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한씨는 요리 좀 하세요? 어쩐지 저보다 잘 하실 거 같은데.”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 동료가 물었다. 요리라, 마지막으로 불 앞에 선 게 대체 언제적이었을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 답했다.
“안 해 버릇한 지 너무 오래 되어 다 녹슬었을 거예요. 코로나19 전에는 사람들 집에 불러서 요리도 해주고 그랬는데, 코로나19로 혼자 식사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냥 요리를 안 하게 되더라고요.”
“사람을 초대해서 요리를 해줄 정도면 굉장히 잘 했다는 의미인데요?”
나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내가 즐겨 하던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 메뉴는 아니다. 그저 채 썬 양파가 냄비 안에서 완전히 갈색으로 카라멜라이즈드 되어 형태도 없이 뭉그러질 때까지 불 앞에서 양파를 뒤적거려주는 참을성이 필요할 뿐. 그러니 사람을 초대해서 요리를 해줄 때에 필요한 건, 요리 실력보다는 내가 만든 걸 먹어줄 사람에 대한 애정인 셈이다. 불 앞에 서서 기꺼이 열기를 참고 기다리게 만드는 애정.
한참 요리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문득 내가 봤던 가장 절절한 요리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문라이트〉(2016)의 한 장면이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 샤이론(트레반트 로즈)을 위해서 ‘셰프 스페셜’을 요리하는 케빈(안드레이 홀랜드)의 모습.
케빈은 샤이론에게 ‘셰프 스페셜’ 메뉴를 차려주겠다며 주방 안으로 들어가고, 카메라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허밍하듯 흐느끼듯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첼로 음으로 가득한 니콜라스 브라이텔의 ‘Chef’s Special’이 배경으로 깔린 가운데, 요리하는 케빈이 화면 한 가득 슬로우모션으로 잡힌다. 그는 정성스레 라임을 썰어서 불판 위에 올린 닭고기 위에 즙을 짜내고, 냄비에서 밥을 퍼 담아 접시 위에 올려내고, 미리 만들어 둔 쿠바식 검은콩을 퍼서 곁들인 뒤, 고수를 잘게 썰어 밥 위에 흩뿌려 올린다. 중간중간 주방 너머를 바라보며 샤이론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십수년 전에 불꽃처럼 스치고 지나갔던 사랑과 미안함을 담아, 회한과 반가움을 담아. 맞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불 앞에 선다는 건 저런 거지.
이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장면인지 설명하려면, 영화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이야기해야 한다. 샤이론과 케빈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어린 시절의 샤이론(알렉스 R. 히버트)은 작은 체구 탓에 친구들에게 ‘리틀’이라 불리며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유일한 법적 보호자인 엄마 폴라(나오미 해리스)는 마약에 찌들어 살고 있고, 친구들은 자신을 ‘호모새끼(faggot)’라고 불렀다. 그 시절 샤이론을 보호해줬던 어른은 마약상 후안(마허샬라 알리)과 그의 애인 테레사(자넬 모네) 뿐이었고, 자신을 따돌리지 않는 친구라곤 케빈(제이든 파이너) 뿐이었다.
상황은 사춘기가 되어도 비슷했다. 아니, 더 나빴다. 열 여섯 살의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은 철저히 혼자다. 엄마 폴라는 여전히 마약 중독자이며, 자신을 돌봐주었던 어른인 후안은 죽었다. 친구들은 이제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따돌린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레 ‘남자답고’ ‘강인’할 것을 요구받는 흑인 청소년 커뮤니티 안에서 샤이론의 성 정체성은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여전히 친구는 케빈(자렐 제롬) 하나 뿐이다. 고립된 채 외로워하던 어느 날, 샤이론은 밤의 바닷가에서 케빈을 만난다.
각자의 심중에 있던 외로움과 슬픔을 이야기하던 샤이론과 케빈 사이의 공기가 갑자기 달큰하고 뻑뻑해진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두 사람을 방해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밤의 바닷가에서, 샤이론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만져지는 기쁨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케빈은 친구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샤이론을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샤이론은 제 자신을 닫기 시작한다.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샤이론은 더는 작은 체구의 약한 소년이 아니다. 근육질의 몸매를 과시하는 샤이론은 후안이 그랬던 것처럼 마약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랑은 자신을 배반했고 호의는 자신에게 상처만 남겼으니, 살아남기 위해 남성성을 키우고 두툼한 외관 속에 자신을 숨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예상치도 못한 순간 케빈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때 일은 정말로 미안했다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자기는 한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는데, 손님이 틀어놓고 간 음악을 듣다가 문득 샤이론이 떠올라 전화번호를 물어물어 연락했노라고. 자신이 일하는 식당에 오면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그리고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살아가던 샤이론은, 케빈의 전화를 받고는 케빈이 일하는 식당을 찾아 마이애미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내가 탄복을 하며 바라보았던 그 절절한 요리 장면이 나온다.
1분도 채 안 되는 이 요리 장면에 내가 탄복한 건, 요리를 준비하는 케빈의 손길 하나 하나에 사랑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릇 가득하게 밥을 담아내면서도, 케빈은 혹시라도 포슬포슬한 밥알이 눌릴까 밥을 꾹 누르는 일 없이 살포시 퍼 담는다. 검은콩을 곁들이는 장면에서도 케빈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혹시라도 소스가 접시 주변에 지저분하게 묻지는 않을까 조심조심하는 손길. 나는 영화의 결말까지 가지 않고도 이 영화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요리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정성을 들이는 건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배리 젠킨스 감독은 웹진 ‘본 아페띠’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건 사려 깊은 돌봄의 행위입니다. 그 매우 간단한 일이야말로 진정한 친밀감의 표현인 거죠.”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찬장 안에서 잠자던 솥을 꺼냈다. 제철 과일을 썰어 설탕에 재우고, 레몬즙을 짜 넣고, 약불 위에 올린 뒤 뭉근해질 때까지 주걱으로 저어줬다. 잼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게 얼마 만이더라. 못 해도 2년은 된 것 같았다. 고작 한 줌 어치 잼을 만들면서 이걸 누구에게 나눠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나는 조용히 웃었다. 맞다. 불 앞에 서서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건 사랑의 행위다. 샤이론에게 셰프 스페셜을 차려주던 케빈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