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표 케이퍼 무비 나가신다

천태만상

세관을 거치지 아니하고 몰래 물건을 사들여 오거나 내다파는 행위를 밀수라고 한다. 그것은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2023)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두운 밤 경찰의 눈을 피해 해상에서 거창하게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공항에서 입국할 때 외국의 보석류나 귀중품 등을 수출입 통관 절차없이 가져오려 하거나, 외화 유출 및 재산 국외 도피 혐의 등도 밀수라고 할 수 있다. 극중 이 계장(김종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넓은 의미의 탈세가 된다.

판빙빙 배우가 탈세로 1400억 추징 된 거 기억하시죠?


영화의 인물들

<밀수>의 투톱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을 비롯한 동료 해녀들은 밀수에 동원된다. 원래는 평화로이 밀수만 하면 되는 삶이었으나 어느날 뜬 이 계장의 단속이 삶을 바꾼다. 여기에 동네 토박이 밀수꾼 장도리(박정민)와 국내 밀수계의 큰손, 권상사(조인성)까지 가세하여 이야기는 꼬여 들어간다.

전쟁과 밀수

권상사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다. 그는 전쟁 시절부터 극중 현재(70년대 중후반)까지 중화권과 국내를 오가며 각종 물건들을 밀수한다. 본디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사회가 어지러울 때 밀수가 횡행한다고 했으니 뭔가 딱 들어맞는 설정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밀수가 슬금슬금 기지개를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였다. 그리고 1950년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 규모는 본격적으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여한 미군들이 PX에서 유통되는 물건을 빼돌려 전면적인 밀수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물건들은 부산과 서울에서 대표적인 밀수품 거래 시장을 만들어 낸다. 이른바 부평 깡통시장과 남대문 도깨비 시장이 그것이다.

장도리역의 박정민 배우는 이번에도 짜증 연기의 탑 오브 탑을 보여준다.


영화 <국제시장>(2014) 의 배경

1950년 중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간 민간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 달려든 것이 특공대 밀수꾼이다. 이들은 대마도(쓰시마섬)의 이즈하라 항구를 거점으로 움직였기에 흔히들 이즈하라 특공대 밀수라고 불렸다. '특공'이라는 단어에는 그들의 기민함이 작용했다. 한국 전쟁 후 버려진 중고 탱크에서 나온 엔진을 단 10톤짜리 작은 배가 공해선상을 지나 야밤을 틈타 부산항의 후미진 곳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을 건너온 밀반입 품목은 화장품과 직물류가 대부분이었지만 곧 약품, 학용품, 오토바이, 자전거 뿐만 아니라 탄피같은 고철과 해초류까지 있었다. 이런 물건들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과 신창동에 걸친 길거리에 마켓이 형성됐다. 이른바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이다.

꽃분이네는 이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황정민 사장님은 안 계신다.

<밀수>에서는 전라도 서해 인근의 가상도시 군천 부두에서 밀수품을 빼돌리기 위해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다. 세관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서 5톤급의 작은 배에 해녀 몇 명이 어업으로 위장하여 출항을 한다. 그리곤 화물선이 미리 던지고 간 밀수품을 건져와 야간에 거래한다.

실제로 이것은 부산에서 해녀들이 밀수를 하기위해 사용했던 실제 범죄 수법이었다. 만약 적발되면 품목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해녀들은 유유히 헤엄쳐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던져진 물건은 다시 가서 가져오면 그만이니까. 이런 신출귀몰한 밀수범들을 잡기위해 SSU(해군 재난 특전대)들이 감시꾼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강철부대의 그들이었다면 단박에 잡았을 텐데!

단속이 불가능했던 밀렵장터

부산에 비견가는 곳은 서울의 도깨비 시장이었다. 이 곳은 6.25 이후부터 이미 사치품과 밀수품,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으로 가득했다. 소문으로는 박격포도 판매했다는 이 곳은 단속반이 나타나면 불법 물건을 숨기고 셔터를 내리고 잠적했는데, 귀신처럼 날렵하게 도망친다고 하여 도깨비 시장이라는 별명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미제 껌, 초콜렛, 양담배등을 판매했기 때문에 양키 시장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극중의 춘자가 명동에서 보따리 상인을 하며 팔았던 물건은 도깨비 시장의 명물들이었다.

이른바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는 도깨비 및 남대문 시장의 이권에 개입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시장내에 입법 사법 행정부를 두어 작은 국가를 만들기도 했지만, 5.16 쿠데타 이후 깡패 등 밀수세력들이 숙청되며 시장 또한 힘을 잃기 시작했다.


밀수와 역사

14세기 원나라에게 목화씨를 빼간 문익점은 어떤 인물로 기록될까? 적어도 우리의 역사에서 그는 위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목화를 들여오는 것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서 목화를 퍼트리는데 성공했고, 물레를 발명하여 실을 뽑아 무명천으로 만드는 데까지 이른다. 겨울에도 삼베를 입던 고려의 백성들이 따수운 겨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만약 문익점이 밀수해 오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은 가죽으로 된 겨울옷을 만들기 위해 네 발 달린 것들은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명천은 세금 대신 납부되는 품목이 되기도 하고, 화폐의 역할도 했다. 그리고 씨아와 물레 같은 기술의 발달은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간 엄청난 노동력을 대폭 줄여줬다. 이렇게 백성의 생활상과 나라의 경제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시대 흥덕왕 때 중국에서 차를 들여온 김대렴에서 시작된 차 문화의 변화도 당대의 생활상에 끼친 영향을 무시하지 못한다.

실은 세계사의 야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밀수는 어둠 속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모든곳을 비추는 가장 어두운 탐험이자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맞닿는 것이다. 밀수는 좋든 나쁘든 세계를 변화시켰고, 심지어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감사합니다.. 만.. 800년 전에 이미 있었대요 (소곤)


<밀수>는 수중의 액션이 중요한 만큼, 아래 포스터처럼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가 자주 제시된다. 진숙은 힘이 있지만 위세부리지 않고 뒤에서 다 챙겨주는 멋진 여성리더로 등장한다. 춘자는 영화의 사운드 트랙인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의 가사처럼 외롭지 않게 떠나고, 돌아오는 멋진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캐릭터가 물속에서 터치하며 교차하는 모습은 제법 뭉클하게 다가온다. 류승완 감독이 선사하는 입체적 캐릭터들의 각축을 기대하며, 해양서부극처럼 멋진 <밀수>를 감상하러 극장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