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의 첫 SF[컨택트]가 개봉했다. 올가을 공개될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이어 다음 차기작으로 []을 확정지은 그는 이제 SF로 완전히 관심을 돌린 듯하다. 지난 124일 발표된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8개 부문에 오르며 작품성도 인정받은 이 영화는 테드 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항간엔 영화화되기 어려운 작품이란 소릴 듣기도 했는데, 드니 빌뇌브는 보란 듯 원작의 줄기를 잘 살려내며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화두를 던지는 걸작으로 완성시켰다.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에이미 아담스가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탈락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영화의 감흥마저 가라앉는 건 아니다.

<컨택트> 촬영 현장의 에이미 애덤스와 드니 빌뇌브

아이를 잃은 언어학자 루이스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곧이어 전 세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선들이 도래하며 혼란에 빠진 세상을 비춘다. 외계에서 갑자기 등장한 존재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느낀 각 정부들은 그들이 온 이유와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미국에선 앞서 소개된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 등이 외계인과 접촉할 인물로 선택된다. 외계인과의 조우를 통해 의문의 신호들을 해석하고,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관계를 맺고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하는데, 시시각각 변해가는 국제 정세로 인해 컨택트 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그들이 방문한 목적을 제때 알아낼 수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나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그리고 부정적이긴 했지만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이나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 최후의 날], 혹은 엉뚱한 상상력을 표출했던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 등 여러 외계 문명과의 첫 만남을 다룬 SF영화들이 있지만,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는 이들 작품과는 또 다른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다. 스릴과 액션, 유머와 공포는 살짝 접어둔 채 지적인 물음과 삶에 대한 의미 그리고 드니 빌뇌브의 주된 테마이기도 한 가족에 대한 감성까지 건드리며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시간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역할 뒤엔 음악을 맡은 요한 요한손의 힘이 컸다.

음악이라고 하기엔 화음이나 멜로디가 전혀 부재한 이 차갑고 무거운 소리들의 집약은 인위적이고 드라이하게 배치돼 거의 울림에 가깝지만, 영상의 경이로움과 스토리의 감동이 만나며 놀라운 상승 작용을 만든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엄숙하고 전위적인 스코어는 원초적이고 직접적으로 관객의 피부에 와닿으며 감동적이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드니 빌뇌브와 요한 요한손이 함께 했던 모든 작품들의 스코어가 그러했다. 어떤 특정한 테마나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남기보다 소리 그 자체의 잔향과 존재감을 통해서 분위기를 자아내고 감정을 직접 전달, 체험케 만든 셈이다.

요한 요한손

 인디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시작해 재즈와 펑크, 메탈과 일렉트로닉 그리고 드론을 포함한 포스트모던 클래식까지 온갖 장르의 경험을 쌓은 그는 21세기에 들어서며 영화음악으로 범주를 넓혔다.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란드에서 영화음악과 솔로작업을 병행하던 그는 2007년부터 세계 각국으로 시야를 확장하며, 헝가리와 독일, 프랑스, 영국과 중국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들을 소화했다. 드니 빌뇌브가 자신을 픽업한 [프리즈너스]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그는 이후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성공으로 비로소 뒤늦게 영화음악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골든 글로브를 처음 수상한 아이슬란드인이 되기도 한 그는 이후 드니 빌뇌브와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시카리오]2연속 오스카에 지명되며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미국비평가협회상에서 <시카리오> 팀

요한 요한손의 무채색에 가까운 톤에 미니멀한 선율,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사운드디자인은 담담하고 절제된 드니 빌뇌브의 연출 철학과 묵직한 스타일에 재단한 것마냥 잘 어울린다. 얼핏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이고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지만, 그 안에 활화산 같이 타오를 법한 감정들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품어낸 드니 빌뇌브의 캐릭터들처럼 요한손의 음악들 역시 정중동의 묵직하고 느릿한 소리들을 풀어내지만 그 안엔 격정적이고 강렬한 힘이 꿈틀댄다. 그는 소리 이면의 의미들을 담아내고 설계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나고 적합하다. 드니 빌뇌브와 함께했던,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영화음악 4편에 대해 살펴본다.


