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 포스터.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하며 한국에 판타지 장르물이 가능함을 보여준 강제규 감독이 돌아왔다. <장수상회>(2015) 이후 8년 만의 귀환이다. 사실 강제규 감독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를 논할 때 세련된 연출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로 불렸던 사운드, 화면 등 기술적 한계를 한 단계씩 극복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효시 격인 <쉬리>(1999)로 ‘첩보 액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OST 분야에서도 한 획을 그었고, 이후 역대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를 인정받았다. 스크린에서 수직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역동적인 전쟁 시퀀스는 20여 년이 흐른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탄탄한 각본과 시대를 앞서간 연출력으로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그가 8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은 <1947 보스톤>이다. 대한민국 최초 국가대표 마라토너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이 해방 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고군분투와 우여곡절 끝에 보스톤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겪게 되는 이야기다.

강제규 감독은 2023년에 왜 1947년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왜 달리기를 소재로 선택한 것일까? 사실 강제규 감독의 마라톤 사랑은 전작 <마이웨이>(2011) 때부터다.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주인공이 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로 잡히는 서사가 이미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단순한 달리기일 뿐인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강제규 감독은, 언젠가 손기정 선수를 제대로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시대적 배경에 대해 그는 “1947년은 혼란스럽고 희망이 부족했던 시기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루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통해 힘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라고 설명했다. 8년 만에 돌아온 강제규 감독을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나 <1947 보스톤>에 대해, 그리고 강제규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강제규 감독.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추석에 한국 영화 3편이 나란히 관객을 기다립니다. 개봉을 앞두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죠. 영화인들이 많이 긴장해 있고,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지만, 어쨌든 돌파구를 만들어야죠. 영화인들이 지금 가장 큰 위기를 느끼지만, 결국 누군가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어요. 우리 힘으로 극복해야죠. 지금은 제가 영화계에서 선배 감독이 되었으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1947 보스톤>뿐 아니라 다른 한국 영화들이 다 잘 되어서, 지금의 한국 영화 위기에 터닝포인트가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수상회> 이후 8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이렇게 오래 걸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마이웨이>가 제가 기대했던 만큼 흥행 성과에 미치지 못해 피로감이 컸어요. 스스로를 한 번 조용하게 돌아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겠다던 차에 <장수상회>를 선택한 거죠. 작업을 하면서 다시 좀 전열을 가다듬었기에(웃음), 이제 새로운 전투를 좀 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중국 완다그룹에서 <두파창궁>이라는 작품을 같이 하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제작비가 700억 원이 넘는 큰 규모의 영화였어요. 2년 정도 준비하면서 캐스팅 작업을 마치고 막 시작하려던 찰나에 사드 문제가 터졌습니다. 중국에서 한한령이 내려지면서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도전을 하려던 이유 중 하나가요. 한국 영화가 활로나 지평을 좀 더 넓혀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중국 시장이 크고,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인접국이잖아요? 정서적인 교감 부분도 크다고 봐서 영화적 협력의 바탕이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죠. 여기서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한국 영화가 중국을 무대로 함께 활동하면서 작품들이 나갈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될 수 있는 건데 그런 상황이 터져서 안타까웠습니다.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그때 <1947 보스톤> 시나리오를 받으신 거겠군요. 처음 시나리오를 보시고 어떤 느낌이셨는지, 또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이 바로 든 건지도 궁금합니다.

그렇습니다. 중국과 협업하느라 2년을 보내고, 또 코로나가 3년이 있었으니 5년이 훅 지나간 거죠. <1947 보스톤>이 그 나머지 3년의 기간 동안 작업한 영화입니다. 시나리오 각색을 하고, 코로나 기간 동안 후반 작업을 하면서 개봉을 준비했던 거죠.

처음 <1947 보스톤>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저는 좋았어요. 예전부터 스포츠 영화 중에도 달리기 영화를 꼭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불의 전차>(감독 휴 허드슨, 1981)라는 영화를 보고 굉장히 큰 영화적 에너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달리는 게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다고? 이렇게나 단순한 운동인데’라는 생각이 깨진 거죠. 거기에서 출발해서 전쟁 영화를 하고 싶은데, 달리기 이야기를 꼭 담아야겠다고, 저 혼자 줄곧 생각하던 차에 <1947 보스톤> 시나리오가 들어온 거죠. 우연치고는 참 신기했어요. 저 혼자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이 시나리오가 저에게 다가온 건 운명적인 아닌가 하고요(웃음).

