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 번째 영화 〈매그놀리아〉(1999)는 다중 플롯과 다중 주인공으로 악명이 높다. 영화는 9명의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플롯을 진행시키는 광경을 휙휙 전환해가며 진행되는데, 처음엔 따로 노는 것 같았던 등장인물 각자의 사연은 뒤로 가면 갈수록 한데 묶여 장중한 심포니를 이룬다. 이 야심찬 영화에서 비교적 편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은 존 C. 라일리가 연기한 소심한 경찰관 ‘짐’이다.
짐은 LA 경찰이다. 3년 전에 이혼했으며, 잠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종에 종사 중인 터라 되도록 조용한 성격의 여자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던 짐은 소음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가 그 집의 주인인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에게 한 눈에 반해 버린다. 집안이 떠나가라 울리는 노래소리로 보나, 잔뜩 충혈된 눈과 두서 없는 말투로 보나, 클라우디아는 어디를 봐도 ‘조용한 성격의 여자’는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꼭 자기 타입의 사람하고만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클라우디아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마약 중독자이지만, 사랑에 빠진 짐의 눈에 그런 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음악을 크게 틀지 말라는 주의 정도만 주고 떠나려던 짐은, 이윽고 다시 클라우디아에게 돌아와 데이트 신청을 한다. 공무 집행을 위해 왔다가 이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는 걸 놓치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짐과 나눴던 대화가 썩 나쁘지 않았던 클라우디아는 짐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다. 오늘 근무 끝나고 보자고. 너무 갑작스러운가? 하지만 클라우디아에게 ‘갑작스러운 일들’은 그리 낯선 게 아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에 자신을 학대하며 충동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 썩 괜찮은 대화를 주고 받은 경찰관과의 데이트 정도야 대단히 갑작스러울 일도 없지.
클라우디아와의 저녁 약속에 가기까지, 짐의 하루는 형편 없이 전개됐다. 짐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범죄자의 총격에 놀라 총을 떨어뜨렸고, 무기 없이 범죄자와 대치한 상태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풀 숲에 몸을 숨겨야 했다. 죽다 간신히 살아났다는 초라함, 지급받은 총기를 칠칠치 못하게 흘렸다는 수치심, 범인을 놓쳤다는 열패감. 짐은 그런 감정들을 꾹 누르고 클라우디아를 데리러 간다.
클라우디아와의 데이트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나에 대해서 알게 되면 당신은 실망하고 날 증오할 거예요.”라던 클라우디아에게, 짐은 자신의 단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오늘 총을 잃어버렸다고. 동료들은 나를 비웃는다고. 3년 전 결혼 생활을 그만 둔 뒤 여자를 만나는 건 당신이 처음이라고. 짐의 진솔한 고백에 클라우디아는 감탄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 두 사람은 입을 맞춘다. “키스하고 싶어요, 짐?” “그렇소.”
하지만 입을 맞추고 난 뒤 클라우디아는 울면서 말한다. “이제 날 만났으니 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해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짐에게 클라우디아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외치며 자리를 뜬다. 내가 뭘 잘못 한 거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학대하는 거지? 복잡한 심경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짐은, 비상 사다리를 타고 건물 외벽을 오르는 수상한 실루엣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차를 유턴한다. 사무실에서 훔쳐온 돈을 돌려 놓으려던 도니 스미스(윌리엄 H. 메이시)였다.
짐은 ‘번개를 맞은 뒤로 생이 온통 망가져버린 왕년의 퀴즈 신동’ 도니 스미스의 사연을 들어주고, 그가 훔쳐온 돈을 다시 사무실에 되돌려 놓는 걸 확인하고는 도니와 헤어진다. 절도 미수는 분명 범죄지만, 그래도 스스로 돈을 되돌려 놓으려 했으니까. 그리고는 클라우디아를 찾아가 정식으로 고백한다. 나는 당신을 포기할 수 없다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다시는 당신이 당신 자신을 두고 함부로 바보 같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2.
