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인 <잠>(2023)의 장르는 호러다. 호러영화 <컨저링>(2013)이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를 표방한 이후부터 호러영화들은 <여고괴담>(1998)의 이른바 점프컷 전진 같은 테크닉으로 놀래키거나 <13일밤의 금요일>(1980~) 시리즈처럼 잔혹한 이미지들의 단지 놀래키기 위한 장면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잠> 또한 그런 계열로 조곤조곤히 걸어들어가며 조금씩 죄어들어가되 엄습하며 들어오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영리하게 잘 구성된 호러 영화다. 한정된 공간에서 미지의 무언가가 조금씩 다가오며 불안과 공포를 던진다는 면에서 리들리 스콧의 데뷔작인 <에이리언>(1979)이 연상되기도 하고 남녀의 알콩달콩함과 공포의 쫀득한 맛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면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기를 지켜야 하는 엄마가 오컬트적 존재에 맞서는 이야기는 <악마의 씨>(1968) 이후부터 늘 유효한 설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아내인 수지(정유미)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남편인 현수(이선균)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두 인물의 시선에 따라 서서히 변하는 공포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시도를 한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의 몽유병으로 인해 아내가 겪는 불안을 묘사한다면, 후반부 공포의 방향은 광기에 사로잡힌 아내를 향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수진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남편에게 몽유병이 생겨 이상 행동을 보이는데, 임산부인 수진은 이제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남편의 증상을 고쳐야 한다. 그런데 고쳐지지 않는 이 증세는 수진을 흠모하지만 사망한, 아랫집 노인의 귀신이 현수에게 들러붙은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되고 이야기는 남편의 몸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느냐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호러 무비의 하위 장르인 오컬트로 변모한다. 앞에선 수진의 리액션을 광기라고 표현한 데에는 영화가 이제는 현수의 시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는 렘수면 장애라는 판명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그리고 드디어 완치된다. 하지만 아내가 보기엔 그것은 엉뚱한 진단이기 때문에 내 남편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몰래 몸에 부적 문신까지 새겨 넣는다.
그래서 현수의 귀접은 과연 효과적으로 퇴치되었을까? 여기서 현수의 직업이 연기자라는 사실과,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가 아랫집 노인의 성대모사를 꽤 잘한다는 사실은 더블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즉, 아내가 되려 귀신에 씌인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는 수진의 상태를 보고서 남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몽유병이 완치했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귀신이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아내의 대처로 인해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수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빙의) 혹은 완벽하게 재현해낸다.(연기) 이것이 연기인지 실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제로 유재선 감독은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결말에 관한 방향을 한정 짓고 싶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만약 그것이 가짜였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엔딩을 맞이한다. 이러저러한 가능성을 남겼지만 현수의 몸에는 수진을 육체적으로 탐하는 노인의 귀신이 깃든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당연한 굿과 49제를 지냈으며, 수진의 광기는 광기가 아니라 정당하고 적절한 대응이었으며, 이윽고 현수의 몸에서는 그 노인이 나가게 된 것이 진실이 됐다.
실은, 이런 식의 엔딩이 호러장르의 영화에서는 '찝찝하지 않기 때문에 찝찝한 엔딩'처럼 보일 수 있다. <오멘>(1976)과 <곡성>(2016)을 생각해보자. 빌런의 역할로 나오거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는 세력, 귀신 혹은 그에 복속된 쪽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영화는 프로타고니스트라 불리는 주인공 측이 성취를 가져가며 관객에게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호러 영화가 공포감을 자아내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공포를 통한 삶에 대한 진리나 실태를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 소시민이 비극을 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호러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의 감정세례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화 속 공포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지점은 그 현실 가능성이 높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호러 영화가 우리 삶의 모습을 재연하는 방식인 것이다.
영화 <잠>의 아군인 부부의 맞은편에는 적군인 노인의 귀신이 있다. 연출자는 모호함을 무기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지만 꽤 선명한 결말을 낸다. 여기서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현수에게 일어난 일이 빙의가 아닌 연기로 판명난다고 가정해보자. 수진은 귀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고 아기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여전히 현수 안에 있다. 그리고 아기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러한 암시로 끝을 맺거나, 무구한 존재인 아기의 상해는 상업영화에서 금기일 수 있으니 제3의 비극을 부른다.
그리고 그 과정상에서 더욱 큰 모호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면 수진이 퇴마의 결론 부분을 보는 장면, 즉 현수의 모습이 수진의 눈동자에 반영(reflection)된 장면은 더더욱 큰 함의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란 곧 삶의 반영인데, 그 반영이 반영의 기법으로 보이는 것은 모호함이란 측면에서 꽤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러 장르의 현실
공포영화 장르는 데뷔를 하는 감독들에겐 명민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건축학개론>(2012)의 연출자인 이용주 감독이 <불신지옥>(2009)으로 시작한 것이 그 예다. 장르적으로 능숙하지 않거나 취향에서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대형 흥행배우의 기용이라는 면에서 자유로워 프로덕션을 운용하는 면에서 예산적 측면에서 선택지가 많다. (하지만 <잠>의 경우엔 유명 배우의 캐스팅까지 성공한 사례)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을 덩치를 키우는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아이디어를 통해 극적 긴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촬영의 공간 및 기간을 능률적으로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계가 침체 분위기에 있지만 살아남는 영화의 이유는 늘 뚜렷하다. 연출자의 두 번째 영화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