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법으로 세계를 재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인의 질서와 평등, 죄와 벌 등은 신의 엄명을 취한(혹은 내세운)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규율을 바탕 삼는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신이 정말 완전한 존재인지는 얘기하지 않기로 하자. 무신론자의 입장이든 유신론자의 입장이든 신과 종교에 관한 특정한 의견 또한 논외로 하자. 관건은 인간이 인간 세상을 통제하고 조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라는 게 정말 완전한지에 대한 여부다.


법은 만인 앞에 불평등하다?

현대 국가의 법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른바 성문법이다. 언어가 발명되기 전에도 법은 존재했으나 대개 특정 집단의 관습이나 풍속에 근거한 명령 체계였다. 그렇다고 언어로 명문화된 현재의 법 체계 보다 구속력이 약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종의 편견이나 집단적 압력에 의한 처벌이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성문법은 그 미묘하고 편향된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재정립하여 편찬한 현대 국가의 경전이라 부를만도 하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늘 평등하고 적절하고 유효한 것일까.

테일러 헥포드 감독의 <데블스 에드버킷>(1997)은 법에 대한 영화이다. 하지만 숨겨지거나 왜곡된 진실을 파헤쳐 한쪽 편을 들어주는 식의 단순한 법정 드라마는 아니다, 이 영화엔 인간의 본능과 욕망, 그리고 허영과 진실을 악마의 주문에 빗댄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굉장히 둔중하고 장엄한 내용이지만, 디테일을 살펴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순과 당착, 양심과 이기심에 관한 폭로가 요소마다 박혀 있다. 흔히 있을 법한 한 인간의 욕망을 신과 악마의 요상한 변증법으로 풀어내는 마력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자신이 선의 편이라고 믿거나 혹은 우기게 되는 자는 어떻게 악마의 하수인으로 둔갑하게 되는가.

변호사 케빈(키아누 리브스, 왼쪽)은 연일 승소 중이다.

플로리다 주 한 작은 마을의 변호사 케빈 로맥스(키아누 리브스)는 전직 검사 출신이다. 변호사로 개업한 후 그는 법정에 설 때마다 승소한다. 무려 64연승이다. 영화는 케빈이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한 남자 교사를 변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러 정황상 교사가 성폭행범임이 확연해지는 순간, 케빈은 휴정을 요구하며 화장실에 들른다. 그때 따라 들어온 기자 한 명이 이죽거린다. “뭐, 때로 질 수도 있는 거지.” 케빈이 분노한다. 다시 법정. 케빈은 원고인 여학생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하여 교사의 무죄 확정을 받아낸다. 승승장구다.


욕망이 불러오는 불길한 환각

승소 축하 파티를 벌이는 케빈에게 한 남자가 접근한다. 뉴욕의 거대한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다. 케빈은 아내 메리앤(샤를리즈 테론)과 함께 뉴욕으로 떠난다. 최고급 아파트와 거대연봉 등, 호사스러운 뉴요커의 삶이 부부의 미래에 꽃길을 깔아주는 듯하다. 로펌의 사장은 존 밀턴. 알 파치노가 연기한 이 인물의 이름이 『실락원』을 쓴 17세기 영국 시인과 똑같다는 사실은 그저 참조만 하자. 첫 만남부터 케빈은 밀턴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다.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엄선된 고급 변호사들 사이에서 케빈은 크리스터벨라(코니 닐슨)라는 여 변호사에게 매혹된다. 훤칠한 몸매에 이국적인 외모가 케빈을 사로잡는다.

초호화 아파트의 벽지를 바르면서 신나 있던 아내 메리앤은 얼마 안 가 이상한 불안 증세에 시달린다. 케빈은 회사에서 부여된 임무에 충실하며 여전히 연승 가도다. 메리앤은 아이를 원하지만, 케빈은 뭔가에 사로잡힌 듯 일에만 몰두하고 아내에게 소홀해진다. 메리앤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영화는 점점 괴이한 심리스릴러 풍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 중심에 존 밀턴이 있다. 호기롭고 설득력 강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케빈을 들었다 놨다 한다. 케빈은 어느덧 그의 충실한 시종이 되어 있다.


