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증명서를 요구할리도, 당사자에게 구태여 전화를 걸어 확인할리도 만무했다. 부모님이 가정환경조사서를 볼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괜히 주변을 한번 힐끔거린 후 앞에 놓인 종이에 어머니의 학력을 '고졸'로 휘갈겼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 다시 말해 '초졸'이다. 혼자서 행정 서류를 작성하지 못해 땀을 훔치는, 간단한 영어 단어를 몰라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어머니가 창피했다. 누가 볼까 두려워 일기장에도 적지 못한 이 못난 마음을, 나는 난생처음 '가정환경조사서'에 꾹꾹 눌러 담았다.
영화 <비밀의 언덕>의 주인공 열두 살 소녀 명은(문승아)도 나처럼 부모가 부끄럽다. 젓갈 냄새가 밴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마뜩잖고, 아침이 밝아도 잠만 자는 아빠의 게으름이 거슬린다. 어려운 이웃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의 명은에게 인정도 포용도 없는 가훈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가시처럼 박힌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할 열두 살. 부모님 직업을 묻는 담임 선생님 애란(임선우)의 질문에 명은은 기어이 엄마를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로, 아빠를 종이 만드는 회사원으로 거짓 등장시킨다. 최초의 거짓을 자양분 삼아 몸집을 키운 또 다른 거짓은 모진 세계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명은이 비빌 언덕이 된다.
※ 이하 내용은 <비밀의 언덕>의 스토리 전개를 포함하고 있음을 명시합니다.
그런 명은도 글을 쓸 때만큼은 진심이 된다. 담임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글짓기 대회를 준비하며 명은은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쓰고 또 쓴다. 통통 튀는 선거 공약을 내세워 반장에 당선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학급을 운영하는 당찬 명은은 글짓기 대회 준비도 설렁설렁하지 않는다. 학교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뒤져가며 글감에 대해 익힌 뒤,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세심하게 단어를 고른다. 뛰어난 재능은 없지만 자신의 경험을 성실히 녹여 글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자기만의 것이다. 소녀의 세계는 그렇게 글쓰기를 통해 조금씩 넓어진다.
거짓말로 지탱돼 온 명은의 세계는 그러나, 전학생 혜진(장재희)의 등장과 함께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아가씨 골목에서 사장님을 하세요"라는 거침없는 고백만큼이나, 혜진의 글에는 십 대답지 않은 솔직함이 담겨있다. 명은이 평화에 대해 “통일도 한 걸음부터”라는 제목의 모범답안 같은 글을 쓰는 동안, 혜진은 부모의 이혼 사실부터 타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엄마의 직업까지 글에 녹여 자신만의 평화를 정의한다. 세상은 솔직한 혜진의 글을 높이 평가한다. 어떻게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냐는 질투 섞인 명은의 질문에, 전학생의 답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우리는 한 시간 만에 써! 있는 그대로 써. 되게 쉬워.”
작가들은 모두 서로의 어깨 위에 서서, 서로의 아이디어와 재주와 플롯과 비결을 이용한다고 했던가. 명은은 혜진의 글쓰기를 보며 거짓말로 메꿔왔던 관계들을 응시해 본다. 솔직한 글쓰기의 리듬을 찾고 거기에 단어를 맞추기 시작한다. 그때 마침 도착 한 글감이 '가족'이다. 성원시가 주최하는 글짓기 공모전에 명은은 두 편의 글을 제출한다. 하나는 늘 하던 자신의 방식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친구 혜진의 작법을 빌려와 자신의 내부에서 길어 올린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로 채웠다. 가족에 대한 심정을 돌아가신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여과 없이 드러낸 후자의 글은 명은에게 대상을 안긴다. 명은의 편지 글은 영화 속에서 인상 깊게 구현되는데, 명은이 알고 있는 사실들과 알지 못하는 가족의 이면을 교차시키며 진실과 거짓을 선명하게 나눌 수 있다 믿는 것은 어쩌면 착각이라 말한다. 명은의 시선만으로 재단된 편지 속 세계는 비로소 진실이라고 도달한 그곳에도 객관적 진실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토록 바라던 상을 타지만 명은을 웃게 하지 못한다. 대상을 받은 작품 전문이 지역 신문에 공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상처받을 가족들이 걱정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명은은 결국 대상을 포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받아와 아무도 모르는 언덕 한 켠 어딘가에 묻는다. 비밀스럽게.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글에 상처받을 가족을 걱정하는 명은에게 "억지로 솔직해질 필요 없어, 솔직한 게 꼭 좋은 건만도 아냐"라고 말하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모두 담겨있다. 영화는 혜진과 명은, 둘 중 어느 하나의 편을 들지 않는다. 진실한 글쓰기만이 참이고 거짓된 고백은 무가치하다 속단하지 않는다.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가혹한 시선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던 두 소녀의 거짓과 진실이 참 많이 닮아있음을 비추며, 글에 빠져드는 과정,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고뇌하는 글쓰기, 언덕을 오를 결심, 파묻는 행위 모두를 옹호할 뿐이다. 그래서 겨우 솔직해진 명은이 그것에 딸려 오는 진실의 무게가 버거워 다시 거짓으로 그 솔직함을 덮기로 결심했을 때, 우리는 그저 그가 오르는 언덕이 너무 가파르지 않기만을 바라게 된다.
<비밀의 언덕>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에게 다큐에 가까운 영화일 것이다. 글 서두에 숨겨왔던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자니, 그 시절 혜진처럼 솔직했던 한 친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교대 면접을 보기 위해 꽁꽁 언 운동장 위에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친구와 나는 어느샌가 왜 선생님이 되고 싶은가 따위의 심오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기에, 자기는 꼭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고백이 나를 때린 건 그때였다. 스치듯 지나간 한 마디는 두고두고 내 안에 남았다. 지금 그 친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는 글을 쓴다. 사랑받기 위해 거짓말했던 나, 어쩌면 약점이 될 수 있는 가족사를 꿈을 이뤄내기 위한 동력으로 삼은 친구, 거짓 혹은 솔직함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불편한 시선을 방어해야 했던 세상의 모든 명은이와 혜진이들. <비밀의 언덕>은 이 모든 삶의 주름을 통과하며 이만큼 성장한 우리에게 수고했다 토닥인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