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최민식 주연의 명작 <올드보이>의 개봉 20주년 기념 상영회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올드보이>가 상영된 데 이어, 박찬욱과 최민식이 참석하고 주성철 영화평론가 사회를 맡은 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진행됐다.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즉시 매진된 데 이어, 상영 당일 아침부터 수많은 관객들의 대기열이 이어질 만큼 관객들의 열정이 대단했던 GV 행사를 기록했다.
주성철
제가 <키노>에서 일할 당시, 표지 인물인 배우를 감독이 인터뷰 하는 꼭지가 있었습니다. 최민식 배우가 <취화선>(2002)으로 칸영화제로 떠나기 전 당시 <복수는 나의 것>(2002)으로 흥행이 안 됐던 박찬욱 감독님이 인터뷰를 맡으셨어요. 섭외 전화를 드렸을 때 단숨에 OK 하셨는데, 그게 <올드보이> 이전에 두 분의 첫 일대일 만남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찬욱
VIP 시사를 하면 누구든지 좋은 자리를 얻고 싶잖아요. 주최 측은 고민에 빠지는데, <공동경비구역 JSA>(2000) 시사 때 뭔가 착오가 있어서 최민식 선배에게 좋은 자리가 못 갔어요. 구석 자리에서 보시게 해서 어떡하냐며 송강호 씨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다 끝나고서 선배가 강호 씨에게 “이런 영화는 거꾸로 매달려 봐도 감동적으로 볼 영화야”라고 하셨어요. 그 표현이 멋져서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말을 멋있고 정답고 구수하게 잘하는 데에 유명한 분이죠. <키노> 인터뷰가 기자가 배우 인터뷰 하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기획이었어요.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배우에 대해 많은 걸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올드보이> 기획하면서 어떤 배우에게 먼저 찾아갈 것이냐 할 때 큰 참고가 됐죠.
최민식
살면서 좋은 동료를 옆에 둔다는 건 사람이 사람 만나는 일이잖아요. 영화를 하든 연극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삶을 또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제 인생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이렇게 굴절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그럴 텐데. 저는 행운이였던 것 같아요. 우리 박찬욱 감독님을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 영화판에서 만나게 돼서 이런 작품을 찍어내고. 아주 징글징글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그 절대 잊지 못할 친구 같은 영화죠. 개고생 그런 개고생을 한 친구를, 만약에 있다면, 그 친구의 인생을 내가 옆에서 쭉 지켜봤다면 그 정도로 너무나 애정 하면서도 기억에 남는 친구 같은 영화, 그런 영화에 우리 박 감독님의 영화 세상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 준 것에 대해서 평생 고맙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성철
<올드보이>는 볼 때마다 늘 새롭고 현대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작품인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우진(유지태)의 경호실장(김병옥)이 철웅(오달수)에게 돈가방을 건낼 때 보니까 전부 만 원 권이더라고요. 아 그땐 5만 원권이 없던 시절이었구나, 확실히 20년 전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했어요. 특히나 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수평 트래킹 액션 장면 같은 경우엔 거기에 그 허명행 무술감독님이 나오시잖아요. 민머리에 웃통 벗고 있는.
최민식
끝까지 저한테 개기던 친구 있죠. 그래서 결국에는 몇 대 맞고 쓰러지는. 그 친구가 <범죄도시 4>의 허명행 감독이에요.
박찬욱
지금 한국 최고의 무술감독이죠.
주성철
게다가 그 분이 그 유명한 <신세계>(2013)의 ‘드루와 드루와’ 신을 만들었는데, <올드보이>에서도 엘리베이터 장면이 또 나오기 때문에 뭔가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박찬욱
당시 무술감독은 양길영 감독이었어요. 그때 허명행 감독은 군번이 아래 쪽이었고. 근데 연기가… 지금 봐도 역시 달라, 캐릭터가 있어요. 혼자 가다가 나중에 뒤로 돌아보는데 자기밖에 없는 그 뻘쭘함. 크게 될 사람은 역시 그런 거죠.
