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론 겨우 거울에 비친 허상을 보고 자신이라 믿게 된다. 정신적으론 어떠한가. 자신의 생각이나 기억, 그리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발생한 체험에 의해 구성된 자아를 자신이라 여기게 된다. 어쩌면 그게 더 정확한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명백한 객체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을 자신 아닌 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2014)는 바로 그러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도플갱어』를 각색했다. ‘도플갱어’는 간단히 말해 ‘분신’을 뜻한다. 자신과 외모도 생각도 똑같은, 그러면서 자신 아닌 존재. 서양에선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어느 한쪽이 죽는다, 는 속설이 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물리학적, 또는 철학적, 또는 종교적 함의를 읽을 수도 있는 설이다.

영화는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라는 문장이 화면 중앙에 뜨면서 시작한다. 누구의 말인지는 병기되어 있지 않으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의 개념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그다음, 이상한 비밀스러운 고급 연회장이 등장한다. 결혼반지를 끼고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쇼를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성이 등장하고 고급스러운 접시에서 커다란 거미가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여자가 뾰족하고 기다란 힐을 신은 채 거미를 짓밟는다.

그러곤 어느 대학의 강의실. 역사학 교수 아담 벨(제이크 질렌할)이 강의 중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정치적 권력 속성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다가 강의가 끝난다. 아담에겐 메리(멜라니 로랑)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별 대사도 없이 메리와의 성교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어딘지 건조하고 공허해 보인다. 한 친구가 아담에게 영화를 보라고 권한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영화를 무료하게 보고 있는 아담. 갑자기 눈이 동그래진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배우가 출연하는 것이다. 아담은 검색을 통해 그 배우의 이름을 알아낸다. 알렉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모두 찾아내서 본다. 역시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아담은 알렉스의 집과 전화번호마저 알아낸다.

알렉스의 아내 헬렌(사라 가돈)이 전화를 받는다. 헬렌은 알렉스가 장난치는 것으로 여긴다. 아담과 알렉스는 목소리와 말투마저 똑같은 것이다. 아담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아담과 알렉스가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갈등에 사로잡힌다. 서로의 아내와 여자 친구마저 그 혼돈의 늪에서 서로를 기만하고 자신의 남자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고 나와 악수할 수 없다

대략의 줄거리 개요가 이러하다. 뭔가 뒤죽박죽이고 잘 파악하기 힘든 상징(특히 거미)들이 불쑥불쑥 등장하면서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결국 알렉스도 아담도 파국에 이른다는 결론인데, 이게 실재인지 꿈인지 누군가의 환상인지 영화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불친절해 보인다. 혼돈은 여전히 해석되지 않고, 혼돈 그 자체로 더 크게 범람한 채 보는 이의 의식마저 혼란스럽게 한다. 보고 나서 자꾸 거울을 보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분명 나인데 또 내가 아닌 듯하다.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가 저절로 떠오른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고 나와 악수할 수 없다. 이상은 단순히 문학적 환상이나 기교로 시를 쓴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기하학과 수학, 물리학과 건축, 미술과 문학이 결합된 그만의 세계가 존재했다. 그래서 더 천연덕스럽고 괴이해 보이나, 뜯어보면 삶의 단면들이 감추고 있는 무수한 혼란과 이성적 순리로는 분석 불가능한 질서 체계를 꿰뚫은 작품들을 썼다.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교전, 그리고 우주의 해석되지 않은 구성 방식에 대한 집요한 해찰. 그렇게 그는 미쳐 죽었다.

<에너미>를 보며 이상을 떠올린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보는 이마다 각자의 체험에 연계된 ‘누군가’나 ‘무엇’을 떠올렸을 거다. 이상을 생각하며 영화를 해석하려 드는 것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혹은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되고자 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장르 불문, 지구상에 차고 넘친다. 모든 문학은 결국 자신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을 기반으로 한다. 자아 정체성에 대한 모든 예술적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해석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은 질서’라면 ‘해석’하는 순간, 모종의 ‘질서’로 정립되어 사람을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해소되지 않는 욕망, 결국은 인류의 원죄?

아담의 강의 장면에서 인류의 권력 체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그렇게 읽힌다. 권력은 질서를 맹종케 하는 강력한 힘이다. 개인의 삶에 대한 전제조건을 강압하고 통제하려는 조직의 힘이 작동하여 모든 혼돈을 제거해야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아담은 그 스스로 자신의 해소되지 않은 욕망과 그로 인한 울분으로 가상의 나를 만든 건지도 모른다. 아담의 어머니를 통해 아담의 원래 꿈이 배우였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유일하게 던져주는 분명한 힌트와도 같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인류 최초의 남자를 의미한다. 그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라는 신의 사명을 받고 지구에 나타난 자다. 하지만 결론은 어떠했는가. 결국 인간은 자체 모순과 욕망과 호기심이라는 질병(?)으로 스스로 병드는 존재 아니던가.

물론 신화 속의 이야기로 모든 걸 꾸며내고 덮을 순 없다. 나로선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배우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성찰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다. 왜 하필 배우였을까. 범박하게 추리자면,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배우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오욕칠정과 욕망을 대리 표현하며 보는 이를 웃고 울리고 각성케 하는 일. 어쩌면 그 자체가 분열되고 파괴되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기묘한 업을 천직으로 삼는 자. 그렇게 해야만 더 분명한 자기자신일 수 있는 자.

배우는 일견 화려해 보인다. 굳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지 않더라도 그렇다. 끊임없이 변신하고 변장해야 다다를 수 있는 어느 궁극의 지점이 어떤 배우에게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워야 배역이 완성되지만, 또 세상에 둘도 없는 분명한 자신이어야만 배역 속으로 온전히 스며 타인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의 화려함은 외면적이라기보다 내재적이다.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수많은 자아들을 한없이 다듬고 깨우치고 다시 부술 줄 알아야 진정한 배우가 된다. 그건 일종의 자기학대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다. 아담은 아마도 역사라는 분명한 궤적과 질서를 벗어나 진짜 자기를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렉스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불가능한 욕망을 채우는 동시에 그 욕망과 싸우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자 모든 일상이 흔들리고 세계가 드리운 거대한 거미의 거미줄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거미를 밟지 말고 조용한 곳에 숨겨라

그 거미를 밟지 마라. 조용히 안 보이는 곳으로 숨겨 두라. 혼돈은 결코 해석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로 역력하고 확실할 뿐이다. 나의 ‘적’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거미는 어디든 존재한다. 거미는 생물계 최고의 공간 설비 기술자다. 거미줄의 정교함 및 점성과 탄성을 인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거미는 실재인 동시에 상징이다. 거미의 형태를 가만히 보면 사방으로 빛을 분사하는 태양을 닮아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원에서 여덟 개의 가지로 무수한 연결망을 조직한다. 인간은 어쩌면 세계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묶여 있는 미미한 벌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일은 어쩌면 불가항력일지도 모른다.

거미를 짓밟아도 결국 거미줄 속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마주치는 자는 그 어떤 일상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다. 나는 나를 모른다. 아니, 몰라야 한다. 다만, 당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당신만의 거미를 어느 한때 마주 보길 바란다. 그 거미를 밟지 마라. 조용히 안 보이는 곳으로 숨겨 두라. 혼돈은 결코 해석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로 역력하고 확실할 뿐이다. 나의 ‘적’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