같은 하루 동안, 도니 스미스 또한 최악의 하루를 경험했다. 그는 출근길에 브레이크를 잘못 밟아 일하는 가게의 쇼 윈도우를 깨 먹었고, 그나마 다니고 있던 가게에서 해고 당했으며, 짝사랑하고 있던 바의 바텐더에게 술김에 고백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쓸모도 없는 치아 교정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고 당한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는데, 문을 잠그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만 열쇠가 꽂힌 채로 부러지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것도 모른 채 돈을 훔쳐서 떠나려던 도니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돈을 되돌려 놓으려 하지만 열쇠가 부러진 탓에 사무실로 돌아가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건물 외벽을 비상 사다리로 오르다가 짐의 눈에 띄인 것이다. 그리고는 사다리에서 떨어져 이가 깨지면서, 진짜 치아 교정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왕년의 퀴즈 신동’ 도니 스미스가 출연했던 퀴즈 쇼의 진행자는 클라우디아의 아버지인 지미 게이터(필립 베이커 홀)다. 도니 스미스는 몇 주씩 1등을 도맡아서 했던 퀴즈 쇼 챔피언 출신인데, 그 인기와 상금이 오히려 도니에게 독이 되었다. 도니가 벌어들인 명성과 상금은 죄다 도니의 부모들이 빼앗아갔고, 어정쩡하게 유명해진 상태는 사는데 도움이 안 됐다. 특히나 번개를 맞은 뒤 다소 어눌해 진 이후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몰락한 왕년의 천재’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또 어디 있으랴?
그렇다면 유명인 아버지를 둔 클라우디아는 왜 그렇게 혼자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걸까.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답이 나온다. 지미 게이터는 클라우디아가 자랄 때 클라우디아에게 성폭력을 저질렀고 그 사실을 은폐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차마 엄마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클라우디아는, 집을 나온 채 자기모멸에 젖어 자기학대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그 날 하루 동안, 지미 게이터는 생방송으로 쇼를 진행하다가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아내 로즈(멜린다 딜론)의 추궁에 어정쩡하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털어놓지 못한다. “내가 자기를 만졌다고 생각하나봐. 그런데 난 그러지 않았어…”
짐은 모르고 관객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날 하루 동안 짐이 우연히 마주치고 속내를 들어주고 구조의 손길을 건넨 두 사람은 모두 지미 게이터와 연결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더 정확하게는 두 사람 모두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게 된 계기가 지미 게이터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미 게이터가 진행하는 퀴즈쇼를 중심으로 아홉 명의 주인공들을 오가는 〈매그놀리아〉 속에서, 이렇게 공통의 연결고리를 가진 각기 다른 두 명을 모두 만나 구원해주는 캐릭터는 짐이 유일하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6단계만 거치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는 6단계 분리 이론에 따르면, 우리 중 온전히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생각한 것보다 가까이 있고, 예상치도 못한 공통의 지인이 있으며, 공교로운 우연으로 얽혀있다. 그러지 않아도 영화는 내레이터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생긴 일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서로 교차하고 이상한 일들이 생기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누가 알 것인가? 우린 ‘그게 영화에 나왔다면 안 믿을 거야’라고 말한다. 누구의 누가 누구를 만나고 또 계속해서 만난다. 이 내레이터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런 이상한 일은 항상 생긴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거라면, 지미 게이터가 망가뜨린 두 명의 삶을 짐이 구해주는 것 또한 영 허황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치니까.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으니까.
3.
뉴스에선 청주 궁평 제2지하차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폭우는 거셌고 경고는 분명했지만, 행정은 저마다 관할을 따지며 서로에게 업무를 이관하느라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뉴스를 보던 지인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왜 내가 아프고 무기력한 걸까요.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닐지 몰라도, 과연 그게 온전히 남의 일이 될 수 있을까? 청주에 사는 나의 지인은 안부를 묻는 나의 질문에 자신은 괜찮지만 희생자 중 건너 건너 아는 이름이 있었노라고 말했다. 출퇴근을 하면서, 혹은 KTX를 타기 위해 오송역에 갈 때마다 익숙하게 오가던 길이었을 테니, 아는 이름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리라. 나 또한 그 소식에 침울해졌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6단계 분리 이론에 따르면 우리 중 온전히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도 아마 높은 확률로 6단계, 아니 아마 4단계 안에서 만날 것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우리는 모두 지인의 지인인 셈이다. 멀리 있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별처럼, 서로가 서로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 그러니 우리 중 누군가가 아프고 다치고 죽었을 때, 나 또한 덩달아 아프고 무기력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의 우주를 구성하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거니까. 내가 일부였던 누군가의 우주가 송두리째 사라진 거니까.
나는 이제 너무 익숙해진 ‘참사’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엮여 있을지를 생각한다. 참사에 책임이 있는 사람과, 참사에 희생이 된 사람들,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우리.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인연으로 서로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참혹함 앞에서도 어쩌면 서로를 구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매그놀리아〉 속 짐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