전작 <마이웨이>에서도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인물 준식 역으로 장동건이 등장합니다. 달리기 중에서도 특히 마라톤에 끌리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마이웨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즈음을 배경으로 했고요, <1947 보스톤>은 1947년이 배경이죠. 두 영화 모두 1936년 이후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어찌 보면 손기정 선생이 준 영향이 너무 컸어요. 자신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준 시대적으로도 큰 인물이었죠.

<마이웨이>에서도 그래서 손기정 선생의 일부를 대입시켜서 설정한 거죠. 그런데 그때 제가 좀 본격적으로 마라톤과 손기정 선생에 대해 파고 들어가 봤어요. 손기정 기념재단을 통해 마라톤대회도 여러 번 참여했고요. 손기정 선생의 손자분에게 손기정 선생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정말 도움이 되었죠. 그때부터 더 매력에 빠진 거 같아요. 이렇게 잠깐 등장하는 설정으로 할 게 아니라, 꼭 손기정의 일대기나 마라토너 손기정을 재조명한다기보다는 마라톤 영화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굳혔던 거 같습니다. 물론 말씀드렸듯이 그 시작은 <불의 전차>였고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으시면서 이것만큼은 꼭 지키겠다고 생각한 기준 같은 것이 있을까요?

전체적인 큰 맥락은 건드리지 말자는 거였죠. 1947년 보스톤마라톤대회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적 팩트잖아요.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세 분이 똑같이 대회 참여를 위해 노력했어요. 서윤복 선수를 세계무대에 올려서 원하는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서요. 세 분에 대한 모든 기록이 팩트이기 때문에, 이 원안은 가져가자. 다만 이 이야기를 너무 극화시키지는 말자는 거였습니다. 원래 사실이 가진 무게감과 존재감을 크게 훼손시키지는 말자는 것이 기준이었죠. 그 외에 나머지는 디테일입니다. 조금 더 극화한다거나 인물들 간 역할의 밸런스를 조절한다든가 하는 거죠.

픽션으로 창조한 부분 하나만 이야기해주신다면요?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디테일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죠(웃음). 하나만 예로 들면, 사실 남승룡 선수입니다. 영화에서는 배성우 배우가 역할을 맡았는데요. 우리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실제 남승룡 선수가 달라요. 어찌 보면 굉장히 엄격하고, 마라톤에 대한 가이드나 마라토너로의 정신이랄까요? 그 당시를 마라토너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시대정신 같은 것이 강했던 분입니다.

이게 손기정 감독 캐릭터와 너무 비슷해서 부딪혔어요. 고민하다가 손기정 감독 캐릭터를 유지하고, 남승룡 선수 캐릭터를 조절했죠. 보스톤마라톤대회를 준비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닥칠 때 나서서 해결도 하고, 인물 간 갈등이 발생할 때 완충도 해주며, 서윤복 선수 편에서 최대한 그를 서포트하는 인물로요. 그런데 그 자체는 또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런 강직함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말씀을 듣다 보니 손기정 감독이나 서윤복 선수야 물론이지만, 남승룡 선수 캐릭터에도 심혈을 기울이신 느낌도 듭니다.

제가 이 영화에 애착을 더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남승룡이라는 인물 때문이었어요. 이분은 달리기로는 손기정 감독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 선수였어요. 1등을 하기도 했고, 좋은 기록을 여러 번 내기도 했죠. 그런데 우리는 늘 손기정 선수만 기억합니다. 승자의 역사만 기억하니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3등은 기억하지 못하죠.

사실 마라토너로서 손기정 선수와 견줄 수 있는 훌륭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36세의 나이에 뛰겠다고 나선 것, 그걸 넘어 서윤복 선수를 위해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걸 보고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약 <1947 보스톤>에 서윤복 선수와 손기정 감독 이야기만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더더욱 남승룡 선수 부분을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애착과 애정이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촬영 현장에서 하정우, 임시완, 배성우, 김상호 등의 배우에게 주셨던 가장 큰 디렉션이 있다면요? 원칙이라든가요.

