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사랑한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가 남긴 작품들은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 영감을 줬다. 도시의 쓸쓸한 정취와 더불어 미국적인 풍광을 주로 그려온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영화적인 매력을 선사한다. 그런데 영화적인 매력이란 무얼 뜻하는 걸까.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에서 포착된 순간과 공간들은 매번 그림 너머에 어떤 사연이 있을지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현대인들의 마음 깊숙한 어떤 욕망을 건드린다. 한 장의 그림이 포착한 순간에 담긴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매력이야말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영화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에드워드 호퍼의 전생에 걸친 드로잉 작업, 판화, 유화, 수채화 등을 소개하며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에드워드 호퍼: 길위에서>를 개최 중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특히 영화와 연관이 있는 작업들을 소개한다.


도시의 목격자, 에드워드 호퍼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역시 1942년에 그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고 대신 에드워드 호퍼의 학생 시절 습작에 가까웠던 수많은 스케치, 돈을 벌 목적으로 그렸던 상업적인 작업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많은 후기 걸작 유화를 그리기 이전의 에칭프레스 작업,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렸던 미국적인 자연 풍광 그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릴 때면 으레 꼽는 작품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단 이 작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겠다.

시카고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1942)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가장 명확하고 간편한 키워드는 ‘고독함’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술집과 그 안의 사람들이다. 환한 술집의 실내 조명이 어두운 길가까지 쏟아져 나와 거리 전체를 밝게 비추고 있다. 특이한 점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림의 구도다. 내부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술집이며 내부에 화장실로 통하는 것 같은 문이 하나 보이는데 문고리가 없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 구도다. 바텐더와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가 다정하게 바에 앉아 있고,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어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내가 홀로 술을 마시는 중이다. 이들은 술집에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골목은 텅 비어 있는 것 같고 아마도 시간은 자정을 넘었을 것이다. 저들이 술집에 흘러 들어온 사연과 입구가 보이지 않는 기이한 술집에서 마주하게 될 밤의 순간은 절로 상상을 하게 만든다. 분명 거기에는 도시인들의 걱정과 고민이 생동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림 속 사람들, 즉 도시인들은 모두 외롭고 서로 단절된 채로 살아간다. 밤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될 도시인들 각자의 사연은 때론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할 수도 있다. 거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드워드 호퍼의 많은 작품들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인용되는 이유는 첫째로는 그가 그려내는 빛과 어둠의 아름다운 조화 때문이고, 둘째는 이미지 자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된 사례부터 소개하는 게 좋겠다.

다리오 아르젠토라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호러 영화 감독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리는 거리의 풍광을 ‘목격자의 시선’처럼 활용했다. 그는 <딥레드>(국내엔 <써스페리아 2>라고 소개됐다)라는 호러 영화를 만들면서 호퍼의 저 그림 속 술집과 비슷한 술집을 배경으로 등장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술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남자 주인공은 술집의 조명으로 거리가 환하게 밝혀진 어두운 거리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아래 영화의 장면을 살펴보면 어떤 방식으로 등장시켰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 술집 거리와 유사한 분위기를 내는 거리 풍경이 등장하는 영화 <딥레드>의 한 장면. 이 곳에서 남자는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현대의 고독함을 그리다

2020년, 영국 「가디언」지에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예술가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 상황이 인류에게 가져온 변화라는 것은 21세기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고립된 채 사회와 단절되기도 했고 소외된 이들의 정서와 트라우마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한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 속 도시인들이 딱 지금의 단절된 도시 풍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 실내>(New York Interior, 1921)

에드워드 호퍼는 1900년대 초에 뉴욕에서 파리로 건너가 파리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고 많은 작품에 담았다. 파리지앵들의 일상과 파리 센느 강변 주변의 흥미로운 건축물들을 종종 그렸는데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텅 빈 도시의 골목과 을씨년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밤의 건물 안에 각자의 사연을 알고 들어차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뉴욕 실내>라는 작품 외에도 꽤 많은 작품들에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창>(1954)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시점샷을 스릴러 형식의 스토리텔링에 적극 차용해서 1인칭 시점에 관한 근사한 영화를 만들어냈는데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들 가운데에서 밤의 건물 창문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의 한 장면

