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자 하는 말이 비교적 명확했던 전작 〈겟 아웃〉(2017)과 달리, 조던 필의 두 번째 장편 〈어스〉(2019)는 수많은 추론과 해석을 낳았다. “미 대륙 밑에 도사리고 있는 수천 마일의 터널 속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긴 지하인 ‘테더드’들이 살고 있고, 지상의 짝꿍이 하는 모든 행동을 따라해야 하는 운명에 묶인 탓에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설정은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건 무엇을 상징하는 거지? 왜 테더드들은 지상의 인간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며, 그게 의미하는 바는 대체 뭐지?

누군가는 테더드는 백인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아직까지 고통 받고 있는 아메리카 선주민에 대한 은유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미국 사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툭하면 추방되고 무시당하는 멕시코 이민자에 대한 은유일 것이라 했다. 혹자는 잘 배우지 못하고 말도 어눌한 테더드들의 붉은 옷차림을 보고, 교육 수준이 낮다고 늘 조롱 당했던 트럼프 지지자들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캠페인 모자를 떠올렸다.

글쎄, 그 어떤 구체적 대상도 〈어스〉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진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추려 들수록 헐거워진달까. 〈어스〉는 오히려 최대한 초점을 흐려서 포괄적으로 적용했을 때 더 잘 보이는 우화에 가깝다. 인종과 국적, 성별과 경제적 계층, 지역과 정체성 등을 망라하는 모든 계급 격차 서사에 〈어스〉는 느슨하게 들어맞는다. 지상 위에서 인간들이 요트로 상징되는 중산층의 삶을 즐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동안, 지하 세계에선 테더드들이 인간들의 행동양식을 어설프게 따라하면서 그 격차를 더 절절하게 느낀다. 정작 인간들은 테더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말이다.

이는 마치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계층이 추구하는 가치와 행동양식이 사회 모든 계층에게 강요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서울 말씨가 ‘표준어’가 되는 동안 각 지역의 사투리는 놀림감이 되고, 결혼으로 맺어진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며, TV 예능을 통해 중산층 이상 계층이 누리는 라이프스타일이 삶의 표준인 양 제시되는 현상. 그리고 〈어스〉 속 인간들이 테더드의 존재를 모르듯, 서울 수도권 시민들/정상가족 구성원/중산층 이상 시민들은 지방민/정상가족 이탈자/빈곤층의 삶을 모른다.

〈어스〉는 그렇게 주류의 이데올로기를 따를 것을 강요 당하며 그 존재가 은폐 되었던 비주류/하층 계급이 어느 날 고개를 들어 “우리도 너희와 같다”고 시민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게이브(윈스턴 듀크)의 질문에, 테더드인 레드(루피타 뇽오)는 “우리는 미국인이다”라고 대답한다. 지상 위를 걸어다니며 햇살을 쬐고 여유를 누리던 너희만 미국인인 게 아니라, 그 밑에 은폐된 채 토끼고기를 뜯어먹으며 고통받던 우리도 미국인이라고. 우리가 너희의 발 밑에 도사리면서 너희 행동이 낳은 고통을 다 감당하고 있었노라고.

그 대목에서 ‘우리’라는 의미와 ‘United States’의 약어 두 가지로 다 해석할 수 있는 영문 원제 ‘US’는 미국 관객들을 정확히 겨냥한다. “우리도 너희와 같다”는 선언, “‘우리’도 ‘우리’의 일원이다”라는 외침, 박탈 당하고 유예 당해 온 우리의 권리를 내놓으라는 피울음 앞에서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와 가족들은 겁에 질린다. 미국인이 아닌 우리는 이 비유에서 자유로울까? 그럴 리 없다. 우리 중 대부분은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선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밟고 있는 머리가, 아니, 머리인 줄도 몰랐던 발 밑의 돌이 어느 날 입을 열어 진실을 소리친다고 생각해보라. 그들이, 땅 위로 올라와 손에 손을 잡고 늘어서서 제 존재를 시위한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우린 이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한다. 그저 레드와 그의 테더드 가족들이 자신들을 해코지할 것이 겁났던 것 뿐일까?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렸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지상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타인을 약탈해 테더드로 만들었다는 설정을 본다면, 그건 단순한 해코지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죄책감에 가깝다. 지상의 인간과 테더드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게 아닌데, 그 계급을 가르는 선은 사실 약탈에 의존해 그어진 것이라는 죄책감.

그 죄책감이 낳은 공포를 〈어스〉는 정면으로 응시한다. 저들은 우리가 저지른 폭력과 약탈을 고스란히 갚으러 올 거야. 언젠가 저들이 우리의 뒷덜미를 붙잡고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그건 ‘인과응보’에 대한 공포인 동시에 ‘추락’에 대한 공포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억압했던 것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라는 공포와, 나와 상대를 구분하는 선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으니 언제든 다시 귀신의 집을 지나 거울의 방을 거쳐서 지하세계로 끌려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

이는 같은 해에 발표된 봉준호의 〈기생충〉(2019)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김기택(송강호)과 박충숙(장혜진)이 ‘지하실의 남자’ 오근세(박명훈)와 그의 가족 국문광(이정은)에게 모질었던 것은, 충숙의 일자리가 문광에게서 약탈한 것이라는 죄의식과 수상할 정도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기택과 근세 사이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대만식 카스테라 집을 열었다가 망한 기택과 근세 사이의 선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기택이 굴러떨어져서 도달할 곳이 바로 근세가 있던 자리이고, 그렇기에 기택과 충숙은 더 폭력적으로 근세와 문광을 제압한다. 마치, 애들레이드가 레드를 대하는 것처럼.

그래서 〈겟 아웃〉이 흑인의 육체적 능력을 동경하는 방식으로 뒤틀린 인종주의와 우생학에 대해 꼬집는 영화라면, 〈어스〉는 계급과 계층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든 들이대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영화다. 미국에서 온갖 해석이 다 등장했던 이유도, 〈겟 아웃〉처럼 직설적인 코멘터리를 기대했던 이들이 다소 실망했던 이유도,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 은유와 상징이 생생하게 살아 어떻게든 해석할 방향이 열린 작품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계층에 대한 보편적인 공포 덕분이었다. 억압된 것들은 언젠간 반드시 터져나와 세상에 제 존재를 드러내며 시민권을 주장할 것이라는 공포.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