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쇼박스

하정우는 요즘 하루 2만 보를 걷는다고 한다. 4번으로 시간을 나누어 어쨌든 세워 둔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의지를 다잡으려고 최근에 차도 팔았어요.” 그러고 보면 그는 2012년에 서울부터 해남까지 577km를 배우들과 함께 걷는 다큐멘터리 <577 프로젝트>를 제작했고, 2018년에는 걷기 습관을 기록한 에세이집 <걷는 사람, 하정우>를 내놓아 이른바 ‘대박’을 치기도 했다. 하정우 개인의 걷기 역사는 이렇게 지금까지 꾸준하다. “걷는 건 저한테 그냥 샤워나 양치질 같은 거예요. 양치질 안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나는 하정우의 연기가 이 기술이 크게 가미되지 않은 베이식 운동, 걷기와 닮았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연기에는 언제나 잽이나 기교가 별로 없다. 사람들이 ‘하정우식’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캐릭터가 주는 덤덤하면서도 힘을 들이지 않는 연기 솜씨는 매번 관객을 쥐락펴락하며 웃게 하다가, 긴장하게도 만들어 준다. “몸을 보기 좋게 만들려고 걷는 게 아니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연기도 걷기로 생긴 근육처럼 인공미 없이 그저 탄탄하고 자연스럽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말년 병장부터 <멋진 하루>(2008)의 전 남친 같은 동시대의 인물뿐만 아니라 <암살>(2015)의 독립운동가나 <아가씨>(2016)의 백작 같은 지난 시대에 대입시켜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곰곰이 따져 보면, 그가 만드는 캐릭터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데려다 놔도, 혹은 어떤 옷을 입혀,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해도, 신기하게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그 여유는 언제나 매번 효과적이게도, 노심초사하는 관객을 향해, 뻔뻔하거나 능청스럽게 “잠깐 웃고 가도 된다”고 안심을 주어 왔다.

<터널>(2016)에 이어 <비공식작전>까지 하정우와 두 편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성훈 감독은 하정우의 이런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사용한 감독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는 <터널>이라는 암흑이 상징하는 당시의 대한민국 사회에 갇혀 있다, 지치지 않고 살아나와 관객에게 ‘희망’을 준 이정수를 마치 하정우 자신인 것처럼 연기했다. 바로 그 <터널>에서 우리에게 선물처럼 안겨 줬던 그 ‘장기’를 살려 하정우는 이제 1986년 레바논으로 간다. 당시 실제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발생한 한국 외교관 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서 하정우는, 납치된 주재관을 구하러 가는 외교관 이민준을 연기한다. <터널>이 탈출기였다면 <비공식작전>은 구출기다. 돈 가방을 전달하고 인질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헛발질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출의 끝이 희망일 것이라고 믿는다. 하정우가 만드는 이민준이니까. 늘 지치지 않고 지속해서 걸어왔으니까.


사진제공 쇼박스

이번 작품은 <터널> 때부터 김성훈 감독과 함께 한 시간의 연장인데요. 이번에는 공식적인 캐스팅 이전에 감독과 배우의 ‘비공식’ 라인으로 이뤄진 협업 관계라고 들었어요.

2018년도 추석 즈음이었어요. 그때 제가 <클로젯>(2020)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정말이지 시간상 읽을 여력이 없었어요. 친한 감독님이 시나리오 주면 2주 안으로 답해주는 게 예의인데 그 시간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추석 인사드릴 겸 전화를 드렸죠. “감독님 안녕하세요. 추석 잘 보내시고요. 그런데 시나리오는 솔직히 못 봤습니다. 제가 크랭크인 앞두고 있어서요. 그냥 할게요.” 감독님이 나중에 ‘그냥 할게요’라고 말한 거에 감동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 김성훈 감독님을 늘 믿으니까. (웃음)

시나리오 검토 없이 가능한 일이에요? 이거야말로 완벽한 믿음의 벨트! (웃음)