요즘 관객에게 조금 더 편안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려고 다이얼로그(대화)를 좀 더 시대극 같지 않게 한다든가, 동작을 한다든가 하는 부분에서 제가 배우들에게 굉장히 많이 열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시대물, 역사극에 관심이 떨어지고 있기에 접근성을 용이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장벽이 될 수 있는 지점을 낮추자, 탄력적으로 가자고 배우들에게 허용한 거죠.

하지만 원형은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고 배우들에게 강조했어요. 그 원형이란 건 ‘과연 1947년에 손기정 감독과 남승룡, 서윤복 선수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보스톤마라톤대회에 참여하는 각오와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거였죠.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릴 수 있는 진실성이나 노력 같은 소중한 원형 자체는 연기에 임할 때 잊지 말고 마음에 두자고요. 어떤 장면을 찍더라도 그 심지가 무너지면 이건 관객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말했죠.

이 영화는 주인공을 가로막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대가 가장 큰 허들이자 빌런이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독립 정부 없이 미 군정 하에서 민족과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 모두가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1947년.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가능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던 마라토너들의 이야기를 통해 2023년을 살아가는 관객들도 힘과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제규 감독

가장 힘들게 촬영한 부분은 아무래도 보스톤 마라톤대회 장면이겠죠?

그렇습니다. 장소를 찾는 것 자체부터 너무 힘들었죠. 대부분 영화는 특정한 한두 장소에서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출발선부터 시작해서 피니시라인까지 다 장소가 달라요. 그러다 보니 장소 찾기가 너무 힘들었죠. 1947년의 보스톤을 오픈세트로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요. 도시를 찾아서 구간별로 허가를 받고 통제를 하고 찍어야 했는데,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씬들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컸던 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컨디션도 문제였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달리는 걸 촬영해야 하잖아요. 임시완 배우나 배성우 배우도 그렇지만,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주변에서 같이 달리는 선수 중에 탈진이 와서 중간에 쓰러지는 배우들도 나왔죠. 연출자로서 연기자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레이스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과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컸죠.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반면에 즐거웠던 기억도 있겠죠. 실화 바탕 영화인데, 촬영 현장에서 일어난 뭔가 마법 같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이게 답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라톤 장면을 호주 멜버른과 인근 도시에서 촬영하기로 했어요. 준비하느라 촬영 2주 전에 먼저 비행기를 탔죠. 그런데 그때 산불이 난 겁니다. 호주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최악의 산불이었죠. 절망적이었어요. 연기나 분진이 날아드는 걸 보면서 과연 촬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우들은 호주 촬영 이후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촬영을 종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씬을 찍는데, 이런 환경에서 바람이 불면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잿가루가 날리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정말 열흘 넘게 촬영하면서 반나절 비가 내린 걸 제외하고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어요. 바람이 도와줘서 화재로 인한 후유증에서 말끔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촬영 마치는 날까지 정말 매일매일이 걱정이었거든요. 내일은 날씨가 어떨까 하면서요.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지 않아서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금부터는 감독님의 영화 세계에 대해 여쭤보려고요. 지금까지 감독님 영화들을 보면 초반부터 감정을 켜켜이 쌓아 올리면서 마지막에 응축된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그런데 <1947 보스톤>은 기승전결이라는 구성보다는 잔잔하고 담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로 느껴져요. 웃음 포인트도 영화 중반이 넘어가서야 처음 나오고요. 이번 영화를 하면서 연출 스타일이 바뀌신 걸까요?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시나리오 각색 과정으로 설명드릴 수 있겠네요. 초벌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들여다보니, 세 사람이 함께 한국을 떠나서 보스톤에 도착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여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보스톤 가기까지가 영화의 반, 보스톤 가서 벌어지는 일이 나머지 반으로 찍어도 되겠다 싶었어요. 아마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제가 이 구조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죠. 다소 느리고, 어찌 보면 좀 덜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한국에서 세 분이 어떻게 서로의 인간관계를 구축해나가는지, 또 갈등을 겪다가 다시 하나로 결집해서 보스톤까지 가게 되는지의 드라마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그래서 서윤복의 개인적인 삶도 들여다봐야 했던 거고요. 거기에는 정말 달리고 싶었지만, 생존을 위해 달릴 수 없는 환경과 어머니, 가족에 대한 문제가 있었죠. 또 남승룡 선수도 마찬가지였고요. 손기정 감독 역시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일본에 의해 육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생긴 데미지 때문에 방황 아닌 방황의 시간을 보냈어요. 이런 것들을 하나씩 쌓아가지 않고 영화 후반부에서 과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재미 측면을 좀 양보하더라도, 원형을 유지하면서 각색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라고 판단했죠.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이해했습니다. 이번에는 감독님이 영화의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서 영화 소재를 찾으세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이유는 없는 거 같습니다(웃음). 굳이 말하면, 제가 <쉬리> 이후에 SF 영화를 하고 싶었거든요. SF <요나> 시나리오도 오랫동안 썼고요. 결국 영화로 나오진 못했어요. 그때 생각을 좀 많이 했습니다. SF는 사람을 다루든 인공지능을 다루든 미래사회를 보여줘요. 그럼 그 근간은 무엇인가, 상상력은 어디서 출발할까를 고민했어요. 과거에서 출발하더라고요. 내 과거의 삶이 무엇이고, 내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해석이 없으면 SF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그때부터 시대상, 역사라든지 어디서부터인가 파생되는 인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된 계기가 생긴 거죠.

