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폰에는 제인 버킨의 전화번호가 있다. 제인 버킨 파리 집의 번호다. 이게 대체 왜 내 아이폰에 저장되어 있는가. 사연은 짧다. 2012년 나는 제인 버킨의 내한 공연을 앞두고 인터뷰를 했다. 파리 시간으로 아침 10시에 그의 파리 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야 하는 인터뷰였다. 긴장한 나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어로 하는 인터뷰는 모국어 인터뷰보다는 좀 더 긴장되게 마련이다. 전화로 하는 인터뷰는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하는 인터뷰보다 더 긴장되게 마련이다. 전화로 하는 영어 인터뷰? 누군가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하는 인터뷰는 말의 뉘앙스를 알아먹기가 상당히 어렵다. 심지어 그걸 영어로 해야 하는 경우는 집중력의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단 한순간도 집중력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인터뷰가 노동이라면 전화 영어 인터뷰는 노동의 강도에 있어서 그야말로 최강이다. 그렇다고 원고료를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1988). 제인 버킨은 2004년, 2012년, 2013년 3번의 내한공연을 가졌다.

몇 번을 전화했는데 누구도 받지 않았다. 나는 노심초사하다가 아마도 네 번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알로. 혹은 헬로. 제인 버킨의 팬이라면 절대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헷갈릴 수 없는 제인 버킨의 목소리였다. 그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된다. “드디어! 미스 제인 버킨! 통화가 안 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파리는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죠?” “너무 미안해요. 여긴 지금 아침 10시예요. 1층에 있는 부엌에 잠시 내려가 있느라 2층 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걸 못 들었어요.” 그럭저럭 인터뷰는 끝났다. 아니, 그건 인터뷰라기보다는 일종의 팬미팅에 가까웠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는 내내 제인 버킨과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내 세대가, 그러니까 40대의 엑스세대가 아니라면 지금 내가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호들갑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당신에게 제인 버킨은 아마도 에르메스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세상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하지만 마음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버킨백'으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

당신이 제인 버킨을 버킨백으로만 아는 것을 나는 절대로 비난하거나 비꼴 생각이 없다. 전혀 없다. 버킨백은 그냥 백이 아니다. 그것은 패션이라는 문화가 내놓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 하나다. 영화잡지에서도 일하고 패션잡지에서도 일한 나에게 버킨백은 이를테면 장 뤽 고다르 영화 한 편의 가치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은 그깟 명품백 따위와 고다르 영화를 비교하다니 무엄하다고 외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솔직히 고다르가 1980년대쯤 만든 실험적 영화 한 편과 버킨 백 중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야 한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물론 나도 여러분의 마음은 알고 있다. 제인 버킨이 지난 7월 16일 76세의 이른 나이로 별세하자 기사들이 쏟아졌다. 미국이고 한국이고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언론이 제목에 ‘버킨백에 영감을 준'이라는 표현을 썼다. 제인 버킨의 오랜 팬들은 탄식했다. 그는 가방 이름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라고 탄식했다. 나는 버킨백을 더없이 아름다운 창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의 탄식도 이해한다.

제인 버킨과 세르쥬 갱스부르

그렇다면 제인 버킨은 누구였나. 그는 이를테면 1960년대의 얼굴 중 하나였다. 배우였다. 프렌치 팝의 여신이었다. 프랑스 가수 세르쥬 갱스부르 인생의 예술적 파트너였다. 배우 샬롯 갱스부르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영화감독이자 불멸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자, 그래서 나는 여기서 묻겠다. 당신이 기억하는 제인 버킨의 대표작은 무엇인가? 제인 버킨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당신조차도 이 질문에 선뜻 답을 내어놓기는 힘들 것이다. 단역으로 출연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걸작 <욕망>(1966)? 상대 배우였던 세르쥬 갱스부르와 사랑에 빠졌던 프랑스 코미디 영화 <슬로건>(1967)?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 사이에서 연기한, 루카 구아다니노가 <비거 스플래시>(2015)로 리메이크한 <수영장>(1969)? 브리지트 바르도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로제 바딤의 <돈 후안 73>(1973)? 사실 제인 버킨은 젊은 시절에는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의 음악적 세계는 어느 정도는 파트너인 세르쥬 갱스부르의 세계에 강하게 접합되어 있었다.

딸 샬롯 갱스부르가 직접 연출하고 함께 출연한 다큐멘터리 <샤를로트에 의한 제인>(2021)

물론 당신이 프랑스 영화광이라면 제인 버킨이 세르쥬 갱스부르와 결별한 후 출연했던 몇 편의 놀라운, 그러나 덜 알려진 몇몇 영화들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리베트의 <지상의 사랑>(1984), 장 뤽 고다르의 <오른쪽에 주의하라>(1987),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1987), 자크 리베트의 <누드 모델>(1991). 슬프지만 이 중 당신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직 DVD가 팔리고 있는 <누드 모델>밖에 없다. 스트리밍의 시대에 DVD 플레이어를 갖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제인 버킨은 중년이 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배우로서 절정을 맞이했지만 그 시절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제인 버킨의 이미지는 언제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머무른다. 세르쥬 갱스부르와 ‘프렌치 시크'라는 것을 거의 탄생시키다시피 한 가수이자 패션 아이콘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당신이 네이버에서 ‘제인 버킨'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는 순간,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제인 버킨에 대한 선망 어린 블로그 포스트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것도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그것이 나쁜 일인가? 이미 버킨백 이야기를 하면서 주절거렸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콘이 되는 가방이 몇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콘이 되는 사람도 몇 없다.

제인 버킨 이름 그대로 출연해 서촌 가는 길을 물어보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물론 제인 버킨이 카트린 드뇌브, 브리지트 바르도, 화니 아르당, 이자벨 위페르와 비견할 만한 배우였던 적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버킨의 영화 한 편을 추천할 생각이다. 오래전 한국에서 비디오로 출시된 적이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다. 이 영화에서 제인 버킨은 30대 후반의 이혼녀 ‘제인'을 연기한다. 그는 딸의 생일파티에서 15살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모성애적 사랑이 아니다. 진짜 사랑이다. 두 사람은 몰래 외딴섬으로 도피 여행을 떠나기까지 한다. 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모든 것은 파국을 맞이한다. <아무도 모르게>는 윤리극이 아니다.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제인 버킨은 흔한 영화적 젠더 구도를 바꿔버린 다음,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아름답고 고통스럽게 이야기해 낸다. 여기까지 읽는 당신은 이것이 2020년대에는 허용될 수 없는 이야기라며 조금 놀라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제인 버킨이 살아있었다면 놀라는 당신에게 말했을 것이다. 허용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노래하고 보여주는 것이 진짜 예술이라고 말이다. 제인 버킨은 그렇게 살았다. 노래라기보다는 분출하는 오르가슴의 기록에 가까운 노래 <Je T’aime… Moi Non Plus>(1970)를 불러 교황청을 분노하게 했던 시절에도,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를 만들었던 시절에도,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노래를 만들고 영화를 만들던 순간에도 버킨으로 살았다.

샬롯 갱스부르와 함께 출연한 <아무도 모르게>(왼쪽), 제인 버킨과 아녜스 바르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제인 버킨이 죽기 전 그의 파리 집에 왜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를 후회하고 있다. 아니다. 나는 그의 죽음을 미리 예상했더라도 절대 전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따위가 뭐라고 시대의 아이콘에게 함부로 전화질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전화번호를 절대 지우지 못할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이콘이 한때 살았던 집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건 나 따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니까 말이다.


김도훈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