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카우프만도 뛰어난 각본가 (자의식마저 뛰어난)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좋은 각본가와 좋은 연출가는 엄밀히 다른 영역이다. 각본가로서 거둔 성공이 연출자로서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각본가로 시작하여 뛰어난 감독의 길을 걷고 있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발견한다. <유주얼 서스펙트>(1995)의 각본을 썼던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잭 리처>(2012)를 통해 성공적인 연출 데뷔를 한 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중흥을 이끌고 있다. <퍼스트 리폼드>(2017), <아메리칸 지골로>(1980) 등을 만든 폴 슈레이더 감독 역시 마틴 스콜세지의 불세출의 명작 <택시 드라이버>(1976)를 포함하여 시드니 폴락, 브라이언 드 팔마, 피터 위어 등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들의 각본가로 활동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로 대변되는 스파이크 존즈의 초기작들과 <이터널 선샤인>(2004)의 각본을 맡은 찰리 카우프만은 이미 미국 독립 영화를 대표하는 어엿한 이름이 되었다.

작년 한 해 가장 흥행한 작품 중 하나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각본은 에실 보그트의 것이었다.

북유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주목해야 할 이름이 하나 더 등장한다. 지난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2)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큰 호평을 받은 요아킴 트리에 사단의 각본가 에실 보그트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2014년 기묘한 상상력과 파격적인 연출이 빛난 <블라인드>로 한차례 한국 관객들과 만났던 에실 보그트의 신작 <이노센트>가 9월 6일 다시 한번 개봉에 성공했다. 각본가 에실 보그트에서 연출가 에실 보그트로 진화한 그의 모습은 어떤 점이 달라졌을지, 노르웨이의 새 이름 에실보그트의 <이노센트>의 관전 포인트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요아킴 트리에와 영혼의 콤비, 각본가 에실 보그트

영화 <라우더 댄 밤즈>

감독의 커리어 전체를 한 각본가가 담당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경력을 이어갈수록 연출가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기에 각본가와의 협업을 줄이는 경우가 잦고, 각본가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 연출을 도전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실 보그트는 요아킴 트리에의 첫 단편 연출작품인 <피에타>(2000)부터 최근작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까지, 다큐멘터리인 <디 아더 뭉크>(2018)를 제외한 전 작품에 각본가로 참여했다. 심지어 차기작 역시 에실 보그트와 협업을 예고하며, 이제는 영혼의 콤비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작업을 하는 중이다. 요아킴 트리에는 에실 보그트에 대하여 “그와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협업을 하고 있다.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왔기에 상황에 대한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는데, 때문에 그와 작업하는 것은 매우 특별하다”라고 밝히며 두터운 신뢰를 내비치기도 했다.

영화 <델마>

22년간 한 몸처럼 이어져 온 요아킴 트리에와의 협업은 에실 보그트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리프라이즈>(2006), <오슬로, 8월 31일>(2011),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이어지는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처럼 에실 보그트의 영화는 줄곧 노르웨이의 도시적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노센트>의 이야기는 노르웨이의 한 도심 속 아파트로 자폐가 있는 언니 안나와 동생 이다가 이사를 오면서 시작된다. 네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아파트 옆 숲은 노르웨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요소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를 연상시키는 요아킴 트리에의 <델마>(2017)에서 드러난 정체불명의 초능력은 <이노센트>의 네 아이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델마>가 여성의 억압적 구조에 대한 항거였다면, <이노센트>는 아이들의 순수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파격적인 상상력의 집합체다. 이 지점에서 노르웨이의 도시적 요소를 사용한 두 감독의 작업은 서로 닮은 듯, 다른 판본으로 발산되기 시작한다.


발칙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다

영화 <블라인드>

에실 보그트가 그리는 영화 세계는 요아킴 트리에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어떤 면에서 발칙하다. 2014년에 공개된 <블라인드>는 어느 날 갑자기 시각을 잃은 잉그리드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몽환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남편 모튼의 친구인 성도착자 에이너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화면 가득 포르노 사이트의 푸티지들이 난삽하게 배열되어 있다. 잉그리드는 시각 장애로 인해 남편 모튼이 더는 자신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걱정과 임신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망상적 세계를 끝도 없이 펼친다.

<이노센트>에서도 이러한 파격적인 상상력은 이어진다. 통상적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호러의 문법으로 그린다면, 아이의 시선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유령의 존재를 다루거나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유령이나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실 보그트의 <이노센트> 속 초능력을 보이는 네 아이의 세계에는 선과 악, 죽음과 삶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초능력을 보유한 소년 벤자민이 자행하는 일련의 잔혹한 사건들은 복잡한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기, 미움, 질투 등 유년기에 지니는 본능에 따른 단순한 감정들이 곧 벤자민의 초능력의 원인이 된다. 자신보다 건장한 소년들이 운동장을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초능력을 막았다는 이유로, 이유 모를 소외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벤자민은 사람들을 징벌한다. 벤자민의 폭력과 초능력이 자아내는 공포는 유년기의 순수성이 곧 선-악의 이분법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에실 보그트의 발칙함은 윤리적인 딜레마들을 아이들의 세계라는 본능적 공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시선

<이노센트>의 발칙한 세계는 자칫 아이들의 기본적인 감정만을 다룬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사소한 이유로 마음이 토라지고, 친구를 미워하는 감정은 복잡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노센트> 속 아이들의 순수함이 오히려 본질적인 공포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아역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실 보그트는 <이노센트>의 주연 배우들 캐스팅 연령을 매우 좁게 설정했다. 그는 오로지 7-11세의 아이들로만 캐스팅하려 노력했다. 이는 12세가 되면 10대에 진입하여 자신만의 섹슈얼리티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에, <이노센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위해서라면 어른의 시간에 진입하기 전인 ‘마법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이런 ‘마법 같은 세계’ 속에서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며 <이노센트>의 세계관이 지닐 다채로움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특히 안나 역의 알바 브륀스모 람스타드의 연기는 매우 놀랍다. 극 중 안나는 자폐증을 앓고 있음과 동시에 초능력이 작동할 때면 과묵하지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심연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다. 에실 보그트 역시 캐스팅 과정 중에 가장 공을 들였던 배역이 바로 안나 역이었다고. 이 외에도 순수 악을 상징하는 벤자민 역의 샘 아쉬라프의 연기는 대단하다. 벤자민은 가정폭력과 어머니의 무관심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는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동시에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에게는 직관적인 폭력에 무감해져야 하는 인물이다. 뜻대로 초능력이 작동하지 않자, 현관문을 걸어 잠근 채 울상을 지으며 주저앉는 장면은 벤자민의 순수한 본능을 단번에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노센트>의 발칙한 마법적 세계가 생존의 알레고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모든 영화의 논리는 아역들의 빼어난 연기로부터 출발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