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는 아파트 건설이 가속화되었던 시기였다. 국가 주도로 강남이 개발되면서, 한강변 모래밭이었던 압구정동 일대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 2차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듯, 1970년대 후반부터는 많은 한국영화에서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아파트는 선망과 호기심, 그리고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파트는 주인, 즉 거주자를 캐릭터화하는데 쓰이곤 했는데 <O양의 아파트>, <가시를 삼킨 장미> 등의 영화들에서 아파트는 여주인공의 현대적인 삶의 방식이나 자유분방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보여진다.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O양의 아파트> 개봉 포스터


<가시를 삼킨 장미> (정진우, 1979)

특히 <가시를 삼킨 장미>는 아파트의 전경과 이미지, 그리고 당시 아파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영화다. 영화는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 시골 처녀가 도시로 상경해 술집 여자로 전락하는 줄거리를 다룬 영화들(<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꽃순이를 아시나요> 등) 전성기의 후반부에 제작되어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9년도 흥행 순위 20위를 기록한 영화로 상업적으로 메가 히트작은 아니지만, 그 해 대종상 감독상을 받고 마닐라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작품으로 적어도 이슈가 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줄거리는 호스티스 영화의 기본 골자인 젊은 여성의 성적인 타락, 그에 따른 좌절과 죽음 등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주인공 장미는 일류대학(원작에서 이화여자대학교로 설정되어 있지만 당시 검열관들이 학교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을 다니고 있는 부유한 집 외동딸이지만 그녀는 한없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이를 성적인 일탈로 채우고자 한다. 술집에 나가고, 몇 차례의 불같은 교제(?)를 거치는 등 격정의 시간을 보낸 장미는 마침내 ‘세호’라는 남자를 만나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고 절망한 그녀는 거리를 헤매다가 기차에 치여 삶을 마감하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치정극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아파트’는 매우 상징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부감과 롱테이크를 이용해 이제 막 지어진 듯한 새 아파트 단지를 세심하게 비춘다.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부터 한 아파트의 실내로 들어가는데, 바로 장미가 혼자 사는 집이다. 영화는 그렇게 수차례, 찬양하듯 장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경을 보여준다. 매끈하게 지어진 아파트는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장미의 캐릭터를 그대로 대변한다. 모던하고 편리하지만 어딘가 삭막한…., 아파트는 그런 의미에서 장미의 분신(分身)과도 같다.

흥미로운 것은 <가시를 삼킨 장미>가 제작된 1970년대 말은 박정희 정권 하에 이루어졌던 영화법 제4차 개정(1973)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이고 앞서 집행되던 악명 높은 이중 검열과 엄격했던 실사 검열이 유지되어 오던 시기이다. 박유희의 연구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의 영화 검열 기준 중 하나는 근대화의 친화적인 재현이었으며, 특히 빈곤이나 하층민의 생활상을 중점적으로 단속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아파트 장면 및 대형 아파트 단지들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성 이슈들(간통, 여대생의 매춘 행위, 여성의 성적 욕망)을 덮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인 장치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대표 감독 김수용은 검열의 행패가 너무 심해 검열관들만을 위한 희생샷이나 “아부샷” 등을 끼워 넣어 자신이 구하고 싶은 씬들을 보호했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이러한 아파트씬들 역시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파트> (2006, 안병기)

1990년대를 넘어 아파트는 가장 대중적인 주거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영화 속 아파트는 더 이상 신비롭고 모던한 공간이 아닌 평범하고 일상적인 존재로 비친다. 모두가 똑같은 장소에서 살지만 아무도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아파트만의 고유한 특성은 그렇기에 공포영화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름>(2001, 윤종찬), <아파트>, <숨바꼭질>(2013, 허정) 등은 모두 아파트의 익명성과 평범함을 공포의 소재로 삼는 영화들이다. 특히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아파트>는 ‘아파트’라는 일상의 공간을 죽음의 공간으로 치환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포의 근원이 사람들의 죽음이 아닌, 그것을 향한 주민들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세진’(고소영)은 고층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세진은 건너편 아파트의 불들이 동시에 꺼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그날 이후, 매일 밤 맞은편 아파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게 된다. 정확히 밤 9시 56분이 되면, 건너편 아파트의 불이 동시에 꺼지는 것이다. 한편, 건너편 아파트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세진은 매일 밤 9시 56분, 아파트의 불이 동시에 꺼진다는 것과 그때마다 아파트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급한 세진은 이를 막기 위해 주민들에게 알리지만 오히려 범인으로 의심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된다. 아파트의 ‘익명성’은 영화, <아파트>에서 중요한 장르적 장치다. 익명성으로 인해 죽음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고 주민들은 죽음을 은폐하려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엄태화)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일어나고 하루아침에 서울은 폐허가 된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오직 황궁 아파트만 살아남았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은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고,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된 그들은 새로운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며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덕분에 지옥 같은 바깥세상과 달리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더없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고 생존의 위기가 커지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그 사이에 영탁의 엄청난 비밀도 드러난다.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들은 철저히 브랜드화, 계급화되었다. 아파트의 브랜드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계층과 사회적 지위를 어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아파트는 비행기의 좌석 등급만큼이나 명확하게 계급을 정의할 수 있는 지표가 되었다. 엄태화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이자 이번 여름의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에 이어) 마지막 한국 블록버스터 프로젝트인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서열화된 아파트들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다. 영화는 ‘노동 계급’에 해당하는 아파트가 천재지변으로 인해 계층이 상승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파트의 계급 혹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계급적 전복이라는 설정은 <하이 라이즈> 같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 바 있다. 다만 ‘재난영화’라는 장르적 프레임을 선택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계급의 전복에 따른 인간들의 변화가 더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슬픔의 삼각형>이랄까.

기존의 비슷한 소재, 주제를 다뤘던 영화들과의 유사성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가장 큰 성취라면 재난 서사 (특히 한국 재난영화) 에서 남용되는 맹목적 ‘가족주의,’ 혹은 가족 신화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파트를 채우는 장본인들은 (<싱크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단란한 4인 가족이 아닌, 신혼부부이거나 싱글맘, 그리고 독거노인이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리더 역시 가족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해운대>, <감기> 등)가 아닌 주민회장 엄마, 청년, 간호사 등 다양한 가족 모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대지진으로 인해 이들의 계급이 상승하고, 급기야는 ‘드림 팰리스’ 사람들까지 몰아낼 정도의 권력을 갖게 되는 것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황궁 거주민들이 대부분 서민이거나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후반에서 인물의 정체에 있어 반전이 일어나긴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마도 올여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큰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그럼에도 영화가 ‘아파트’라는 아이콘을 통해 보여주는 비판과 풍자의 레퍼토리는 그 무게가 적지 않다. 엄태화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창조한 ‘디스토피아’는 <가려진 시간>에서도 그랬듯, 현재 이 사회와 너무나도 닮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