<터널> 때 제가 목격했잖아요. 이분은 영화에 부족하거나 구멍 나는 거나 에너지가 떨어지는 곳을 가만두지 않는 사람이구나, 정말 자기의 피를 뽑아 거기 부어서라도 만들 사람이라는 걸 알았죠. (웃음) <터널> 때 같이 일본 여행을 간 적 있어요. 시나리오 고치고 오자고 3박 4일 동안 오사카에 갔는데, 정말 하루에 14시간씩 시나리오를 보시더라고요. 호텔 방에서만 쓰면 지치니까 여기저기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작업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영화의 많은 것들이 정리되고 새로이 만들어졌죠. 그 시간이 정말 하루하루 너무너무 또렷이 기억나요. 제가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를 던지면 감독님이 거기서 캐치하고 제가 읽어보고, 또 감독님이랑 얘기 나누면서 정말 자근자근 시나리오의 온도를 높여간 거죠. 개봉 즈음에 ‘<터널>은 어두운 영화라 흥행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말이 파다할 때였어요. 그런데 그 순수한 노력이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니까 정말 기적이고 감동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끼리는 어떤 성공의 방정식처럼 언젠가 그런 작업 방식으로 다시 만나 해보자고 했고, 드디어 이번 작품을 함께 한 거죠.

평소 보아온 대로라면, 김성훈 감독을 비롯해 주지훈 배우까지 세 사람이 유머 코드가 좀 잘 맞았을 것 같아요. 납치된 외교관 구출이라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캐릭터들의 친근감, 유머러스한 면들이 그 긴장을 상쇄시켜주고 희망을 주는데요. 이 영화의 톤앤매너에 세 분의 협업이 일조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비슷해요. 셋 다 뜬금포! (웃음) 작정하고 웃기려는 걸 잘 시도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어떤 걸 뱉어서 걸리면 걸리는 거고,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두는 거죠. 작정하고 웃기는 건 아니고 일종의 상황 코미디인 것 같아요. 쌓고 또 쌓고 쌓았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방식이요.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 민준이가 자기가 가고 싶던 미주 외교관으로 먼저 발령 난 동료가 받은 축하 화환에 에프킬라를 막 뿌리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이 굉장히 코믹한데, 웃기려고 제가 에프킬라를 뿌렸다기보다는 그러한 잔 펀치들이 쌓여서 나중에 본격적으로 사건이 진행될 때 민준이 어떤 행동을 하면 분명히 웃음이 터질 거라 기대하는 빌드업인 거죠. 민준이 마라케시 산에 버려져 개들 무리에 쫓기다가 카메라가 롱샷으로 빠지고 걸어 나갈 때, 이건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지만, 그때 가면 웃음이 터지죠. 이 영화 안에서 허용되는 코미디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희 셋이 추구하는 방향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요.

<비공식작전>

하정우의 능청스러움, 주지훈의 뻔뻔함이 케미를 일으키며 버디무비의 틀이 갖춰지는데요.

지훈이도 안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틈을 노려서 자꾸 코미디 숟가락을 얹는 게 있어요. (웃음) 공항 앞에서 긴박하게 쫓기다가 판수의 차를 타고 정신없이 온 후, 어느 길에 차를 세워 둘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톤앤매너를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신이었던 것 같아요. 후반으로 가면서 영화적인 재미로는 끊이지 않는 고행 액션이 진행되는데요. 그러기 전에 초반부에는 두 캐릭터의 소소한 티키타카 코미디, 버디무비 형식에서 오는 즐거움을 주자, 그 범위를 정해놓고 작업했어요.

크게 힘을 안 들이고 표현하는 하정우 배우가 가진 장기가 이번에도 여러 장면에서 보여요.