주성철
10년 전 10주년 기념 재개봉 때도 박찬욱 감독님이 직접 고른 명장면이 오프닝이었어요. 오광록 배우가 연기한 자살남이 오대수가 움켜진 넥타이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죠. 이야기의 문을 서서히 여는 느낌이 아니라, 관객을 준비 안 된 상태로 영화에 풍덩 빠뜨리고 싶다는 의미로 그 장면을 뽑아주셨어요. 두 번째는 영화 마지막 장면인, 설원에서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1년씩 늙어간다는 설정이 더해진 장면이었고요. 그리고 마지막은 펜트하우스에서의 두 남자의 대결입니다. 시간이 더 지났으니 혹시 두 분께서 더하고 싶은 장면이 있을까요?
박찬욱
오프닝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만 다른 작품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서론이 없이 이미 한창 진행 중인 어떤 사건의 한복판에 관객이 그냥 푹 던져지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영화사 배급사 로고 나오고 자막 나올 때부터 이미 아주 서정적인 멜로디의 음악이 오랫동안 나오다가 본편이 딱 시작될 때 쿵 하면서 음악도 아주 격렬해지고, 클로즈업부터 시작하는 신선한 도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작사이자 배급사였던 쇼이스트가 회사 로고를 처음 만들었대요.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었는데 내가 그걸 없애고 바로 시작하겠다고 해서 얼마나 또 갈등이 있었는지 몰라요. 정말 많은 논쟁이 있었죠. 오프닝은 말씀드린 그런 시작의 힘 때문에도 좀 필요했고요. 자주 언급되지 않는 특징인데, 제가 각본 쓸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게 내러티브의 구조였어요. 오대수가 자살하려고 하는 남자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들려주는 형식이에요. 그렇게 오대수가 감금방에 들어갔고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는지만 들려주고 다음엔 현재 시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미도가 녹색 커버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거기 내용대로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거예요. 그리고 끝날 때쯤 되면 최면술사가 오대수의 긴 편지를 읽죠.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회상 구조예요. 이런 시도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구조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던 각본이었어요.
최민식
원작 만화책을 보고 강남 어느 중국집에서 감독님과 당시 프로듀서였던 임승용 대표와 만난 게 처음이었어요. 만화책은 드럽게 재미없었는데,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어떤 잘못을 했길래 15년이라는 세월을 통제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이 사람을 15년 만에 풀어준다, 그런 설정 자체가 굉장히 영화적이잖아요. 대본이 나왔을 때 처음 보는 형식이었어요. 요즘 이 각본을 써서 투자를 받는다고 한다면 과연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주 강하게 듭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스스로 검열을 했어요. 미도(강혜정)와의 관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게 가능할까? 하니까 우리 박 감독님이 그때 아주 명쾌한 답을 내놓으셨어요. 그럼 햄릿은? 오이디푸스는? 이건 오대수의 성적 지향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를 당한 거다. 뭐, 아무 말 못하죠. 가보입시다~ 했죠. 종교를 기반으로 둔 언론사가 한두 군데 있었는데 거기서 사설을 썼어요. 막나가는 한국영화, 표현의 자유는 좋지만 과연 이대로 좋은가. (객석 웃음)
박찬욱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인데 감독과 스튜디오 사이에 갈등이 생기잖아요. 감독 편에 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사람이 스타예요. 힘 있는 스타가 있으면 그가 스튜디오 보스에게 그냥 감독이 알아서 하게끔 좀 내버려 둡시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는 역사가 어느 나라 영화 역사에도 다 있어요. 리 마빈도 그걸 잘해준 배우로 유명했고요. <올드보이>도 당연히 저는 이해가 돼요. 투자/배급사에서는 막상 찍어 놓은 걸 보니까 겁나고, 심의는 등급 외 판정을 받으면 개봉관이 없으니 개봉을 못하게 되고. 마음은 항상 이해가 되지만 어쨌든 정사 장면을 빼달라는 요구가 있었어요. 그런 갈등 상황 속에서 스타가 편을 들어준다는 건 어마어마한 원군을 얻는 거죠.