소재는 주로 어디서 찾는 편이세요?

다큐멘터리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책도 보고 다양하죠(웃음).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역사물 이야기를 꺼냈으니까요. ‘강제규 감독’ 하면 늘 ‘국뽕’ 이야기가 따라옵니다(웃음). 이런 이야기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해요.

영화라는 게 참 재미있잖아요. 보는 분들 시선에 따라 A라고 볼 수도 있고, B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 부분들은 다양하게 관객들이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느끼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해요(웃음).

<1947 보스톤>에 대해서는 ‘궤가 다른 국뽕영화’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신다면요?

이번 영화 작업을 하면서 배우나 스태프들과 많이 이야기 나눈 부분은, 이 영화가 국뽕 개념을 떠나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극대화하거나 과장하거나, 그래서 슬픔이나 감동을 강요하게 되는 부분을 정말 정말 절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손기정 감독, 남승룡 선수, 서윤복 선수 세 분이 만든 결과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고 ‘리얼’이잖아요. 무엇을 더 가미할 게 있나요? 원형에 충실하면 되고, 그걸 담대하고 담백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하죠. 과장하지 말고, 과잉하지 말고, 넘치지 말자는. 내용 자체가 국뽕이라고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뭐 그 부분을 극대화하는 장치들을 자제, 절제했기에 소위 부정적 의미로 말하는 국뽕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교수는 1983년 「상상된 공동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민족은 상상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민족의 구성원이라도 같은 민족 사람들 대다수를 결코 알지 못하고 그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그들에 관해 들어 본 적도 없지만, 저마다 마음속에는 공동체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민족을 상상하는 데는 경계, 주권, 공동체라는 방식이 있다고 했고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민족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자꾸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데(웃음). 음. <태극기 휘날리며> 때도 그랬어요. 그 제목을 제가 처음 말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거든요. 무슨 국책영화냐면서요(웃음). 그런데 이 영화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면요,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전쟁에 내몰렸던 역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쟁영웅을 이야기하자는 의도가 아니었죠. 형 진태(장동건)가 깃발군의 선봉이 되었고, 원치 않던 전쟁터에 끌려간 동생과 서로 적이 만나 싸워요. 이건 시대가 빚어놓은 아픔이지, 이 형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전쟁을 한 건 아니잖아요. 나라는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의 시간을 만들어줬냐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국가일 수도 있고 특정 정치 세력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국가와 개인을 연동시켜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죠. 이런 부분들이 <태극기 휘날리며> 때와도 관통하는 맥락이 있습니다.

<1947 보스톤>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미국 사업가로 보스톤마라톤 국가대표팀 재정보증인 백남현(김상호)이 말해요. “아니, 도대체 나라가 당신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내가 있고 나라가 있는 거지, 여기까지 왔으면 뛰어는 봐야 되지 않느냐”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죠. 서윤복도 손기정 감독에게 말하죠. “베를린올림픽에서 가슴에 일장기 달고 뛸 줄 몰랐어요? 그렇다고 감독님이 조선사람인 게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라고요. 이 대사도 제가 하고 싶던 이야기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거거든요.

