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머니> 촬영현장의 정지영 감독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에서 9월 6일부터 14일까지 ‘정지영 감독 40주년 회고전’을 연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비판한, 한국 사회파 영화의 거장이자 현재진행형 감독 정지영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세계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의식 각성 이후, 세상의 부조리함에 질문하고 재현해 내며 확장되었다. 아트나인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깊이 통찰한 전성기 작품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2010년대 더욱 깊고 묵직한 화법으로 돌아와 기득권의 부조리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중적인 흥행까지 이끈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 <블랙머니>(2019)까지 정지영 감독의 대표작 총 6편을 선정하여,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삶의 태도를 영화로 녹여내 온 정지영 감독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려 한다.


<남부군>의 안성기(왼쪽)와 트위스트 김, 최민수, 신윤정(오른쪽)

<남부군>은 신문 기자 출신으로 남부군 사령부 편집지도원으로 종군한 이태(본명은 이우태, 1922~1997)가 쓴 빨치산 동명 수기를 원작으로 삼았다. 남부군은 당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부대를 말한다. 1950년 9월 말. 이태(안성기)는 ‘조선 중앙통신사’의 종군 기자로 전주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된다.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이태는 ‘조선 노동당 유격대’에 합류하게 되고, 빨치산의 전투 활동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빨치산에게 전투 회담의 소식이 전해지자 빨치산은 이제 북으로의 귀환과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남쪽으로부터의 추격과 북쪽으로부터의 버림을 받게 되는 남부군의 최후의 서곡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간호해 주던 박민자(최진실)와 사랑에 빠지지만, 본대 복귀 명령으로 슬픈 이별을 하게 되고, 시인 김영(최민수)을 만나 동족 간의 전쟁의 허무함을 토로한다. 1949년에서 1954년까지 소백지리지구유격전에서 사망한 군경 및 빨치산 수는 2만여 명이었다. 또한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북 양쪽의 총 희생자 수는 사망 130만 명, 행방불명 111만여 명이었다. 그들의 영전에 바쳐진 <남부군>은 당시 친북영화라는 비판까지 받으며 대종상 시상식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으나, 청룡영화상에서는 감독상(정지영), 남우주연상(안성기), 남우조연상(최민수), 신인여우상(최진실)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펴낸 한국영화사 연구총서 2권 「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에서 <남부군>과 <하얀전쟁>은 물론, 조정래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까지 아울러 “노태우 정권이 유연한 민주화 과정을 약속한 1990년은 그에 걸맞게 어느 때보다 자기검열과 체제 검열에 걸려 실종되어 버렸던 리얼리즘 영화들이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집중적으로 생산되는 의미심장한 부활을 보여준다”며 “마치 1990년대가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르 법칙의 상투형을 깨며 그간 침묵했던 현실과 접속했다”고 기술한다. 그 시작이 바로 <남부군>이었다.


<하얀전쟁>의 안성기(왼쪽)와 베트남 양민 학살 장면(오른쪽)

“두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땅만 파고 있었다.” <하얀전쟁>에서 스펙터클한 전투신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저마다 부푼 꿈을 안고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들은 그렇게 땅만 파다가 어느 날 심야에 드디어 첫 번째 교전을 벌이게 된다. 암흑 속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날이 밝고 보니 베트콩으로 알고 쏘아댄 대상은 바로 그 마을의 소 떼였다. 허무하게도 누군가의 잘못된 총기 발사로 시작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마구잡이로 총을 갈겨댄 것이다. 다음날 마을 주민들이 소대로 찾아와 보상해달라고 시위를 벌이지만 소대 상급자들은 그를 완전히 무시한다. 하지만 한기주 병장(안성기)은 “저 사람들이 뭘 잘못한 겁니까?”라고 되묻고, 전희식 병장(김세준) 또한 “어제 일은 우리가 잘못한 거죠”라고 말한다. <하얀전쟁>은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성적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최초의 한국영화다.

영화는 베트남전 이후 글을 쓰며 살아가는 소설가 한기주가 현재의 1980년 서울과 전쟁이 한창인 과거 베트남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오가며 진행된다. 한기주는 한 시사월간지에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소설 연재를 시작한다. 전쟁 후유증으로 아내와도 별거 중인 상태에서 그 집필 활동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씻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연재를 해나갈수록 과거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전 당시 후임병이었던 변진수(이경영)가 그를 찾아온다. 베트남전 당시 소대의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은 7명 중의 한 명인 그는 권총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들 앞에 과거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끔찍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불려 나온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에 합의하게 되면서, <하얀전쟁>은 최초로 베트남에서 촬영 허가를 받고 협조까지 얻어 현지 촬영했다. 당시 제작비 20여억 원이 투입된 대작이었다.