네, 초반에 그 하정우의 전매특허인 ‘발랄함’을 마음껏 활용하죠. (웃음)

직접 ‘배우 하정우의 스타일’을 정의하니 더 웃긴데요. (웃음)

감독님께 톤앤매너를 정해 달라고 하니 ‘발랄함’을 원하시더라고요. <터널>에서 터널에 갇히고도 그 안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보려고 장난도 치는 그런 모습을 다시 소환해 보라는 거죠. <터널>의 이정수가 터널 밖으로 나오려 애썼던 것처럼 <비공식작전>도 여전히 갇혀 있는 곳에서 탈출하려는 생존기라는 얘기도 하셨어요. <터널>을 함께 하면서 가졌던 방향성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 같아요. 터널에서 갇힌 사람이 마냥 울 수는 없는 거잖아요. 눈물을 뚝 그치고 살기 위해 묵묵히 그다음 행보를 하는 것처럼 김성훈 감독님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분 같아요. 저도 좀 그런 편인데, 숙취가 있으면 가실 때까지 누워서 기다리는 것보다 걷고 움직이고 물도 마시고 가능한 한 빨리 떨치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적극적인 타입이죠. 살면서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현상을 바라볼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생각해 보면 <터널>의 이정수나 <비공식작전>의 이민준 같은 인물이 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공식작전>

액션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외교관이 극한 상황에 휩쓸리는 것도 이 영화의 포인트예요.

노선이 확실해요.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게 더 웃기잖아요. 이 사람의 직업이 개그맨이다, 그러면 별로 안 웃기니까 그 낙차가 있어야 재밌는 건데 이 캐릭터가 그랬어요. 민준의 노선을 따라가면 간단하죠. 가서 협상해서 구출해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분명한 동선이 있어서 거기 그 인물의 특징을 대입시키기가 너무나 편하다는 거죠. 이런 부분을 대입하면 포텐이 생기는 캐릭터였어요.

그런 민준이 몸을 쓰죠. 후반부의 ‘아날로그적인’ 액션신은 긴장과 유머를 더한 잘 구성된 장면인데요. 땀 흘리고 머리를 쓰는 투박한 재미를 책임지죠.

민준이라는 인물이 딱히 뭐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총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 수동적인 액션이죠. 어디에 매달리고, 자의가 아니라 타인에게 이끌려 수동으로 하는 액션이에요. 그걸 리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뭐든 다 직접 해야 했어요.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그렇게 카체이싱을 하고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몇 줄 묘사 안 되어 있거든요. 근데 그걸 4개월 내내 찍을 줄은 몰랐던 거죠. (웃음) ‘옥상에서 오재석 서기관을 안고 벽 밖으로 나가 안테나 줄에 매달려 떨어진다.’ 이 몇 줄을 정말 한 달 동안 찍을 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기술적으로 너무나 공을 들여서 촬영해야 나오는 장면이죠.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가 감독님한테 제가 그랬어요. “감독님 우리 영화 액션 영화네요.”

그 가운데, 점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현지의 특징을 가미한 스펙터클함도 보이는데요. 말씀하신 카체이싱 장면이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정말 정점을 찍는 게 차량 액션 장면이죠. 사실은 그 장면은 배우가 아닌 택시가 주인공이에요. (웃음) 그 틀 안에서 액션 능력치가 없는 민석이 애를 쓰는 게 긴장감과 재미로 연결되는 거죠. 캐릭터의 연결성도 잘 맞고 정말 배치를 잘 시키셨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비공식작전>

납치된 인질을 구하는 실화 바탕의 영화가 할리우드를 거쳐, 최근 한국도 <모가디슈>(2021) <교섭>(2023) 등이 연달아 소개되었는데요. 앞선 작품들이 있기에 감독, 배우로서는 새로움을 주고자 하는 도전 의식이 생기는 작품이기도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의 적은 과거의 전작들이다” 라는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사실 저도 중동 배경의 영화면 잘 안 봐요. 너무 피곤할 거 같다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웃음) 너무 진지하지 말자, 그런 영화도 있다면 우리처럼 재밌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존의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가진 무게를 기대하고 오시면 실망을 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너무 오락적인 거 아니야?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상업영화가 오락적이어야 한다는 미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습한 여름날 밤에 정말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컸죠.