특히나 운동경기에서는, 국가 대 국가로 경쟁하는 국제 경기에서 선수들은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죠.

국가 또는 나라라는 개념과 개인, 자신이라는 그 개념이 시대에 따라 큰 대화들로 표현되죠. 스포츠에서는 더 그렇죠. 태극마크를 달고,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국가 대표로서 달리는 부분에 대해 얼마나 프라이드 가지는지, 어찌 보면 목표를 달성해 뜻을 이룰 수 있다면 내 자신, 개인이 희생되어도 좋다는 자세로 임하잖아요(웃음). 물론 실제 세 분의 인터뷰를 찾아봐도 그런 마음으로 뛰셨더라고요. 지금도 올림픽 선수들 이야기 들으면 비슷해요. 아직도 그 정신은 비슷하고 유효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디테일한 부분 그러니까 국가와 나라는 개념은 시대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참 많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복잡다단한 미묘함이 있어요. <1947 보스톤>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지금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 나라라는 존재가, 내가 느끼는 자신과 국가라는 개념이 과연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요. 국가의 일부라는 나 자신은 누구이며, 내가 가진 국가관은 무엇인지를요. 이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고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만 생긴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 것 같네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1947 보스톤>은 강제규 감독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지점을 점유하는 영화라고 평가하세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과거 한국 영화가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때가 데뷔했죠. 그때는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영화가 관객들로부터 외면받는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고 분했어요. 내가 뭔가를 해서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래도 한국 영화가 볼만하고 재미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개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한국 영화와 영화계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더 염두에 뒀던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영화를 한다고 하면 밥도 못 벌어먹는 영화를 왜 하느냐, 미래도 안 보이는 한국 영화를 왜 하느냐는 냉소 분위기였죠. 그래서 더 오기가 생긴 건지도 몰라요. 그러다 보니 조금은 대의에 저 자신의 마음이 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 영화 진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죠. 그러려면 장르영화로 다변화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서 한국 영화의 기술력, 자본력, 시장 사이즈의 부재로 안 되었던 걸 가능하도록 전환시켜야지 하는 마음이 먼저였어요. 거기에 제가 하고자 하는 영화를 결합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죠.

지금은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시장에 통하는 시대죠. 물론 감독님 같은 분들이 쌓은 기술력, 자본력 등이 밑거름이 되었을 테고요.

한국 영화가 정말 많이 성장했습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 들어왔어요. 이제는 저 역시 한 사람의 감독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는 단계인 거 같아요. 지금 영화를 만드는 건 그간의 경륜과 필모그래피, 쌓아온 것들 모두를 견줘봤을 때 어떤 의미이고,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는 거죠. 스스로 제 존재의 의미를 재확인하면서도 그런 한국 영화의 역사 안에서 한 사람의 영화감독으로 지금 이 영화를 만듦으로써 후배 감독이나 동료들에게 작은 자극이 되고, 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은 큽니다.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강제규 감독이라고 하면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로 판타지 영화의 가능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나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장르를 개척하기도 하셨어요. 한국 첫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조금 투박한 느낌, 촌스러운 색감도 보이죠. 그런데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이자 신기록을 경신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아요. 아마도 감독님의 세련된 연출력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거 같습니다. 감독님이 연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지, 현장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쓰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는 ‘이 시대에 이 영화가 필요한가’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움직이는가’입니다. 이걸 항상 체크하고 자문하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무얼 이야기하려고 하는가’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적어도 두 시간 동안 긴 이야기를 하면서 확실하게 관객들에게 던져줘야 하는 무언가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제나 메시지로 표현할 수 있겠죠.

