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40대 이상 정도 된 사람들은 어렸을 적, 21세기엔 꿈속과도 같은 세계가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로봇과 인간이 대화도 하며 우주 연락선을 타고 달까지 오고 가는 게 일상이 될 줄 알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택시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지인과 실시간 영상 통화는 기본일 정도. 말 그대로 공상과학만화 같은 일상이 실현되는 세상이 멀지 않았다고 믿었던 거다. 21세기가 도래한 지 23년째인 현재, 그때 상상하던 세상과 지금 모습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다른가.


20세기에 상상했던 21세기는 지금과 얼마나 비슷한가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한 건 1969년 7월 21일이다. 54년이 지난 지금까지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은 이후 왜 달나라 여행에 대한 계획엔 아무 진전이 없을까. 달 착륙에 관한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는 원인 중 하나다. 그때 태어난 사람은 현재 중년을 지나 노인이 되기 직전인데, 왜 달을 휴양지 삼아 오고 가는 건 여전히 불가능할까. 당시에 꿈꾸던 것들은 허망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인가. 대답을 궁구하기 전에 일단, 당시로 거슬러 가보자.

달 착륙 1년 전 발표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는 명작이다. 향후 제작된 SF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개인적으론 아직도 이만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과문해서일까. 혹은 지나친 편애일까. 영상 기술적 측면이나 특수효과 등이 다소 유치하고 투박할지도 모른다. 당시로선 첨단이었던 기술이 50여 년이 지나 엉성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지사다. 이 영화를 지금 관점에서 기술적 스펙터클이나 일차적 역동성 차원으로만 바라보면 껍데기만 본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우주와 인류, 그리고 인간 정신과 생명 탄생의 변증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주는 과연 대기권 바깥에만 존재하는가.

영국의 미래학자이자 SF소설의 거장인 아서 C. 클라크가 1951년 발표한 단편 「파수꾼」(The Sentinel)을 토대 삼아 애초부터 영화와 장편소설이 같이 기획되고 제작(집필)되었다. 그럼에도 내용이 많이 다른 편인데, 영화와 소설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롭다. 특히 마지막 부분, 주인공이 분화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소설이나 영화나 각기 매체가 가진 특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정점이다. 소설에선 웅대한 시적 울림이 초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영화에선 당시에 가능했던 최첨단의 아날로그 기술로 공감각적 파열감을 증폭시킨다. 인간의 일상적 사고나 감각 너머의 신세계를 표현해낸 것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거대한 우주의 핵심에 맞닿아 시공을 초월하는 또 다른 개체로 탄생하는 것. 그 지점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한없이 지루하고 황당한 망상의 편린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


1960년대 문화혁명을 주도한 절륜한 고전

영화 내용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앞서 다소 과찬이다 싶을 정도의 감상을 늘어놓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그렇지 않은 평가도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여러 기술적 측면 포함, 모든 면에서 현재보다 탁월한 심미안과 지적 성찰을 내포하고 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1968년이면 서양의 정신문화가 격변하던 시기다. 프랑스 68혁명이 있었고, 미국에선 히피 문화가 성행했다. 동시에 반문명 반기술의 기치를 내세운 러다이트 운동(일명 기계파괴 운동)도 절정에 달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분야에 막대한 선풍을 일으켰다. 록 음악에도 크게 영향을 줬는데, 데이비드 보위의 명곡 ‘Space Oddity’(1969)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국의 급진적인 밴드 더 후(The Who)는 자신들의 ‘Who’s Next’ 앨범 재킷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직사각형 형태의 검은 석판(일명 모노리스)을 그대로 인용했을 정도다. 지금으로선 잘 상상하기 어려운 격동적인 반향이라 할 만하다.

‘Who’s Next’ 앨범 재킷

잘 알려졌다시피 시작은 원시시대가 배경이다. 원숭이에 가까운 유인원들이 포식자의 위험에 노출된 채 조금씩 진화한다.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존재가 있다. 소설에서는 ’문와처(Moon Watcher)‘, 즉 ’달바라기‘라 명명되는 존재다. 유인원 부족 간의 분쟁과 폭력이 횡행하는 가운데, 어느 날 문득 황야에 커다란 석판이 등장한다. 기이하고도 흉흉해 보이는 물질이다. 어떤 거대한 힘과 기운이 느껴진다. 석판은 다른 세계에서 잘못 날아와 박힌 듯하다. 그러다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문와처가 다 죽은 짐승의 뼈를 역시 뼈로 된 곤봉으로 마구 부수다가 뼈 곤봉을 하늘로 던진다. 클로즈업되면서 전환.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깔리면서 거대한 우주선이 등장하며 지구 밖 미래가 나타난다.


목성에 가서 죽고 다시 태어나다!