한기주를 연기한 배우 안성기는 원작 소설을 읽고 정지영 감독에게 영화화를 권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정지영 감독과 <남부군>을 함께 한 안성기 배우는 과거 화려한 아역배우 시절을 뒤로하고 베트남 전문가를 꿈꾸며 베트남어과를 전공했다가, 베트남전이 끝나고 1975년 외교 관계마저 단절되면서 다시 배우 활동을 시작했던 이력이 있다. 어쩌면 베트남전은 지금의 국민배우 안성기를 있게 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담은 <하얀 전쟁>에 출연한 것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전쟁>은 원작과는 상당 부분 다르게 전개된다. 영화 속 현재의 시대 배경은 바로 ‘서울의 봄’이다. 영화에 김재규와 전두환의 자료화면이 등장하는 것처럼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 벌어진 민주화 운동 시기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건 직후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던 때다. 12·12 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기도 했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그 시기를 이처럼 정면으로 다룬 사례가 없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자신의 영화평론집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에서 정지영 감독에 대해, <하얀전쟁>에 앞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을 소재로 만든 ‘대작’ <남부군>(1990)을 이야기하면서 “정지영 감독은 남들이 이루지 못한 두 가지 일을 과감히 해냈다”며 “하나는 여유가 있는 제작자조차 기피해온 대작 촬영의 모험을 강행, 성과를 끌어냄으로써 적극적인 제작 환경을 조성했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 금기시되어온 소재에 도전, 표현의 폭을 넓혔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 ‘두 가지 일’은 <하얀전쟁>에 이르러 만개한다. 한국의 정치 현실과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적 기억이 겹쳐져, <남부군>과 <하얀전쟁>은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과 변화가 영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 사례라 할 것이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독고영재와 최민수(왼쪽), 그들의 꿈많던 어린 시절(오른쪽)

임병석(최민수)은 영화 박사다. 각종 영화 서적을 집어삼켜 먹은 듯 할리우드 영화의 소식통으로 군림하는 그는 신창 고교의 아이들과 ‘황야의 7인’을 결성, 기상천외한 영화 순례를 주도한다. 그로 인해 영화에 눈 뜬 친구 윤명길(독고영재)은 비단을 몰래 팔아 영화비를 조달하기도 하고, 병석의 방대한 영화 지식을 질투하여 그의 자료들을 훔치기도 한다. 하지만 적당히 현실적으로 사는 그는 영화에 대한 환상에만 젖어 사는 병석의 불안한 미래를 예감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 직배, 스크린쿼터 운동 등 한국영화계의 굵직한 이슈와 문제에 대해 앞장 서 발언하고 투쟁하던 정지영 감독의 필생의 작품이었다. 어쩌면 그 또한 ‘헐리우드 키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에 눈 뜨기 시작하며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실제로 정지영 감독은 학창 시절,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길 꿈꾸었던 사람으로, <하얀전쟁>은 전쟁영화라는 장르성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마주하며 한국영화사가 잊고 있던 리얼리즘 전통을 복원해낸 작품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다시 한번 안정효 작가의 원작을 정지영 감독 그 자신의 스크린쿼터 투쟁과 경험을 살려 창의적으로 각색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정지영 감독의 영화세계가 더욱 설득력과 파급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가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인 시국선언을 주도하고 실제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면서, 할리우드 영화 직배 반대 투쟁의 최전선과 스크린쿼터 운동의 출발점에서 영화계 개혁운동을 주도한 실천적 영화인이었기 때문이다.


<부러진 화살>의 안성기(왼쪽)와 김지호, 박원상(오른쪽)

<부러진 화살>은 지난 2007년 이른바 ‘석궁 테러사건’을 영화화했다. 대학입시 시험에 출제된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뒤 부당하게 해고된 김경호 교수(안성기)는 교수지위 확인소송에 패소하고 항소심마저 정당한 사유 없이 기각되자, 담당 판사(김응수)를 찾아가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석궁으로 위협한다. 이후 김경호가 체포되고 담당 판사의 피 묻은 셔츠 등이 증거로 제출되지만 그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김경호는 실제로 화살을 쏜 일이 없다고 결백을 주장하며 박준 변호사(박원상)와 호흡을 맞춰 법정 투쟁을 계속한다.