캐릭터의 유머러스한 접근이 차별화를 주는 한편, 무거운 사건이 바탕이다 보니 리스크가 큰 접목이기도 했어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논의의 과정이 있었나요.

일단 오재석 서기관을 만나기 전까지는 허용된다, 라고 생각했어요. 1년 9개월을 납치 감금되었던 오재석 서기관을 현지로 가서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서 만났을 때, 그 이후에는 연기의 톤이 달라지는 거죠. 사실 민준은 레바논에 별생각 없이 간 거예요. 오재석 서기관을 구할 비공식작전에 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러면 제가 레바논 갈 테니까 대신 성공하면 뉴욕이나 LA 주재원으로 보내달라”고 딜을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오 서기관을 보니까, ‘아, 이게 장난이 아니네’, ‘이렇게 접근할 일이 아니네’ 하고 각성하게 되는 거죠.

<비공식작전>

<비공식작전>의 강점이자 극장에서 관객이 꼭 체험해 보면 좋을 이 영화의 스펙터클이 배경의 완성도 있는 구현 능력이에요. 이 사건, 이 인물들을 리얼하게 만드는 바탕이 프로덕션으로 만족감 있게 충족되는데요. 한국영화가 해외 로케이션을 실행하고 결과로 끌어낼 수 있는 노하우, 인프라의 축적이 눈으로 확인되는데요. 그 현장을 경험한 배우로서 체감은 어떤가요.

제작진의 힘을 느껴요. 그러한 장소를 감독님이 상상한 대로 찾고 스케일을 넓혀줬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앞선 작품들로 인해서 한국영화 전체로 볼 때는 계속 커져 스케일이 커져 나가고 더 과감해지는 것 같아요. <마이웨이>(2011) 때 라트비아에서 촬영한 경험이 <베를린>(2013)으로 이어졌어요. <집으로 가는 길>(2013)에서 도미니크 촬영을 해보니 이곳이 또 촬영 무대로 열리는 거예요.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도 앞서 작품들의 노하우를 가지고, 그때 같이 일했던 도미니카 현지 제작사와 힘을 합쳐서 만들었고요. <비공식작전>도 SBS 드라마 <배가본드>(2019)에서 정보를 얻어 모로코에 갔고요, 지금 지훈이가 찍고 있는 드라마도 모로코에서 찍으면서 우리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거죠. 이렇게 이어지니, 점점 과감해지고 스케일이 커지는 것 같아요.

<비공식작전>을 시작으로 스크린에서 더 자주 뵙게 됐는데요. 더불어 연출하는 영화 <로비> 크랭크인도 앞두고 있죠.

곧 크랭크인인데요. 연출작에 대해 생각해 보면 <롤러코스터>(2013)는 투박하고 촌스럽고 부족하지만 재밌다는 내 마음으로 다가섰던 작품이라면, <허삼관>(2015)은 너무 머리를 썼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이 영화로 뭔가를 이루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세 번째 작품만큼은 내 마음이 먼저 가는 작품을 해야겠다 싶어 썼는데, 역시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엎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 때 골프를 배우고 라운딩을 나갔는데 얌전한 동네 형이 골프장만 가면 돌변하는 거예요. 야수 같은 사람이 소녀로 변신을 하고요. 샷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진짜 날 것 같은 사람들의 이면을 목격하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스마트 주차장 충전 회사가 나라를 상대로 입찰권을 따는데 골프를 치며 로비를 하는 내용이에요. 제가 직접 출연도 하고요. 연출만 하고 싶은데 투자가 난항을 겪어서…(웃음) 연출 말고 또 강제규 감독님과 임시완, 박은빈 배우와 함께한 <1947 보스톤>도 하반기에 개봉하는데 부디 귀엽게 봐주세요. (웃음)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