주성철
칸 영화제 출장 가서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올드보이>를 보는데 오대수가 딸에게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비는 장면에서 극장을 가득 채웠던 적막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펜트하우스 신 촬영 현장은 <올드보이>의 제작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2016)에서 상세하게 묘사 되더라고요. 촬영이 계속 길어지고 끝이 안 나니까 스탭들은 졸고, 최민식 배우가 나서서 집에 가서 내일 하루 !‘옴팡’ 쉬고 다음날 다시 찍는 게 1안! 지금 끝까지 다 찍는 게 2안! 그러면서 투표하는 모습도 보이죠. 진짜 전쟁하듯이 촬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찬욱
지금 우리나라 영화는 그러지 않잖아요. 그땐 밤샘 촬영도 많이 하고,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어요. 지금 그게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인 한계였고요. 옴팡 쉬고 다시 모여서 찍을 거냐 그냥 이대로 밤새고 찍어서 일찍 끝날 것이냐 투표에 부쳐서, 다수결로 후자가 이겨서 쭉 이어서 찍었어요. 어느 순간 돌아보면 깨어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지만, 그때도 최민식 배우는 졸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앉혀 놓으면 갑자기 야수가 돼버리니까, 스탭들이 저런 사람 정말 처음 본다고 얘기를 하곤 했죠.
최민식
자고 있는데 자꾸 깨우니 승질나니까 (웃음)
박찬욱
절규하는 장면은 제가 대사를 자세히 쓰지 않고 애초부터 최 선배한테 미리 좀 생각을 해놓고 알아서 해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장면이고, 그렇기 때문에 찍을 때 저 역시 궁금한 거죠. 어떤 얘기가 나올지 손에 땀을 쥐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정훈 촬영감독이...
최민식
그때는 필름 촬영이에요. 400자인가, 필름을 그렇게 넉넉한 매진을 쓰진 않았어요. 혀 자르기 전에는 여기까지, 하면서 카메라를 두 대 뻗쳐 놓고 감독님이 그 안에서 놀아봐 하는 오다가 떨어졌는데 저도 모르게 교가도 부르고 개 짖는 소리도 내고 하다보니까 이 매거진이 다 끊어진 거예요. 필름은 안 돌아가고 있었던 거죠. 정정훈 촬영감독이 제 학교 후배거든요. 이거 필름 떨어졌어요, 하면 야단맞을 것 같으니까 계속 한 거죠. 나중에 100자 짜리로 갈아 끼고 찍었던 기억이 나요.
박찬욱
정정훈도 죄가 없는 게, 이게 몇 초짜리 샷이 될지는 감독도 모르는 건데… 차라리 미리 얘기를 좀 해주셨으면…(웃음)
최민식
나도 교가 부르고 개 소리 내는 건 미리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어요. 저 역시 그냥 미쳐 있었던 거 같아요. 내 딸에게는 알리면 안 된다는 오대수의 절박한 감정에 매달려야 했죠. 아, 그거는 생각했어요. 여태까지 쭉 끌고 온 이 드라마의 형태에서 약간 유머러스 하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의 범주에서 벗어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항상 있었죠.
박찬욱
저렇게 미친 듯한 열연을 하고 있으면, 잠깐 이거 필름 끊어졌어요 이제 안 찍혀요, 하고 중단 시켰어야 하는데, 연기 다 마치고 나서 후반부는 안 찍혔어요 하는 게 더 무서운 일인데 그걸 모르고 바보 같이… 그래도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래 리허설 한 셈 치지 뭐, 이렇게 해준 게 정말 선배 다운 멋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주성철
<올드보이> 하면 한국영화의 세계적인 위상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심슨 가족>에서 정확히 ‘올드보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바트 심슨이 한국영화를 트는 페스티벌에 가서 영화를 보고 와서는 완전히 흥분해서 낙지를 먹고 혀를 자르고 그러더라 하는 시점이 2013년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코리안 야쿠자, 코리안 마피아라고 표현했을 텐데 ‘캉페’(깡패)라고 똑똑히 발음하는 걸 들으면서 K콘텐츠가 북미 지역 수용자들에게 제대로 소비되는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됐어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4) 교회 학살 신은 매튜 본 감독이 <올드보이> 장도리 신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원테이크로 연출했다는 얘기가 전해졌습니다. 장도리 신은 원래 사전에 굉장히 치밀하게 콘티와 스토리보드를 작업한 장면이었는데 현장에서 롱테이크로 한 번에 가기로 결정하고, 최민식 배우가 테이크를 무려 17번을 가서 정말 고생했던 장면이었죠.
