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 비어의 롤 모델이자, 평행 이론의 배우 니나 호스

지난 2010년대 독일 영화를 상징하는 배우를 꼽자면 니나 호스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토니 에드만>(2016), <인디아일>(2018)의 산드라 휠러,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의 율리아 옌치의 이름도 뒤이어 등장할 것이다. 이제 2020년대 독일 영화의 새로운 계보를 이을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1995년생의 젊은 배우 폴라 비어다. 공교롭게도 폴라 비어와 니나 호스 사이에는 크리스티안 펫졸드라는 거대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니나 호스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초기작 <나를 상기시키는 것>(2001)부터 <피닉스>(2014)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을 펫졸드의 페르소나로 활약했고, 그녀는 2007년 <옐라>를 통해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폴라 비어는 <트랜짓>(2018)부터 9월 13일 국내에 개봉한 펫졸드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2023)까지 새로운 페르소나로 활약하고 있다. 폴라 비어 역시 <운디네>(2020)를 통해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두 사람 사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늘어났다. 심지어 폴라 비어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니나 호스를 롤 모델로 꼽은 적이 있으니, 폴라 비어와 니나 호스의 커리어가 마치 평행 이론처럼 이어지는 점이 해외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어파이어>의 폴라 비어

독일 영화계의 새로운 스타라고 할 수 있는 폴라 비어의 매력은 역사와 현재, 시대와 신화를 가로지르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는 영화가 과거로부터 현재로 뻗어가거나, 허구로부터 현실로 나아가는 모든 마법적인 순간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고전적인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샌가 유유히 현실로 복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마치 니나 호스가 <피닉스>(2014)에서 ‘Speak Low’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다 퇴장하는 장면이 자아내는 저릿한 충격처럼, 폴라 비어의 얼굴은 환영적인 순간에서 가혹한 현실로 우리를 당긴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펫졸드의 카메라에 맞추어 이번 <어파이어>에서도 그녀의 매력은 폭발한다. 현시점 독일에서 가장 핫한 배우 폴라 비어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서 그녀의 매력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프란츠> - 안나 호프마이스터

2010년 크리스 크라우스의 영화 <폴 다이어리>에서 주인공 오다 폰 지어링 역으로 15세의 나이에 영화계에 데뷔한 폴라 비어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품은 2016년 프랑스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내가 죽인 남자>(1932)의 리메이크 버전인 <프란츠>에서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슬픔에 빠진 안나 호프마이스터 역을 연기한다. 어느 날 그녀가 살던 마을에 프란츠의 친구를 자청하는 프랑스인 남자 아드리앵(피에르 니니)가 찾아오고,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안나와 프란츠의 부모님은 아드리앵을 환대한다. 하지만 아드리앵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이 존재했고, 그는 그 비밀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 프랑스로 되돌아간다.

<프란츠>는 전쟁 영화이면서 동시에 멜로드라마이고, 또한 동시에 속죄와 용서라는 윤리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원작 <내가 죽인 남자>에서는 아드리앵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인 ‘폴’을 집중적으로 묘사했지만 프랑수아 오종은 그 자리에 프란츠의 죽음을 그리워하는 안나를 배치한다. <프란츠>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이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드리앵의 비밀을 듣고 강물 속에 투신하려는 안나의 장면이 축이 될 것이다. 두 개의 거짓을 모두 짊어진 채 누구에게도 용서받지도 용서하지도 못한 채 짓눌린 안나의 몸짓은 오로지 폴라 비어만이 구현해 낼 수 있다. 어떤 삶의 의지도 잃은 채 나풀거리며 강물로 투신하는 몸짓과, 강에서 건져 올려진 뒤 잔뜩 머금은 물의 무게로 축 처진 채로 부들거리는 그녀의 세밀한 떨림이 한 장면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원작의 폴이 아닌 안나에 무게를 실은 프랑수아 오종의 선택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 미상> - 엘리 시반트

<타인의 삶>(2005)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2018)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삶을 바탕으로 독일의 근현대사를 3시간의 대서사시 안에서 훑는 작품이다. 전기 영화이자 역사 영화인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암시하는 미술학도 쿠르트 바르너트(톰 쉴링)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동/서독의 분단과 사회주의 미술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편입, 그리고 포스트모더니티의 예술가로 활동하는 쿠르트의 삶은 곧 독일의 역사로 환원된다. <작가 미상>이 역사와 미술을 교차시키며 시대로부터 예술을 도출시키려는 시도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여주었던 죽은 이모 엘리자베스를 닮은 의상학도 엘리(폴라 비어)다.

나치즘의 압제 속에서 칸딘스키를 사랑하던 이모 엘리자베스는 강제 불임 판정을 받고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철저히 존재가 지워졌다. 그런 이모를 그리워하는 쿠르트의 눈앞에 등장한 엘리는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한 이모의 현현과 같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세계가 ‘포토 페인팅’ 즉, 사진처럼 현실을 포착하려 하지만 끝내 기억의 풍화로 현실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때, 폴라 비어가 연기한 엘리는 엘리자베스의 포토페인팅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폴라 비어의 몽환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엘리의 몽환성은 그저 쿠르트의 트라우마 속 이모의 이미지로만 남지 않는다. 엘리는 쿠르트에게 생의 의지와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힘’의 존재로 탈바꿈된다. 폴라 비어는 이 지점에서 몽환에서 활력으로 인물을 변모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쿠르트라는 인물과 작품을 구원했다.


<운디네> - 운디네

서양 연금술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 ‘운디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운디네>는 명백히 ‘물’에 대한 영화다. 정확하게는 원소 3부작으로 불릴 펫졸드의 연작의 가장 첫 단추가 되는 작품이다. (이번에 개봉하는 <어파이어>(2023)은 불에 관한 영화로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의 소설 「운디네」와 신화를 참고하면 더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물의 정령 ‘운디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배신을 당하면 그를 죽이고 다시 정령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신화의 측면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펫졸드는 이 신화를 현대라는 시간과 베를린이라는 공간 위에서 풀어낸다. 여기서 운디네(폴라 비어)는 도시개발 전문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관광 가이드이며, 요하네스라는 남자에게 실연당한 뒤 산업 잠수사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를 만나게 된다.

신화가 현실로 이양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습기를 가득 머금은 대지 위에 세워진 도시, 베를린과 독일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한 일이라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운디네는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기에, 그녀를 마치 역사의 곁에 맴도는 대언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펫졸드의 이 놀라운 영화에서 요하네스와 크리스토프 두 남성에게 모두 버림받고 물의 세계로 돌아가는 운디네의 존재는 가장 핵심적이다. 잠수부 조각상이 담긴 수족관이 깨지면서 크리스토프와의 사랑이 시작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운디네>에서 사랑은 순식간에 발생한다. 바로 크리스토프와 운디네가 깨진 수족관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두 시선을 맞닿는 그 찰나다. 로고스키의 순박한 눈과 폴라 비어의 몽환적인 눈이 맞닿는 그 순간이 곧 사랑의 논리가 된다. 이 짧은 간격의 감정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두 배우의 역량이었다. 어쩌면 크리스티안 펫졸드가 니나 호스와 폴라 비어를 가장 아름답게 잡는다 평가 받는 이유는, 펫졸드의 애정 어린 시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크린을 모두 끌어당기는 두 배우의 얼굴일 것이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