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

추석 시즌을 겨냥한 한국 영화 빅 3 중, 가장 멀리 뛰는 영화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1947 보스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은퇴한 마라토너 손기정, 동메달리스트 마라토너 남승룡, 그리고 '제2의 손기정'으로 각광받던 서윤복이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담은 영화다. 한국영화 흥행사의 국가대표라 할 수 있는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이번 영화는 하정우, 배성우, 임시완이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을 연기하며 실제 인물들의 뜨거운 승부사를 담아낸다. 9월 11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만난 <1947 보스톤>의 첫인상과 이후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의 발언들을 모아 소개한다.


<1947 보스톤>은 마라토너들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호흡은 단거리 달리기처럼 빠르다. 물론 부담될 만큼 빠르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마라톤처럼 장기전의 호흡으로 관객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영화는 감독이 된 손기정이 서윤복 선수를 세계 제일의 마라토너로 뛸 수 있게 만드는 순간들을 자세하게 다루는데, 손기정 선수가 겪은 치욕의 순간은 짧고 굵게 요약한다.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린 그 순간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영화는 빠르게 손기정-남승룡-서윤복 세 사람의 만남과 관계 형성에 빠르게 도입하고, 관객도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 밑바탕은 베테랑 강제규 감독의 안정적인 연출에 있다. 해방 직후의 한국과 미국 보스톤을 그리는 이번 영화는 자칫하면 인물도, 배경도 놓칠 법한 다양한 포인트가 산재해있다. 강제규 감독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장면에서 필요한 부분을 적확하게 제시하고, 관객과 인물 간의 공감대를 이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재차 꺼내야만 하는 건 당연히 그 일화에 담긴 정서 혹은 메시지 때문일 텐데, 강제규 감독은 이 부분을 굉장히 잘 짚어낸다.

또한 세 배우의 호흡 역시 상당하다. 손기정을 ‘아빠 같은’, 남승룡을 ‘엄마 같은’ 역할로 비유한 강제규 감독의 말처럼 하정우는 그의 대명사와 같은 천연덕스러움을 다소 거두고 그 자리를 과거의 무게를 짊어진 인물의 고충으로 채웠다. 물론 그 특유의 유쾌함이 종종 묻어나긴 하지만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감독 손기정의 면면이 잘 묻어난다. 서윤복 선수를 맡은 임시완은 실존 인물의 존경심이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변신을 보여준다. 본인 인생 최저 체지방률(6%)을 기록했다는 말처럼 군살 없이 실전 근육으로 꽉 찬 몸매를 보여주고, 달리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았던 서윤복 선수의 악바리 근성과 투지를 스크린 가득 채운다.

다만 이 영화가 이 시대에 적합한가는 다소 의문이 든다. 이제는 IMF 시절 '금 모으기 운동'도 국민의 성과임과 동시에 국가/시스템의 과오를 국민에게 떠넘겼다는 평가를 받는 이 시대에 체제의 문제를 개인이 짊어지는 몇몇 장면은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존인물들과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지만, 한편으론 마음보다 이성으로 영화를 읽는 관객들에겐 썩 타율 좋은 장면은 아니리라 예상한다. 또 몇몇 장면은 스케일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삽입됐지 않았나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일부 영화팬들이 말하듯 '아는 맛'으로 예상되는 <1947 보스톤>은 그 아는 맛이 왜 인기 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이 아는 맛의 한계도 꽤 뚜렷하다.


나 역시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임시완

마라토너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달리기로는 먹고 살 수 없었던, 그러나 끝내 마라토너로 성취를 거둔 서윤복은 임시완이 연기했다. 임시완은 “그분(서윤복)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책임의식을 가졌다.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를 나간 분”이라며 “작품상의 캐릭터를 맡은 것뿐이지만, 저 역시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실제로 그는 서윤복 선수를 재현하기 위해 촬영 두세 달 전부터 마라톤 훈련을 받았으며, 촬영이 끝난 뒤에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고. 이렇게 “건강한 취미를 알게 해준 영화가 개봉하게 돼 반갑다”고 덧붙였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 아닐까

강제규 감독

강제규 감독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자주 연출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SF영화를 준비하다 엎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미래를 표현하는 게 뭘까. 과거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는 일이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싶었다. 과거를 다루는 것이 SF다,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발자취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이번 <1947 보스톤>으로 마라톤을 다루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 <불의 전차>를 보고 달리기와 마라톤 매력에 흠뻑 빠졌다”며 “그때부터 달리기 영화를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쌓여 오늘의 영화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휴 허드슨 감독의 <불의 전차>


그간 촬영하면서 느끼지 못한 엄숙함 느껴

하정우

하정우는 손기정을 연기하며 느낀 감정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정우는 “보통 캐릭터를 맡으면 저에게서 출발하는데 손기정 선생님은 제가 알 수 없기에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어떤 분인지 알아갔다”며 “그래서 연기와 말과 행동의 시작을 손기정 선생님께 두었다. 어떤 마음이셨을지 매 테이크마다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 특히 영화를 여는 오프닝의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 장면을 찍을 때 “특히 그 순간은 나 자신이 체험하는 것 같아 발이 무거웠다”며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느껴본 적 없는 엄숙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21세기 말 쓰지 말자 다짐

김상호

김상호는 미국 현지에서 선수단을 돕는 백남현을 맡았다. 그 또한 선수단을 도운 실존인물 백남웅 선생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인데, 김상호는 “큰 역할을 하신 실존인물이시지만 자료가 많지 않았다”며 “배우들은 뭔가를 상상하려는 사람들이라서 자료가 없는 게 저에겐 도움이 됐다”고 입을 열었다. “자료가 없어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지만, 그분 명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화화한 극중 캐릭터는 저의 상상이 만든 것일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본에서 이 인물이 (선수단을) 맹목적으로 돕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매력이 있었다. 그 시대의 한 개인을 어땠을까 상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21세기 말을 쓰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드라마 <킹덤> 시즌 1을 촬영할 당시 자신도 모르게 “스톱! 오케이, 오케이” 했는데, 심지어 당시 감독님까지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가 오디오 감독이 “영어 쓰셨어요”라고 말해 NG가 됐다는 일화를 언급해 현장을 폭소케 했다. 김상호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시대 배경에 맞게 21세기 말을 안 쓰면서 서윤복의 경기에서 오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설명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