박찬욱
워낙 제가 액션 장면 찍는 걸 귀찮아 해서 어떻게 하면 안 찍을 수 있을까, 다른 감독을 모셔다가 부탁을 해볼까 해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클라이맥스에 총격전이 나오는데, 그것도 정말 찍기 싫었어요. 어떻게 피해갈까 고민만 하다가 안 찍을 수도 없고, 그래서 제가 결심을 한 게 기왕 하는 거라면 어디서도 못 본 특별한 액션신을 만들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촬영감독하고 무술감독도 불러다가 계획만 한 일주일은 걸렸던 것 같아요. 그걸 갖고 액션스쿨 가서 훈련하고, 촬영하는 세트에 모였어요. 잘게 쪼개서 카메라 여기 셋업 저기 셋업 클로즈업 롱숏 다양하게 찍을 거긴 하지만, 전체 액션의 흐름을 실제 장소에서 눈으로 한번 보고 싶다 해서 세트 한쪽 벽을 뜯고 리허설을 한 거예요. 대충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동작만 볼 테니 힘들이지 말고 하세요 했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쳐서 주저앉아 헐떡헐떡 하더라고요. 첫째 든 생각은 와 이렇게 긴 걸 어느 세월에 다 찍지, 두 번째는 저렇게 나가 떨어져서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왜 이렇게 고소하고… 그건 좀 장난이지만, 한 중년 사나이가 목숨을 걸고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짜내고 나서 나가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 다음으로, 이우진이 고용한 사람의 부하들인데 얘들하고 싸우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현란하고 복잡하게 찍어서 뭐 하는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결국 그건 고독과 피로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걸 다 한번에 찍을 수 있겠는가 하는 논의가 스탭들과 시작됐고, 프로듀서나 촬영 담당은 다들 하는 말이 그렇게 촬영하면 정말 멋지긴 하겠는데, 우리 중에 누가 최민식에게 가서 그 얘기를 전달할 거냐, 하는 그런 두려움이 있긴 했죠. (웃음)
최민식
한쪽에 모여서 회의를 하더라고요. 특수분장 팀에서 한 3500만원 어치 소품을 만들어 왔어요. 제가 가서 왜 안 찍냐 회의만 그렇게 하냐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원신 원컷으로 찍기로 결론이 난 거예요. 최민식의 고통은 박찬욱의 기쁨입니다.(관객 웃음) 그거 찍고 5kg 빠졌거든요. 거의 이틀 동안 하루종일 그 복도를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죠. 근데 그렇게 물리적으로 몸이 피곤했어도 그게 맞는 거였어요. 오히려 돈은 돈대로 들고 힘은 힘대로 들고,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스케줄에 화려하게 찍었으면 안 됐을 거였어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제가 헐떡거리는 걸 그렇게 즐거워하더라고. 그래, 내가 얼마든지 헐떡거려주마… 그때 메이킹 영상 보면 송강호가 현장에 놀러와 있었는데요, 옆에서 “아 한 번 더 해봐요, 뭐 이까짓거 가지고 그래요” 라고 하는데, 아우 정말. (웃음)
주성철
몇 년 전 박찬욱 감독님께서 한 인터뷰에서, <올드보이>에서 미도 캐릭터가 결국에는 영화에서 진실에서 도외시된 채로 끝난 결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이후 <아가씨>(2016)나 <헤어질 결심>(2022) 같은 작품들로 이어지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갔다고 말씀하셨을 때, <올드보이>에 대해서는 약간은 반성적인 시선을 담아 얘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20주년 상영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창작자로서 그런 거리두기의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풍부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구요.
박찬욱
사실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 씨가 맡은 소피라는 역할이 원작 소설에서는 원래 남자였고,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군대 조직에 들어온 이방인 혼혈 여성이 남과 북에서 다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을 파헤치러 오는 상황에서 당하는 불친절하고 반감의 대우를 받으면서 영화의 주제가 더 잘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면이 좀 강한 아이디어졌죠. 다른 영화에서 좋은 여자 배우들이 좋은 역할을 해줬지만, <올드보이>에서 미도는 이 진실을 몰라야 영화가 성립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 ‘복수 3부작’이라고 이름 붙인 기획을 이미 발표해버렸기 때문에 뭔가를 찍어야 하는데 여자 주인공으로 마무리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친절한 금자씨>(2005)를 만들게 된 거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 씨를 기능적으로 사용한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이영애 씨를 다시 데려다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최민식 배우는 거기서 또 희대의 얄미운 악당 역을 해주셨죠.