<프리즈너스>
(Prisoners, 2013)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지 않은 각본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을 선정하는 블랙 리스트2009년 올랐던 작품으로, 아동납치사건을 배경으로 용의자를 쫓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진범을 찾아 헤매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는 범죄의 실체와 가족과 사건 당사자들 간의 고통이 생생히 전해지는 영화의 입체적인 질감은 드니 빌뇌브의 느릿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사려 깊은 연출력 덕분인데, 여기에 휴 잭맨과 제이크 질렌할, 멜리사 레오와 폴 다노, 마리아 벨로와 비올라 데이비스, 테렌스 하워드라는 쟁쟁한 배우들의 열연과 압도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로저 디킨스의 촬영이 덧붙여지며 엄청난 범죄 드라마를 완성지었다.

요한 요한손은 그런 영화에 꼭 맞는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명징한 테마와 뚜렷한 구성을 취하지 않은 채, 희미하면서도 느릿한 진행으로 불안과 초조함을 고조시킨다. 잿빛의 스트링과 신시사이저의 초기 형태인 옹드 마르트노 그리고 유리 실린더의 진동음 소리를 내는 크리스탈 바스쳇 등을 활용하며 흐릿한 안개 속에 갇힌 듯 답답한 피해자 가족들의 상황과 범인을 찾지 못한 형사의 심정을 절묘하게 묘사해간다. 미니멀한 사운드 안의 화성과 하모니를 중시하기보단 소리 자체의 질감과 무게감을 통해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한손의 스코어는 드니 빌뇌브와의 협업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 기반을 확실히 닦아낸 게 바로 이 작품이다.

앰비언트에 가까운 무채색의 소리들이 위협적이고 경고하듯 울리는 스트링 사이에 깔리며 영화의 어두운 정서와 긴장감을 담는 것은 물론, 여성 보이스와 노이즈, 일렉 톤을 적절히 구사하며 아방가르드한 사운드의 총체를 들려준다. 마치 교회 오르간처럼 경건하게 다가오는 크리스탈 바스쳇의 소리는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안식처럼 다가오지만, 동시에 잡히지 않는 범인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과 미스터리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간 유럽 변방에서, 그리고 독립영화에서 떠돌던 요한 요한손의 진가를 단박에 입증해보인, 그의 첫 명함과도 같은 사운드트랙이었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
(Sicario, 2015)

[프리즈너스][에너미]로 가볍게 몸을 풀은 드니 빌뇌브가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 여태껏 보지 못한 생동감과 긴장이 활어처럼 꿈틀대는 마약 카르텔 소탕 스릴러였다. 일반적인 범죄액션물과 달리, 탁월한 캐릭터들 간의 심리와 하드보일드한 스타일, 사실감 넘치는 생생한 스토리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전쟁처럼 벌어지는 비밀작전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역시나 전작처럼 에밀리 블런트와 베네치오 델 토로, 조슈 브롤린 등 좋은 배우들이 포진되어 있으며, 어떤 장르에서도 자신의 몫을 200% 발휘하는 명촬영감독 로저 디킨스가 뛰어난 영상을 제공한다. 여기에 요한손의 호러영화음악에 가까운 스코어 역시 인상적이기 그지없다.

[프리즈너스]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감정적인 선마저 제거해버린 듯 공허하고 차가운 그의 스코어는 영화만큼이나 냉혹하고 무시무시하며 압도적이다. 강한 타악이 전면에 나서 파워풀하게 약동하고 있으며, 앰비언트와 노이즈가 가득한 사운드디자인은 거친 황무지로 가득한 국경 지대의 살벌한 풍광과 애수를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트레몰로 가득한 기타는 일말의 양심과 회한, 고뇌를 의미하며, 끝없이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침전된 스트링과 희생자들처럼 울부짖는 관악기들의 조화는 왜 이 스코어가 만장일치로 각종 음악상들에 노미네이트되었나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전작처럼 테마나 멜로디는 가차 없이 거세되고 축소되었으며, 다양한 소리들의 중첩과 충돌을 통해 위압감과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마치 지옥도를 보듯 생생하게 잡히는 폭력과 야만의 사운드다. 이 장대한 인더스트리얼 레퀴엠에 그나마 일말의 희망의 빛을 선사하는 건 가녀리지만 힘있게 울려 퍼지는 여성 보이스이고, 이는 잔혹하게 때론 거칠게 범죄를 사냥해가는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들을 위로하고 용서해준다. 골든 글로브에선 비록 외면받았지만,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로 2년 연속 오르며 요한 요한손의 지명도를 높인, 본격적인 그의 시대를 알린 사운드트랙이다.


