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산문은 일반적 걸음걸이, 운문은 춤에 비유되곤 한다. 산문이 직진이거나 수직적 방향을 지닌다면, 운문은 곡선으로 휘어 전후좌우를 모두 아우르는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문은 그래서 설명적이고 목적 지향적이다. 해석과 판단 또한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의미의 폭이 제한적이다. 반면에 운문은 해석의 방향이 다양하게 열려 있거나 숫제 일상적 해석이 불필요할 때도 있다. 그저 움직이기 위해 움직이고,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자기를 잊어라!

그런 점에서 춤은 어떤 관성화된 움직임과 사고, 습관으로 굳어버린 움직임을 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직선을 곡선으로 구부려야 하고, 일방향적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굳어버린 인식 체계를 흩어놓아야 한다. 고정된 자의식과 상대에 대한 편견에 이끌린다면 춤은 불가능하다. 몸은 늘 무언가를 경계한다. 타인의 움직임과 말, 그리고 거기 반응하는 자기 자신의 기본자세(심리적 태도일 수도 있다)에 대한 보호심리가 몸의 자유로운 운용을 방해한다. 자연의 모든 원리가 그렇다. 박자를 생각할 때 박자를 놓치고, 뭔가에 집착할 때 그것은 이미 자신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난다.

샐리 포터의 <탱고 레슨>(1998)은 감독 스스로가 자신에게 요구하고 지향하는 바를 직접 체현한 에세이처럼 여겨지는 영화다. 직접 대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며 직접 탱고를 배우는 과정을 담백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혹은 영화를 구상하는 단계에 있는 자신을 스크린에 투영한다는 건 스스로 관객이 되고 스스로 타인이 되는 일일 수 있다. 영화 속의 샐리 포터는 외롭고 고집이 세 보인다.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야무지고 고운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는 가느다란 실선 같은 주름이 그녀의 고독과 고행을 애잔하게 바라보게끔 한다. 그녀는 당시 쉰을 앞둔 나이다.

첫 장면에 그녀는 휑한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있다. 백지 더미만 달랑 놓여 있는 동그란 테이블. 하얗고 눈부신 흑백 영상이다. 샐리가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영화 장면만 선연한 컬러이고, 그 외 모든 장면이 흑백이다. 구상 중인 영화엔 빨갛고 노랗고 파란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들이 등장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고 느닷없이 총소리가 난다. 하반신이 아예 없는 한 남자가 무희들과 추격전을 벌이는 샐리의 머릿속 영화. 샐리는 하얀 백지 위에 연필로 쓴다. 분노(rage). 영화 제목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잘 풀리지 않는다.


영화 만드는 사람이 영화가 되다

런던 출신인 샐리는 파리에 와 있는 상태다. 우연히 들른 탱고 무도회장에서 샐리는 파블로 베론(그 또한 본인 스스로를 연기한다)이라는 젊은 탱고 댄서를 만난다. 둘은 곧 친해진다. 샐리는 탱고의 매력에 반해 파블로에게 레슨을 받고 싶어 한다. 파블로는 어릴 적 꿈이 배우였고, 샐리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둘 다 유태인이다. 둘은 서로의 빈틈과 결핍을 메워주는 존재이고자 한다. 그러면서 점점 감정이 깊어진다. 공과 사, 일과 사랑에 대한 서로의 선이 겹치는 듯 어긋난다. 감정이 농익는 만큼 갈등도 심해진다. 레슨 도중 다툼이 잦아진다. 잡념과 자의식을 내던지고 자신에게 몸을 맡기라는 파블로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움직이고자 애쓰는 샐리.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서로의 고집과 관점의 충돌일 뿐이다.

파리에서 둘은 같이 무대에 오른다. 보기에 아름답고 완벽해 보이는 공연. 그러나 샐리가 자족할 때 파블로는 분노하고, 파블로가 굳건해 보일 때 샐리는 좌절한다. 한데 어우러져 발끝 하나 눈짓 하나까지 커다란 호흡 안에서 분출한 듯 보였던 공연이지만, 파블로는 샐리의 긴장과 자의식 때문에 망쳤다고 여긴다. 관객들은 환호했고 동료들도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둘은 감정의 극한까지 달해 서로를 비방하듯 매몰찬 말들을 내뱉는다. 관계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인가 싶다.


