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데뷔했던 화가가 마지막 전시회를 연다. “그림에 대한 내적 동기를 완전히 상실”했단다. 은퇴 이후 그는 멋대로 영역을 넓혀 나간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영화를 만들어 감독이 됐다. 정식 등단 코스를 밟지 않은 채 책도 두 권 펴냈다. 2019년에 출판한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는 ‘나의 공황장애 분투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2년 후에 나온 에세이집 『피아노를 치며 생각한 것들』도 제목만큼 긴 문구 ‘좋아하는 일을 좇는 삶에 관하여’를 표지 중앙에 적어 놓았다. 부제와 수식이 붙은 책처럼 그에게도 이러쿵저러쿵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경로를 이탈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캔버스, 카메라, 키보드 등 그가 다른 사물을 손에 쥘 때마다 주변에서는 정해진 테두리를 넘어간 의도가 뭐냐고 질문했을 것이다. 아니면 화가, 감독, 작가라는 타이틀을 열거하는 데 지친 나머지 ‘종합예술인’이라고 부르며 치켜세웠을지도 모른다. 호칭에 스며든 기대와 의심 모두 배반하겠다는 듯 그는 스스로 ‘예술잡상인’이라고 칭하더니, 별안간 목을 가다듬고 수줍게 말한다. “꼭 이렇게 소개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오재형입니다.” 취미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몰두했던 피아노, 그는 새로운 대상을 통해 또 한 번 타이틀을 갱신한다. <피아노 프리즘>은 오재형이 연주자로 무대에 서서 관객과 만나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기엔 어떤 부제가 어울릴까. ‘건반으로 세상을 비추는 법’이 좋겠다. 흑과 백뿐인 악기 앞에 마주 앉아서 그는 광주와 용산을 떠올리고 강정마을 시위 현장과 세월호 유가족을 바라본다. 타오르고 침잠하는 마음의 스펙트럼을 펼쳐 놓는 순간, 피아노는 그가 바란 대로 거대한 프리즘이 된다.
<피아노 프리즘>은 예술가 오재형의 바이오그래피이자 포트폴리오이며, 신인 피아니스트의 콘서트 실황을 기록한 메이킹 필름이다. 피아노는 취미와 직업, 메인과 서브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그는 피아노 학원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도 실력이 늘지 않아 고전하는가 하면, 정통 클래식 연주자들이 선다는 ‘더 하우스 콘서트’ 무대에서 마른침을 삼킨다. 한편, 작업실에 틀어박힌 그는 “또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설명이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거듭 일을 벌인다. <피아노 프리즘>은 셀프 영화다. 연출, 제작, 촬영, 편집, 미술, 음악, 출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할을 도맡는 사이, 오재형은 지금껏 자신이 생산해 낸 예술 작품을 영화 속에 활용한다. 대학교 졸업 전시회에서 선보인 유화 위에 은퇴 선언문 대신 이별 편지를 쓰는 과정을 촬영하거나, <강정 오이군>(2015) <덩어리>(2016) <블라인드 필름>(2016) <보이지 않는 도시들>(2018) <봄날>(2018) 등 직접 연출한 단편에 피아노 연주를 덧입혀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를 완성하는 식이다. 자연스레 <피아노 프리즘>은 애니메이션, 댄스필름,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 전작에서 시도했던 다양한 장르와 이미지를 물려받는다. 감독은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건반 위로 윤슬이 일렁이게 하고, 환상 소설의 한 페이지처럼 들리는 잠꼬대를 길잡이 삼아 가상 세계로 입장한다.
이미 시청각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인데 오재형은 판을 더 열어젖힌다. <피아노 프리즘>은 배리어프리 영화다.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기본’ 버전을 마련한 상태에서 별도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배리어프리 단일 버전을 기획하여 완성했다. 그렇다고 시청각 장애를 소재로 다루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겪은 공황장애와 단편 <양림동 소녀>(2022)를 공동 연출한 어머니 임영희 감독이 뇌졸중으로 신체 마비를 경험한 것이 장애 이슈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됐다고 밝히긴 했으나, 감독은 <피아노 프리즘>에서 장애에 관해 말하는 데 애쓰지 않는다. 비장애인에게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관람을 방해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화면 해설과 자막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주요 장치로 대두된다. 중반부까지 화면 속 정보 제공에 머물렀던 해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시화되지 않는 연출자의 심리에 집중한다. 추상에 깃든 고민과 욕구를 문장으로 변환하면서 목소리는 빠르기를 조정하고, 관객이 무심코 지나칠 법한 순간을 붙잡으며 감독 스스로 오디오 코멘터리를 남기기도 한다. “저는 우주를 항해하는 선장처럼 정면을 바라보며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라고 말할 때, 오재형은 객관적 관찰자의 음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제 모습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피아노 프리즘>의 야망은 독특하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어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영화가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목표에 가닿기 위해 온갖 수단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감독은 시각과 청각을 바탕으로 한 매체, 즉 영화가 지닌 제3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미술, 음악, 글, 영화를 통합하면서 <피아노 프리즘>은 능청을 떤다. 그 무엇도 아주 대단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유일한 화자이자 주인공인 감독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불리는 애매한 위치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 지적받으면서도 실실 웃더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작곡 의뢰부터 현장 세팅까지 진지하게 매달린다. 감독으로 GV에 참여하는 그럴듯한 모습과 영상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다가 실수하는 모습을 교차한다. 그는 옷을 번갈아 입으며 프로와 아마추어를 오가고, 활동가와 창작자의 역량을 가늠하다가 부담이 밀려들기 전에 태세를 전환한다. 그러한 유연함을 방패 삼아 <피아노 프리즘>은 방구석에서 사회 곳곳을 탐방한다. 영화 속 오재형은 보편적 경로를 따르지 않는 청년이다. 단계와 자격을 묻는 입들과 거리를 두며 재차 데뷔하고, 샛길로 빠지기를 자처하며 폭력으로 얼룩진 풍경을 끌어안는다. 도처에 자리한 부조리와 차별 앞에서 그는 목숨까지 걸며 저항하진 못하지만, 목숨을 걸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러다 어둠이 내려앉은 광화문 거리라든지 옛 전남도청 근처에 위치한 광주의 골목길을 피아노 건반으로 2분할한 화면이 등장하면 구분 짓기가 무색해진다. 퇴근길에 바삐 걸어가는 직장인과 피아노 연습을 마친 후 터덜터덜 걷는 감독은 얼마나 다른가. 넋이 나간 얼굴로 “고통스러운 몸짓”을 표현하는 무용수와 그 순간 흐르는 음악은 과연 하나가 아닌가. 소심한 마음을 대범하게 펼쳐 놓으면서 <피아노 프리즘>은 돌고 돌아 용기를 전한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관객과 대면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피아니스트를 통해, 적당히 인정받는 것보다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데 가치를 두는 창작자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영화는 세상과 내면의 연결고리를 찾아 나간다.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빛깔로 발광하는 감정과 감각을 한꺼번에 보고 듣는 경험은 아름다움 너머를 겨냥한다. 세상은 부실하고 피아노 연주 실력은 제자리를 맴돈다. 다만, 행복과 불행이 뒤섞인 그곳에서 선율은 작은 파동을 이루며 뻗어 나간다. 도착지를 정해 놓지 않은 덕분에 더 멀리 탐사하는 우주선처럼 영화는 서툰 솜씨로나마 낯선 대지에 착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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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