<컨택트>
(Arrival, 2016)

드니 빌뇌브와 요한 요한손의 세 번째 협업은 둘 다 SF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영화, [컨택트]였다. 영화의 형식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매만지는 솜씨가 가히 장인에 이르렀음을 증명하지만, 그보다 드니 빌뇌브는 꾸준히 관심을 보여온 가족이라는 테마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다. 외계인과의 소통이나 교감 혹은 대립에서 오는 경이와 공포, 감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부분에 집중하며 내면적이고 사변적인 영화로 완성시켰다. 요한 요한손의 음악 역시 장르와 이야기가 바뀌었음에도 본질적인 스타일이나 과감한 실험성은 유지한 채 아방가르드하며 크로스오버적인 스코어를 들려준다.

언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논리적이고 화성학적인 조화를 추구하기보다 무조적이고 무형식적인 다양한 소리들을 정신없이 배치했다. 거기서도 인간의 보이스는 상당히 주요하게 다뤄지는데, 의미를 담아 노래하는 것이 아닌 분절되고 재조합된 소리들로 다중 녹음돼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된 외계인의 언어처럼 우리의 언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시도로 펼쳐보인다. 1968년 독일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이 발표한 ‘Stimmung Model 11’에서 영감을 얻어 반복적인 테이프-루프 실험의 형식을 빌어 몽골 전통의 노래하는 방식인 회메이’(흐미 또는 후미라고도 한다)를 연상케 하는 보컬로 새로운 종이 구사하는 언어의 충격을 성공적으로 청각화하였다.

그래서 힐리어드 앙상블의 폴 힐리어나 로버트 아이키 오브리 로위, 조안 라 바바라와 같은 전위적이고 독창적이며 탁월한 보컬리스트들의 힘을 빌렸으며, 여기에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섬세하면서도 장엄한 사운드는 관객들을 매우 인상적으로 언어학자 루이스에 동화시키게 만든다. 이런 사운드의 힘은 사운드트랙에는 비록 삽입되지 않았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하면서 아름다운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의해 더욱 극대화된다. 이런 야심과 아이디어에도 요한 요한손의 스코어는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서 탈락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뜬금없게도 토마스 뉴먼의 SF 스코어 [패신저스]였다.


<블레이드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드니 빌뇌브와 요한 요한슨의 다음 작품 역시 SF. 그것도 1982년 비운의 걸작으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35년만의 속편이다. 비록 리들리 스콧 감독은 제작자로 한발 물러섰지만 원조 해리슨 포드가 출연하며, 드니 빌뇌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촬영 로저 디킨스와 편집 조 워커 그리고 음악의 요한 요한손을 불러들였다. [컨택트]의 비평적 찬사로 인해 기대감이 잔뜩 모아지는 가운데 단연 화제는 과연 반젤리스의 테마가 여기서도 흐르냐는 것이다. 전자음악의 최전성기에 만들어진 이 스타일리시하면서 멜랑꼴리하고 동시에 화려한 스코어는 당시 아주 강렬한 충격파를 던졌다.

요한 요한손은 최근 인터뷰에서 반젤리스의 음악이 [블레이드 러너]의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했다. 그 음악이 주는 카리스마와 존재감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이 리메이크가 아닌 속편임을 주지시켰고, 또한 35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반영할 필요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테마가 정말로 쓰이는지에 대해 여전히 함구하고 있으니 그 결과는 오는 2017106일 영화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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