한 해 앞서 개봉한 의외의 흥행작 <도가니>(2011)처럼, 법정에서 어처구니없이 종결된 사건에 대한 재점검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유사하다. 하지만 단선적인 자극의 파괴력보다 캐릭터 자체의 힘을 과감하고 세련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부러진 화살>은 보다 은근한 재미가 있다.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은 무엇보다 안성기의 영화다. 조곤조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며 재판장에게도 독설을 서슴지 않는 그의 불같은 성격은 묘한 설득의 힘을 지닌다. 그처럼 영화의 강력한 감정이입의 효과는 역시 오랜 시간 ‘국민배우’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주인공 안성기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박중훈은 SNS에 <부러진 화살>에 관해 안성기와 나눈 대화를 올린 적 있다. 영화 죽인다는 소문에 대한 안성기의 대답. “<라디오스타> 이후로 내 연기 평가가 제일 좋네….”

당시 박중훈은 트위터에 <부러진 화살>에 관해 안성기와 나눈 대화를 올린 적 있다. “형님! <부러진 화살> 죽인다면서요?”라고 묻자 안성기는 “응, 본 사람들이 좋아해. 극장·배급 관계자들도 호감을 가져서 괜찮을 것 같아”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박중훈의 인사는 “야아~ 잘 됐네요. 개봉하면 볼게요”. 그러자 안성기의 대답. “<라디오스타> 이후로 내 연기 평가가 제일 좋네….”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평가가 좋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지만 안성기처럼 좀체 세월의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바꿔 말하자면 연기에 대한 평가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관록의 배우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을 꼭 만들고 싶은 마음에, 안성기가 아니면 다른 배우를 써서 저예산 독립영화로도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좀 더 다큐적인 느낌이 강했을 터. 하지만 안성기가 출연을 결정하면서 잘라내고 조정했을 법한 여타의 인물들이나 상황들이 온전하게 살아났다. 안성기가 영화에서 내내 수의를 입어야 하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뭘까. 당시 그는 “실제 김 교수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하나의 캐릭터로서 이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지난 몇 년간 만나본 적이 없다. 변호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공부해서 판사와 싸우지 않나. 게다가 그게 또 완벽에 가깝고. 여러모로 희화화할 수 있는 측면도 많은 사람인데 그도 아닌 참 묘한 매력이 있다. 연기자라면 누구나 달려들 만한 캐릭터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하겠다고 하니까 정 감독도 약간 놀란 눈치더라”라며 웃었다.


<남영동 1985>의 박원상(왼쪽)과 이경영(오른쪽)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1985>가 상영된 직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는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참석해 무대에 올랐고, 그 옆에 함께했던 배우 이경영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의 기록을 날짜별로 담아낸 작품이다. 박원상이 고문 피해자인 김종태, 이경영이 ‘장의사’로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김근태와 이근안이라는 실명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고문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김근태 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했고,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모두가 영화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종태는 박종철과 김근태이고, 이두한은 이근안과 전두환의 결합’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남영동」에서 김근태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려고 물을 뿌렸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그렇게 그는 결국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영동1985>에서 그런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난 이경영과 박원상은 1985년의 그날로 돌아가 영화와 현실 그 어디에도 서 있을 수 없는 22일을 보냈다. 그에 대해 이경영은 배우로 살아오던 그 오랜 시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이라고 했고, 박원상은 배우로서의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초현실’의 시간이라고 했다.


<블랙머니>의 조진웅(왼쪽)과 이하늬(오른쪽)

이후 <블랙머니>(2019)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들 중 <부러진 화살>처럼 가장 현재 시제에 가까운 영화였다. 또한 이번 회고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부군>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남영동1985>처럼 거시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역시 <부러진 화살>처럼 미시적인 역사 혹은 특정 사건에 집중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검찰 내에서 혈기왕성하기로 유명한 검사 양민혁(조진웅)은 자신이 조사를 담당한 피의자가 숨을 거두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내막을 파헤치던 그는 피의자가 대한은행 헐값 매각사건의 중요 증인이었음을 알게 되고 금융감독원, 대형 로펌, 해외펀드 회사가 뒤얽힌 거대한 금융 비리의 실체와 맞서 싸운다. 이처럼 ‘금융 스캔들’이라는 소재가 얼핏 정지영 감독이 걸어온 지난 시간과 겹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고들려는 그 결기는 변함없다. 결정적으로 <부러진 화살>의 김경호 교수와 <블랙머니>의 양민혁 검사는 거침없이 직진하는 캐릭터들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정지영 감독이 이전에 주인공으로 즐겨 내세웠던 캐릭터들과 상당히 달라 흥미롭다. 어딘가 주저하고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며 침잠하던 정지영의 외유내강형 주인공들이, 2010년대 들어 보다 과감하고 주도면밀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어쩌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 스스로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노장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계속 변화하며 시대와 호흡하고자 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야말로 그의 새로운 영화를 계속 기다리는 이유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