사실 비슷한 시점이 등장한다고 해서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화가의 그림과 영화감독의 작품을 한 카테고리에 묶어 서로의 영향에 관해 해석을 덧붙인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인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관음증적인 시선을 적극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은 두 예술가의 시선이 분명히 닮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사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사례는 아마도 히치콕 감독의 대표 걸작 <싸이코>(1960)에 등장하는 집의 묘사일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와 알프레드 히치콕

에드워드 호퍼는 1908년부터 1967년까지 평생을 뉴욕에 머물면서 뉴욕만의 마천루가 형성되어가던 도시의 면모를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지하철과 철도, 다리와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것을 그는 모두 지켜봤을 것이며 실제 많은 그림에서 건축물을 그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징이라고 하면 마천루의 거대한 스카이라인이 아니라 강변의 아파트, 어딘가를 이어주는 다리의 기능성 같은 걸 주로 그렸다는 점이다. 모두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업들이다.

에드워드 호퍼, <맨해튼 다리>(1925-26)

알프레드 히치콕, <현기증>(1958)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1958년에 <현기증>을 만들면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금문교를 영화에 담아내던 방식을 살펴보면 에드워드 호퍼가 맨해튼 다리를 그리던 시기의 공간감이나 정서적인 측면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시점의 위치와 화각의 유사성 정도를 지적하는 것은 쉬운 접근일 수 있다. 전혀 다른 도시지만 건축적인 기법과 그로 인해 생활 반경이 달라져가는 사람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다리의 면모를 포착해낸 것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히치콕 감독은 직접 자신의 영화와 에드워드 호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지만 많은 평론가나 학자들이 두 작가의 작업을 연결 지어 이야기한다. 가장 대표적인 연관성은 바로 에드워드 호퍼가 1925년에 그린 <철길 옆의 집>과 히치콕 감독의 걸작 <싸이코>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먼 베이츠의 집의 디자인의 유사성이다.

에드워드 호퍼, <철길 옆의 집>(house by the railroad, 1925) / 알프레드 히치콕, <싸이코>(1960)

히치콕 감독과 <사보타주>(1936), <의혹의 그림자>(1943),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새>(1963), <마니>(1964) 등 모두 5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버트 F. 보일은 자신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순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공유하고 있는 두 예술가의 방식의 유사성을 지적하곤 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철길 옆의 집>에 등장하는 저 건물은 맨사드 지붕이 있는 구식 4층 빅토리아 시대 주택을 그린 것이다. 1920년대에 에드워드 호퍼의 눈에 포착된 저 집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업종 전환이 되던 시기의 많은 소도시들이 겪게 된 황폐함, 단절, 낡고 병들어가던 어떤 순간의 감정 같은 걸 담아내고 있다. 그늘이 깊게 드리운 빛의 질감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럼 <싸이코>의 하우스는 어떤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젊은 노먼 베이츠가 사는 집은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집 자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 모든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존재감을 관객에게 안겨준다.

건축양식은 비슷해 보이지만 두 명의 예술가가 담아내려고 했던 집의 기능, 용도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비교는 꼭 히치콕 감독의 작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테렌스 맬릭, 빔 벤더스, 데이빗 린치 등 ‘미국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많은 영화감독들이 공통으로 고민하던 관심사였기에 이들 감독들의 영화 안에서도 에드워드 호퍼와의 유사성을 얼마든지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테렌스 멜릭 감독도 <천국의 나날들>(1978)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적극 차용했다.

에드워드 호퍼가 일생 동안 정말로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은 어떤 도시의 풍경, 건축물, 자연 풍광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빛을 그리고 싶어 했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화가의 목표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촬영감독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매력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의 연관성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에드워드 호퍼, <밤 그림자>(Night Shadows),1921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