최민식
나한테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어요. 난 혀도 잘렸고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개로 만들어놓고는. (객석 웃음)
박찬욱
<올드보이> 오마주였죠. <올드보이>에서 개 연기를 한 건 본인 아이디어인데 왜 그러시는지. (웃음)
최민식
아무튼 딱 세 커트에 나온다고. 그 꼬임에 빠져가지고 <친절한 금자씨>를 하게 됐죠.
주성철
<올드보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영화가 너무 웃기거든요. 박찬욱 감독님 특유의 유머가 잘 살아 있어요. 철웅한테 포박 당한 미도가 “살려주세요, 아저씨” 라고 하는데 대수는 내레이션을 “내가 죽게 생겼다” 라고 하는 장면이 다시 봐도 명장면이죠.
박찬욱
그런 걸 마음 속 목소리로 많이 활용을 했는데, 어떤 것들은 편집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요. 보통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이라고 하는 것, 마음의 소리를 대사화 해서 배우가 읊는 것. 그런 것이 항상 정보 전달이나 플롯을 설명하는, 관객이 잘 못 알아 들을까봐 보완하는 기능으로 사용할 때가 많은데 그래서 단조롭고 재미가 없죠.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해볼까, 하는 고민은 처음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전개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별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을 많이 쓰려고 했어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얘기를 자꾸 넣어서 보이스 오버에도 감정을 넣고 거기도 연기가 들어갈 수 있게 그렇게 해보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최민식 배우가 워낙 목소리가 좋잖아요. 좋다는 게 목욕탕처럼 울리는 저음 그런 거 말고 정말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가졌고, 그걸 잘하는 배우라서 그런 순간에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죠.
(이제 관객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채팅방 질문
최민식 배우님께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대수는 미도가 비밀을 알게 되길 원하지 않는데, 이때 대수가 느끼는 감정이 아버지로서의 우려였을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우려였을지.
최민식
글쎄요,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어떤 경험의서 끄집어내서 응용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죠. 그런데 이 상황 자체는 도저히 제 역량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이게 나한테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때 과연… 나는 아마 자살하지 않았을까? 근데 이 오대수는 계속 살아가죠. 이 모든 사실을, 이우진이 한 복수의 모든 걸 다 알고 나서 미도에 대한 생각은 아마 본인도 모를 거예요. 엄청난 감정의 파동이 있지 않을까. 그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우고도 싶기도 하고… 이성으로서 감정도 분명 느꼈단 말이죠. 이게 도대체 수습이 안 되는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해봤어요. <올드보이> 한 10년 후… 어휴, 끔찍하다. 그때 감독님 디렉션이 웃는 듯 우는 듯, 지워진 듯 안 지워진 듯… 참 얄미워요. 그것이 오대수의 복잡하면서… 그 절망과 인간으로서 경험하기 힘든 하늘이 내린 형별. 그 고통을 끌어안은 두 부녀 앞으로의 인생에 휘몰아치는 황량한 겨울 바람, 마치 감시라도 하듯이. 그 불투명은 어떤 명쾌한 해석이 있는 게 아니라 관객 여러분도 영화 보시고 끝 부분에 저처럼 똑같이 가슴 답답하고, 아주 불쾌한 듯한, 이유 모를 찝찝함. 그게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찬욱
보통 열린 결말이라고 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가 그런 식의 결말을 평소에 선호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그게 맞다고 판단했고, 무책임하게 던져 놓는다기보다는 관객의 선택을 바라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대수가 기억을 지우기를 바라는 관객이 있을 테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고.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 자기의 사랑에 대한 견해 같은 게 있을 테니까 각자가 선택하는 결말이라고 저는 봤습니다. 영화 편집해보신 분이라면 알 테지만 배우가 웃고 있을 때 딱 멈추면 그게 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울고 있는 장면을 멈추면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거든요. 그게 한 프레임만 보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런 데서 착안한 건데, 분명 이를 보이면서 활짝 웃는데 그것이 오래 안 변하고 계속 얼굴에 고정돼 있으면 이게 좀 불분명해지는 단계가 옵니다.
