “와 멋있다!”라며 감탄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또는 잘 짜여진 극적 양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일종의 뮤직비디오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무대에 올려지는 공연을 영화화한, 아니 그 과정을 영화로 만든 것에 그 어떤 오락적 쾌감이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중요한 건 춤을 배우고 동작을 익히고 동선을 짜면서 자신 안으로부터 발아하는 새로운 기운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르멘>은 그 어떤 액션 영화보다 격렬하고, 그 어떤 애정영화보다 색정적이다.

대개 사람은 팔과 다리, 목과 허리는 자주, 그것도 아주 관성적으로 쓰지만, 몸통은 없는 듯 움직일 때가 많다. 그게 뇌로 혈류가 모이거나 가슴으로 호흡하는 습관을 낳는다. 우울과 불안 등도 그로 인해 유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요가나 필라테스는 그런 걸 완화시키는 기술적 형태들이다. <카르멘>을 보면서 새삼 되새기게 된 생각이다. 배우들(댄서들)의 스텝은 일견 현란하고 복잡해 보인다. 그러면서 엄청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결국 어떤 ‘무거움’을 견뎌낸 상태에서 발현된다.


액션 영화보다 격렬하고 애정영화보다 색정적이다

정녕 자신의 몸과 그 몸의 조밀한 쓰임새에 대한 궁극적인 재고와 성찰이 없다면 춤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잔기교를 익히거나 겉보기에 아름다운 몸매나 선을 꾸며내고자 한다면, 그건 춤을 흉내 낸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무거움’이란 우선 자신의 체중이다. 중력은 자꾸 몸을 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중력은 지구 만물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힘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게를 견디는 자는 그것을 거슬러 움직일 수 있다. 그 힘은 인간 몸의 중심인 단전에서 나온다. 단전을 깨달으려면 일단 몸통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최소한 몸통이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 자각이라도 해야 한다. 내장이 상하는 것도 몸통이 굳어서일 경우가 많다. 여기에 또 사랑을 대입해 보자. 사랑은 팔다리나 깔짝대며 입바른 소리 뱉어대며 애교 떠는 시늉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몸 전체로 받아들이고 받아내야 하는 일. 그 무게를 견뎌 낼 때 사랑은 무거우나 더없이 풍요로운 내면의 힘이 된다.

앞서 아주 오래전 인간의 행동 방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수십 만년 동안 인간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그래도 결국 변하지 않는 건 몸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이다. 몸이 죽으면 인간은 자연으로 바로 반납되는 지구의 일개 분자다. 그렇기에 외려 몸을 제대로 쓸 줄 알면 우주를 꿰뚫어 볼 수도 있다. 과장 같은가. 최소 자신 곁의 사람이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핵심을 살필 수는 있을 거라고 정리하자. 그러니 춤춰라. 바보 못난이의 아장걸음이라도 슬슬 배워보자. 세상이, 그리고 당신 곁의 익숙한 존재가 달리 보일 수도 있을 테니.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