허영의 끝에 발가벗고 상처 입은 진실이 있다

케빈과 그의 아내 메리앤(샤를리즈 테론, 오른쪽)

매리앤은 매일 매일이 악몽이다. 친절하기만 하던 이웃의 얼굴이 악마로 보이고, 웬 어린아이가 피투성이인 채로 자신의 자궁을 들고 있는 환각까지 보게 된다. 반면에, 케빈은 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크리스터벨라에 대한 욕망을 삭히지 못한다. 그 와중에 로펌의 VIP 고객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다. 변호에 나선 케빈은 그 거물이 살인범임을 직감하지만,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밀턴이 속삭인다. “이번 일에선 손을 떼도 괜찮다.” 그러나 케빈은 그러지 못한다. 양심의 가책도 그에겐 당연하게 부여된 책무의 일부분일 뿐이다. 부부관계는 파국에 치닫고 끝내 존 밀턴이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메리앤의 폭로가 이어진다. 케빈은 믿을 수 없다. 성폭행당했다는 그 시각, 밀턴은 자신과 함께 재판장에 있었던 것이다. 혼란은 극에 달한다. 메리앤은 교회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며 울부짖는다. 그러다가 결국 메리앤은 자살한다. 존 밀턴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세계의 모든 흑막엔 결국 거대한 물음이 있다. 무슨 대단한 정치적 문제뿐만이 아니다. 일상사에도, 사사로운 인간관계에서도 흑막은 존재한다. 그 어떤 진실도 진실로 들리지 않고, 그 어떤 사실도 사실 자체로 믿을 수 없게 만드는 흑막. 타인뿐 아니라 자신마저 속이며 반드시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어떤 욕망과 허영들. 인간은 그로 인해 때로 삶이 화려해지는 걸 경험하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해 삶의 가장 비루하고 처참한 뒷골목에 자신의 그림자를 숨겨야 할 때도 생긴다.

때론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욕망이 양심을 짓누르고, 이기심이 타인의 말을 귓등으로 튕겨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었다고 믿게 된다. 모든 인간의 갈등은 입장과 태도의 충돌이다. 그런데 그 어떤 ‘입장’이든 ‘태도’든 한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이끌릴 뿐,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늘 자신의 욕망과 본능이 옳다고 여기는 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법은 과연 그걸 제대로 분별하고 가늠해줄 수 있는가. 영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니, 그럴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고 귀뜸해준다고나 하자.

존 밀턴(알 파치노)

밀턴과 케빈이 독대하며 교설을 주고받는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모든 게 까발려진다. 어떻게 케빈이 밀턴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케빈이 왜 메리앤에 소홀하고 재판장에서의 승리에만 집착하게 되었는지, 케빈의 진짜 욕망과 양심은 어떤 방식으로 내분을 일으켜 케빈을 몰락케 하고 메리앤을 죽게 만들었는지, 모든 게 밀턴의 일장 연설로 까발려진다. 나아가 밀턴은 과연 누구이고, 케빈을 현혹하여 영혼과 육체에 균열을 일으키게 한 크리스터벨라는 누구인지도 다 밝혀진다(그러나 종국엔 이 또한 믿을 수 없어진다). 하지만, 호탕을 넘어 괴성에 가까운 밀턴의 목소리로 천둥치듯 폭로되는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나면 뭔가 더 복잡해진다. 인간의 본능과 선에의 희망, 허영과 진실 등 상충하는 가치를 동시에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짓궂음을 탓하는 건 별로 낯설지도 않다. “허영은 내 최고의 기호품”이라는 밀턴의 말은 니체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니체 사후 100여 년 후 복제(?)되는 그 말이 어쩐지 전혀 선언적이지도 역설적이지도 않은, 당연한 말처럼 들리니 뭔가 또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과연 잇새나 미간 어디에 뿔을 숨긴 악마의 현신일까.


현실의 악마는 악마의 얼굴을 한 천사인가

두 선남선녀를 엮어 거대한 흑막을 짜내는 존 밀턴. 그는 과연 누구인가. 괴물이면서 사람이고, 모략자이면서 천재이고, 악마이면서 천사의 이면을 까발리는 존재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첫 장면과 같다. 성폭행 혐의를 받는 남자 교사가 재판을 받는 시골 한 작은 마을의 법정. 그러나 케빈의 선택과 판정이 달라진다. 화장실에 따라온 기자도 그대로지만, 디테일이 다르다. 아주 살짝 이쑤시개를 깨물 듯 첫 장면과 차별화될 뿐이다. 영화는, 그리고 케빈은 첫 단추를 다시 꿰어 결국 마지막 단추까지 질서정연하게 잘 차려입게 되는 것일까. 이곳에는 정말 늘씬하고 매력적인 크리스터벨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법정엔 존 밀턴도 있다. 이 역시 첫 장면과 다르다. 두 선남선녀를 엮어 거대한 흑막을 짜내는 존 밀턴. 그는 과연 누구인가. 괴물이면서 사람이고, 모략자이면서 천재이고, 악마이면서 천사의 이면을 까발리는 존재인가. 만인에게 평등하고 선을 향해 나아가며, 그 어떤 유혹과 실험에도 스스로를 희생하며 결국 악마와 맞서는 존재인가. 어쩌면 존 밀턴은 악마를 가장해 천사를 제대로 보라고 파견 나온 신의 시종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믿는 그 희망과 선과 정당한 욕망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 세심히 살펴보라고 우리를 시험하는 존재.

장마가 끝났다. 빨래가 잘 마른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