채팅방 질문
대사 중에 “복수심이 나의 성격이 되었다” 라는 게 있는데, 이 대사를 어떻게 의도하고 이해하셨는지.
박찬욱
복수라는 것은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큰 이득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자명하잖아요. 오대수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15년 감금됐던 그 세월을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이 시간에 더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이롭겠죠. 근데 미도는 그런 쪽으로 권유를 하는 건데 오대수로서는 멈출 수가 없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고, 그렇게 표현해봤습니다.
객석 질문
처음 우진이랑 대수가 만나는 장면에서, 대수가 먼저 방에 들어갈 때 스위치를 막 켰다 껐다 하는데 그게 전혀 작동이 되지 않고 처음 만나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대수가 우진이 던진 리모컨을 받아서 작동시키는데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데, 그런 장면이 우진이 대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게 자기가 짜여진 틀 안에서 움직이고 어떤 발광을 해도 네가 이루고 싶은 건 전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은연 중에 나타내는 연출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그런 걸 생각하고 하신 건지 궁금하고, 비슷한 다른 연출이 있다면 말씀 부탁 드립니다.
박찬욱
예. 우진은 그런 캐릭터이고, 마치 각본도 쓰고 감독도 하고 제작도 하는 존재죠. 15년에 걸친 거대한 대하드라마를 쓰고 연출한 감독 같은 사람이에요. 완전히 디테일까지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고. 미도와의 관계를 그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최면을 건 것에서부터가 철저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오대수가 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계획돼 있다, 리모컨으로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거짓말도, 폐허 같은 아파트에서도 리모컨으로 자기 테마 음악 같은 걸 틀고. 영화감독 같은 사람이죠. 손수건, 우산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 통제하고 디자인 하는 인물입니다.
객석 질문
작품을 함께한 류성희 미술감독님과는 어떻게 만남이 이루어졌는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수로 아이디어에 감독님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찬욱
류성희 미술감독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작업했는데, 그때 얘기를 듣고 그 현장에 제가 놀러가서 인사를 나눴어요. 만든 세트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믿어지지 않는 일인데, 그 사람이 한국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세트 디자인을 시공하는 업체 사장님이 했어요. 실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일은 세트뿐만 아니라 배우 빼고 그러니까 살아 있는 존재 빼고 모든 시각적 요소에 관여해서 큰 전체 그림을 만들고 룩을 설정해 망라하는 건데, 그런 일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죠. 저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고 할 수 있어요. 드디어 만나게 됐고, 같이 <올드보이>를 한 다음에 <살인의 추억>(2003)을 또 찍더라고요. 거기 현장에도 자주 갔어요. 강력반 사무실 가서 보면서 구석구석 손길이 안 닿는 데가 없고, 심지어 신문 철이 있는데 그 신문도 정말 그 시대 신문을 다 복사해서 넣는 디테일이 영화에 보일 리는 없지만 배우들이 연기할 때 그런 소품이나 가구나 이런 것들이 다 진짜처럼 보일 때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런 면까지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죠. 그래서 여태까지 모든 작품을 해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하는 거 빼고는. 수로는 사실… 제가 원한 건 유리창에 바로 붙어 있는 한 줄짜리 수영장이었어요. 유지태 씨의 그렇게 길고 하얀 몸이 고층 건물 바깥에서 먼 야경으로 찍었을 때 무슨 큰 물고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찍고 싶었어요. 근데 돈이 없어서 못했고, 류성희 미술감독이 그거는 못하니까 대신 이런 걸 해드리겠다고 하면서 제안한 게 수로였습니다.