모든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상심한 샐리는 생 쉴피스 성당을 찾는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라는 커다란 그림 아래서 뭔가를 깨닫는 듯하다. 파블로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둘은 재회한다. 구상 중이던 영화 ‘분노’는 제작자들의 간섭과 난색으로 단념하게 된 상태다. 샐리는 파블로를 주인공으로 탱고에 대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한다. 탱고 레슨을 받던 샐리가 이제, 파블로에게 연기 레슨을 하게 되는 셈.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이전과 비슷한 갈등이 반복된다. 파블로는 샐리가 생각하는 영화의 깊이와 감정의 온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멋있고 화려한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탱고 레슨을 받으며 저항하던 샐리의 태도와 연기 레슨에 반발하는 파블로의 태도가 동전의 양면처럼 똑 닮았다. 일과 관련해서든 감정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해서든 둘은 결국 똑같은 고집과 독선으로 상대를 대하고 있는 셈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어느 쪽이 더 오해하고 일방적으로 구는지 분별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자아들끼리의 소소하나 치명적인 입장 투쟁의 반복일 뿐이다. 상대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일은 이토록 늘 허방에서의 헛손질 같다.

서로의 몸을 의지하고, 서로를 믿고, 서로를 배려함으로써 더 단단하고 유려해지는 탱고이거늘, 서로의 발을 밟고, 피차 상대를 탓하며 자아를 꺾지 못하는 두 사람의 끝없는 분쟁. 삼자가 보기엔 아름다웠으나 당사자들에겐 불신과 애증과 불만의 연속이었던 탱고 레슨이 사뭇 서로를 갉아먹는 전쟁터로 변한 것만 같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며 샐리가 파블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천사와 싸우는 것 같기도, 악마와 싸우는 것 같기도 하나, 결국 자신과의 싸움 아닐까 싶어.” 파블로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이 또 자신을 상대 삼아, 또는 상대를 자신 삼아 계속 싸움을 거는 것이다. 레슨은 이토록 가혹하고 지리멸렬하고 이기적이다. 배우는 자나 가르치는 자나 전혀 다를 바 없다. 왜 자꾸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분열할까.


그녀는 과연 무엇에 분노했을까?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수차례 화해와 양보가 반복된다. 어느 한쪽이 한쪽을 놓아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 한 레슨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으로 스승을 능멸하는 자가 진정한 제자라고. 그것이 배움의 참된 오의(奧義)라면 둘은 여전히 어떤 것의 맨 처음 지점, 첫 걸음마 단계에서 조금도 발을 떼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둘은 여전히 어떤 조화를 찾는다. 일과 사랑, 공과 사, 자신과 상대라는 두 개의 직선을 부드럽게 구부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게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려내야 할 커다란 원의 시작일 것이다.

모든 형태는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다. 직선이든 곡선이든 마찬가지다.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모종의 구체적 형상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가 하나하나의 점이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샐리는 동그랗고 커다란, 종이 말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짐짓 망설이는 듯하다가 연필로 ‘분노’라 쓴다. 샐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화 장면들이 화려한 컬러로 잠깐씩 등장한다. 하지만 그 영화는 결국 시작도 못하고 폐기된다. 어떤 영화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무희가 등장하고 하반신 없는 남자가 등장하고 총소리가 들리며 무희들이 차례로 죽는다. 분노라. 샐리가 과연 무엇에 분노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파블로와의 탱고 레슨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샐리와 파블로는 사랑과 오해, 좌절과 분노, 질투와 연민 등을 모두 겪는다. 영화는 특별한 설명 없이 일견 단조롭게 쪼개지는 듯한 일화들을 조각조각 모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섬세한 씨줄 날줄들이 커다란 원환(圓環)을 엮는 구조로 진행된다.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가장 작은 원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가 하나하나의 점이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샐리는 동그랗고 커다란, 종이 말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짐짓 망설이는 듯하다가 연필로 ‘분노’라 쓴다.

마지막 장면에서 샐리와 파블로는 센 강변에서 조화롭게 춤춘다. 모든 갈등이 끝났다기보다 하나의 점이 다른 점을 만나 더 큰 원을 그려내기 위한 곡선 하나가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느낌이다. 몸이 완전히 굳은 나이에 춤을 배우려면 몸에 밴 모든 습관을 버리고 이겨내야 하는 게 기본이다. 그래야만 커다랗고 텅 빈 테이블에 작은 점 하나 찍히게 된다. 그 점은 여태 살아온 모든 오류와 감정의 굴곡들이 다 모여 원의 일부로 시작되는,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작은 원이다. 일단 찍어보자. 오로지 자신만 볼 수 있는 커다란 원 안에서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한 발짝 두 발짝. 갈등도 오해도 지속될 것이다. 샐리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가 정말 완성될 수 있을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래도 계속 찍고 또 찍어야 하는 게 인생이다. 짠짠짠짠 짜자자잔짠!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