그 외에 요소들을 살펴보면요. 과거에는 한국 영화계의 투자환경도 열악했고 제작비 규모도 적었습니다. 기술적 한계나 경험치가 부족한 이유도 있었죠.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고 듣는 게 가장 크잖아요. 보고 듣는 것도 부실하고, 음악도 별로고, 비주얼도 현장 말로 하면 ‘때깔’인데,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너무 형편없이 부족했죠. 이른바 미장센의 기본을 맞추기 위한 여러 요소들이 너무나도 척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현실 탓만 하면 뭐가 개선되나요? 영화 만들면서 그런 미장센에 대해서, 단순히 화면을 이쁘게 가꾸는 것뿐 아니라, 여기에 구성되는 작은 소품 하나, 미술의 디테일들이나 카메라 무빙까지 정말 많은 요소들이 결합해서 이뤄지는 것이 미장센이거든요.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자기검열을 좀 엄격하게 하는 편이라, 이런 부분을 진화시키려 노력했어요. 때깔에 대해선 할리우드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늘 생각했고요. 외화라고 한국 영화랑 영화표 가격이 더 비싸지도 않은데, 그럼 누가 한국 영화를 보겠어요? 그런 부분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제가 어떤 영화를 했든, 한국 영화가 어렵던 시절에 그 부분에 각별히 유념했습니다.

‘때깔’ 말씀을 하셔서요. <1947 보스톤>에서 때깔 좋게 하려고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었다면요?

지금 한국 영화의 기술적 퀄리티가 많이 올라와 있어요. 과거에는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많았는데, 지금은 제가 보기엔 어느 정도 국제 스탠다드에 걸맞은 퀄리티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47 보스톤>에서는 때깔 같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렸던 드라마의 내실을 기하는 데 신경을 더 썼어요.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코로나도 닥치고, OTT라는 플랫폼도 등장하면서 영화환경이 많이 바뀌어서요. 그럼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식으로 예를 들어 보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요즘은 배달해서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식당에 갈 수도 있죠. 그런 행위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영화도 물론 집에서 볼 수 있어요. 극장에서 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의미가 다르잖아요. 이건 하나의 놀이문화, 여가문화의 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행위들을 다 집에서만 한다면 집에서 안 나오겠죠(웃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교감하고 교류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향유하려는 의지가 있을 겁니다.

한국 영화가 어렵다는 ‘위기설’이 파다합니다. 영화 제작도, 극장 상황도 어렵다는 거죠. 감독님께서 생각하는 2023년의 영화란 어떤 것인지,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선배 감독으로 한 말씀해주신다면요.

이 영화를 꼭 이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고 봐야 할 것인가, 그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영화인들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OTT를 포함해 다양한 플랫폼이 생기면서 관객 수는 줄 수 있죠. 줄어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요. 그래도 그만큼 새로운 플랫폼에서 가치를 형성하니 전체적으로는 같아요. 관객 감소는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이들이 더 찾게 만드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인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죠. 하지만 풀어야 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요. 집약도와 완성도 측면에서 OTT 콘텐츠를 상회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굉장히 어려운 숙제지만, 영화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1947 보스톤> 스틸컷.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편수가 적어서 더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관객이 많습니다. 차기작으로는 무얼 준비하시는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의 팬으로는 판타지 장르물을 기대합니다만(웃음).

아마 대부분 감독들이 그럴 거 같은데요. 하고 싶은 건 되게 많고, 끄적여둔 트리트먼트나, 완성해둔 시나리오도 몇 편씩 있고요(웃음). 저도 여러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준비도 하는 중입니다만, 어떤 작품에 먼저 들어갈지는 미정입니다. 다만, 소망하는 것은 요즘 한국 영화계가 워낙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다 보니, OTT로 자꾸 선회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가급적 영화로 다시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있고요. 물론 콘텐츠 성격상 두 시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적합하지 않은 서사 구조라면 어쩔 수 없이 OTT가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여하튼 저도 빠른 시간 안에 다음 영화로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추석에 아마 네다섯 편 정도의 영화가 개봉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관객분들을 얼마만큼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하지만, <1947 보스톤>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우리 할아버지 때 이야기인 거 같습니다. 다소 나하고는 떨어진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의 삶의 연장이 바로 내 삶으로 이어지는 거란 생각을 해요. 이번 기회에 그분들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면, 내가 미래의 삶을 살아가는 데 아마 큰 용기와 희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극장으로 가셔서 그분들의 시대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세요. 할아버지 세대의 일들을 느껴보면서 거기서 나의 과거 모습을 돌아보고, 미래의 모습도 한번 상상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