모두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을 만한, 영화사적 장면이다. 당시 상상했던 우주선이나 우주복, 그리고 대기권 바깥에서 먹는 음식이나 사람의 움직임 등이 모두 이 영화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구현됐다. 우주선의 형태나 디테일, 슈퍼컴퓨터의 작동 양상 등은 이후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주선의 심장이랄 수 있는 슈퍼컴퓨터 할(HAAL 9000)은 승무원과 대화도 하고 체스도 둔다. 그러다가 할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 순간 할은 이른바 우주의 ’빅브라더‘가 된다. 승무원들은 대부분 죽고 한 명만 살아남는다. 그는 빛의 물리적 체계, 시간의 작동 체계를 동시에 거슬러 목성에 도착, 기묘한 우주 호텔(?)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갑자기 늙어 죽는다.

시간의 물리적 속성이 자연히 지구와는 다르다. 어떤 천체물리학적 감수와 고려가 있었을 테지만, 목성에 프랑스 풍의 호텔이 있다는 건 당연히 상상의 산물일 것이다. 살아남은 승무원은 그곳에 있는 동시에 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자신인 동시에 타인이며, 살아있는 동시에 이미 죽은 사람 같기도 하다. 밥을 먹고 잠을 자지만, 그 모든 동작이 무언가에 반사된 그림자처럼도 보인다. 근데 그림자가 실체보다 더 정밀하고 실체는 더 어둡고 보이지 않는 느낌.

발원지는 호텔 안에도 존재하는 석판이다. 석판이 어떤 작용을 한다. 우뚝 서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새카맣기만 하지만, 분명 석판이 어떤 요술(?)을 부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승무원이 침대에서 숨을 거둔다. 석판의 요술은 이제 시작이다. 승무원이 죽은 침대 위에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거대한 알이 있다. 알 속이 훤히 보인다. 누군가 그 안에 있다. 사람의 형태지만, 사람과는 약간 달라 보인다. 태아를 닮았지만, 태아치곤 이목구비나 팔다리가 사뭇 명료하다. 그 알이 다시 우주 밖으로 떠 새로 탄생한 행성처럼 커다랗게 부푼다. 그 알 속의 존재가 눈을 떠 지구를 바라본다. 그리고 엔딩.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려 퍼지는 그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이자 본질이자 진짜 메시지다. 물론 해석은 분분하다. 큐브릭 스스로도 ’각자가 상상하라‘는 식으로 응대했었다. 혼자 남은 승무원이 시간의 빛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 이후 대사는 일절 없다. 빛과 색의 혼몽스러운 조작으로 표현한 우주적 파동과 삐걱거리며 뇌리를 진동하는 사운드뿐이다. 목성으로 설정된 그 호텔도 사실 불분명하다(소설에선 토성으로 설정돼 있다). 분명한 건 한 사람이 우주에서 죽고 우주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유효한, 그리고 이후의 어떤 영화도 대답하거나 재정립하지 못한 우주적 해찰과 그것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기술문명이 정말 인간 진보의 모든 걸 포괄하는가

지구 바깥에 떠올라 푸른 지구를 가만히 바라보는 ’스페이스 베이비‘는 정말 우주 밖에만 존재하는가. 혹시 자기 스스로도 다 해명하거나 증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 속에 새로운 ’베이비‘가 잉태 중인 건 아닐까.

대개 미래의 기술혁명은 인간 차원에서, 인간에 의해 상상하고 제기된 기술적 발전을 뜻한다. 그러다가 인간이 발명한 기계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이 통제되는 건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자동차는 인간의 다리를 빼앗았고, 거리와 시간을 단축한 비행기는 인간의 시간과 사유의 거리를 좁혀놨으며, 컴퓨터는 뇌의 확장인 동시에 뇌가 활동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오히려 제한해버렸다. 그럼에도 인간은 기계의 편의와 컴퓨터 알고리즘으론 설명도 해석도 불가능한 모종의 심리와 정신적 해찰을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작동하며 산다.

이 영화에서 상상한 기술적 진보가 실질적으로 현실화된 경우는 화상통화와 기계와의 아주 기초적인 대화 등, 기본 컴퓨터 알고리즘 체계의 구체적 확립 정도다. 여전히 달엔 갈 수 없고, 로봇은 인간처럼 움직일 수 없으며 매연과 탄소는 지구를 더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묻는다. 우주는 과연 대기권 밖에만 존재하는가. 아울러 인간의 상상은 단지 기술문명의 도구들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지구 바깥에 떠올라 푸른 지구를 가만히 바라보는 ’스페이스 베이비‘는 정말 우주 밖에만 존재하는가. 혹시 자기 스스로도 다 해명하거나 증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 속에 새로운 ’베이비‘가 잉태 중인 건 아닐까. 마치 낙타에서 사자로 변했다가 아이가 되어버리는 니체의 바로 그 ’위버멘쉬’(Übermensch)’처럼. 빠~바바밤~~빠빰!!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