주성철
당시 취재기자들이 그 펜트하우스 촬영현장 취재를 갔다가, 수로에 엄청 많이 빠졌습니다. (웃음)
채팅방 질문
10주년, 20주년 상영 할 때마다 확장판을 소개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두 분께서는 혹시라도 확장판 같은 걸 한다면 추가하고 싶은 장면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찬욱
알뜰하게 다 써먹어서…
최민식
지금이 풀인데 (객석 웃음)
박찬욱
물론 도입부의 파출소 장면에서 좀 더 많은 추태가 있었지만… 그건 안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최민식
제 옆에서 왜 여자한테 치근대세요 하는 목소리 있잖아요. 그게 정정훈 촬영감독 목소리예요. 그리고 저랑 같이 실랑이 벌이는 친구가 임승용 프로듀서고. 진짜 서로 때리고 그랬는데 다 잘렸어요.
객석 질문
오대수가 생일 선물로 천사 날개를 준비를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게 사필귀정 노트처럼 오대수가 금기를 저지르게 되고 누군가의 죽음에 가담을 하게 됐지만, 뭔가 구원이라는 희망이 있을 거라는 그런 암시를 하는 건가 생각을 했어요. 왜 천사 날개를 소품으로 준비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그런 정도까지 생각은 안 한 건 확실하고…
최민식
저하고 잘 어울리는 소품을… (객석 웃음) 그걸 아마 선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박찬욱
가장 안 어울리는 소품을 해야 재밌으니까. (객석 웃음) 예를 들어서 인형이다, 하면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되죠. 그런데 배우가 날갯짓을 하면 더 웃기고 정답잖아요. 마지막에 미도가 날갯짓을 하는 것이 손에 들 수 있는 소품들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미도가 먼저 찍고 대수가 나중에 맞춰서 찍은 거예요. 제가 그런 디렉션을 주지 않았는데 강혜정 배우가 혼자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주성철
시간이 너무 부족하죠. 1시간으로는 정말 이 영화의 10분의 1도 들려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팅방이나 객석에서 질문이 너무 많은 다 소화하지 못한 점 너무 죄송하고요. 마지막 말씀 들으면서 마무리 해볼까 합니다.
박찬욱
여러분 이렇게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러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표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러분 정성과 열정에 정말 뭉클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영화 보여드리겠습니다.
최민식
20년 전의 소회를 1시간 안에 여러분들한테… 그대로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얘기를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너무 많은 만감이 교차하고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일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건 행복함입니다.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투자가 힘들었다… 영화 한편 제작하다 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20년이 지난 세월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추억을 공유하고, 관객 여러분들과 이런 숭고한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우리가 만들었구나, 너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에 빗대어 봤을 때,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는데 사실, 우리 그때 참 자유로웠구나, 이런 게 느껴졌어요. 우리 정말 투자 받기 힘들어도 우리가 생각한 것을 영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서 노력했구나 그리고 실현시켰구나 하는 자부심. 오늘 다시 한번 느꼈어요. 우리 후배님들도 많이 힘들겠지만 획일화 되지 말고, 끝 간 데 없이 자유롭게, 그게 메이드가 되든 안 되든, 그런 시도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선배인 저도 많은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 결국에는 창작자의 몫인 거 같아요. 어떤 시스템에서 영화가 제작되고 어떤 배우를 통해서 영화가 공개가 되고,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대중들과 호흡하고 소통하려고 했느냐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게 다소 좀 불편하더라도. 입맛에만 맞는 영화, 장사가 될 만한 영화, 이런 것만 찾아서 우리가 움직일 게 아니라… 저 스스로도 다시 한번 반성해봅니다. 여러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성철
이대로 끝내기 아쉬우니 두 분 현재 작업에 대해 살짝 얘기해주시면 어떨까요.
박찬욱
저는 한국에도 번역된 영어 소설 <동조자>를 원작으로 한 HBO의 7개 에피소드의 시리즈 촬영을 마쳤고, 제가 쇼러너이고 각본가이고요. 연출은 7개 중 3개 했고요. 현재 편집 중입니다. 그리고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주연의 사극 <전,란> 각본을 썼고, 제작자로서 한창 촬영 중이죠.
최민식
저는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파묘>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영화를… 촬영 내내 무서웠어요. 도깨비 하고 귀신 하고 싸우고, 그 감독은 집안 대대로 크리스찬인데 왜 무서운 귀신 이런 걸 만드는지. (웃음) 김고은 씨가 무당으로 나오고, 저는 묘자리 봐주는 풍수사 역할입니다. 그걸 얼마 전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 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